어제 아침 이른 시각, 미국에서 잠시 방문한 여동생과 아내와 함께 충남 태안반도에 자리한 무량사를 찾았습니다.
전날 내린 눈으로 도로 사정이 걱정스러웠지만, 만리포 해변 근방의 소나무 숲이 칼바람을 막아주는 덕에 사찰까지 무사히 닿을 수 있었습니다. 지형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무량사의 아담하고 정다운 풍광은, 첫발을 딛자마자 이곳이 오랜 인연 속에 자리한 수행의 터전임을 느끼게 했지요.
미국에 있던 여동생이 BBS 불교방송에서 소개된 ‘차 명상’ 이야기를 접하고, 한국에 오면 꼭 한번 무량사를 찾아가고 싶어 했습니다. 마침 스님과 연락이 닿았고, 우리는 약속한 시간에 맞춰 도착했습니다. 무량사 앞마당에는 부처님 미소처럼 인자한 표정의 정산 스님께서 두 손을 모은 합장으로 일행을 맞아 주셨습니다.
가장 먼저 무량수전 대법당에 올라 부처님께 삼배를 올리니, 차가웠던 겨울 기운이 법당 안 촛불의 따뜻함에 스르르 녹아드는 듯했습니다. 법당에서 내려온 뒤에는 절 아래 ‘그러려니’라는 이름의 카페로 자리를 옮겼는데, 정산 스님께서 직접 우려 내려주신 한 잔의 따뜻한 차가 묵은 피로와 추위를 달래 주었습니다. 겨울 해가 길게 비치는 아늑한 내부는 원목 탁자와 의자로 꾸며져 있어, 차를 음미하며 이야기 나누기에 편안한 분위기였습니다.
여동생은 미국에서부터 차 명상에 관심이 많았기에, 자연스레 스님과의 대화가 이어졌습니다. 무량사는 30여 년 전 큰스님께서 태안에 절터를 잡고 시작하셨고, 정산 스님은 그로부터 15년 전 이곳에 들어와 수행에 전념하고 있다고 합니다. 차를 준비하고, 물을 끓이며, 찻잔을 정돈하는 과정 자체가 명상이며, 모든 것은 인연법에 의해 존재한다고 스님은 설명했습니다. 흙과 물, 그리고 불의 만남으로 탄생하는 ‘찻잔’처럼, 우리 역시 인연법을 따라 생로병사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람은 자기 마음을 제대로 알 때 삶의 깊이를 더할 수 있다고 강조하셨습니다. 누구나 스스로를 다 알지 못하면서도 남을 알려고 애쓰느라 힘겨워지곤 한다는 말씀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고,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정상이라는 점, 그러니 너무 애달파하지 말고 ‘그러려니’ 하며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이 카페의 이름과도 어우러져 더욱 와닿았습니다.
과거에 매여 사는 사람에게는 실망이 뒤따르고, 현재만 보는 사람은 고단하며, 미래를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따른다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좋고 나쁨 역시 마음먹기에 달려 있어서, 결국 천당과 지옥은 자기 안에 공존한다는 게 스님의 깨우침이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어려운 마음공부가 바로 ‘하심(下心)’, 즉 마음을 낮추고 내려놓는 일인데, 스님조차 순간순간 놓치는 때가 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으셨습니다. 그만큼 마음공부는 끊임없이 다듬어야 할 과제라는 뜻이겠지요.
정산 스님은 원래 서울 강남에서 은행원으로 근무를 하다가 서른을 앞두고 범어사에 들어가 출가했고, 이후 길상사에서 오랜 세월 큰스님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쌓은 수행과 깨달음을 태안의 무량사에서, 그리고 ‘그러려니’라는 카페에서 차와 명상을 통해 세상 사람들과 나누고 계신 것이지요.
석양이 창문을 타고 붉은 빛을 안으로 드리울 무렵, 스님과의 차담은 자연스럽게 마무리되었습니다. 부처님 미소처럼 너그러운 정산 스님께 합장으로 작별 인사를 드리며 “기회가 닿으면 다시 꼭 찾아뵙겠다”는 약속을 건넸습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 여동생은 물론 저와 아내 모두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졌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스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부부가 서로 달라야만 진정한 부부로 살 수 있고, 서로에게 궁금증이 있어야 결혼 생활이 계속된다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바로 그 다름과 궁금함이 두 사람을 ‘백년해로’로 이끌어간다는 깨달음도 얻었습니다. 그렇게 하루의 끝자락에 무량사에서 얻은 가르침을 곱씹으며, 우리는 다시 일상의 터전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번 나들이를 통해, ‘하심(下心)’이라는 말처럼 마음을 낮추고 비우는 일이 쉽지만은 않으나 매우 소중하다는 사실을 다시금 배우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세상사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정상이라면, ‘그러려니’ 하며 긍정과 여유를 찾는 지혜가 우리 삶을 한층 더 풍요롭게 해주리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잠시 차 한 잔이, 혹은 한마디 격려의 말이 그 지혜에 이르는 길잡이가 될 수 있겠지요. 이렇게 마음의 쉼터를 찾아가는 여행이야말로, 바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가장 필요로 하는 순간임을 다시금 깨닫게 해주는 하루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