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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_냉장고를 닫는 일에 관하여

by 퇴B



혼자 사는 여자가 냉장고를 닫는 순간은 체념의 순간이다.

나 혼자 먹자고 거창하게 차려먹는 일이 얼마나 거추장스럽게 느껴지는지.

혹은 번뜩 떠오른 어떤 음식의 식재료도 냉장고에 담겨 있지 않을 때,

배달앱을 켜며 돌아서는 순간이랄까.


혼자 살아간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많은 실패들을 스스로 봉합해 가는 일과 다르지 않다.

닫히는 냉장고 문에는

버리지 못한 마음들과, 내일로 미뤄둔 의지들이 함께 눌린다.


그래도 문을 닫는다.

남은 반찬이 쉬어갈 곳이 필요하듯,

내 마음도 잠시 식혀둘 자리가 필요하니까.


닫는다는 건 포기가 아니라 유예다.

지금은 다 못 먹을 뿐,

언젠가 다시 꺼내 먹을 수 있으리란 믿음 같은 것.


그 믿음이 사라지면,

냉장고는 더 이상 생활의 장치가 아니라

텅 빈 감정의 증거로 남는다.


그래서 나는 하루의 끝마다 냉장고를 닫는다.

오늘의 식욕과 욕심과 피로를 함께 눌러 넣으며.


닫는 소리는 언제나 조금 쓸쓸하지만,

그 쓸쓸함 속에서야 비로소 내일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냉장고를 닫는 일은 단순히 정리의 제스처가 아니다.

그건 오늘의 체념을 내일의 삶 속에 봉합해 넣는 일이다.

삶이란, 그렇게 매일의 잔여를 스스로 봉합해 가며

조용히 형태를 유지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닫는다는 건 멈춤이 아니라 생각의 시작이다.

냉장고 문이 닫히는 순간,

나는 묘하게도 생각이 열린다.

비워내고, 미루고, 정리하며

나는 다시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묻는다.


그래서 나는 믿는다.

이 일상의 반복과 체념 속엔 반드시 철학이 필요하다고.


철학은 먼 데 있지 않다.

그건 냉장고를 닫는 손끝의 무게만큼이나,

생활의 온기를 잃지 않으려는 태도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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