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듦은 본능을 넘어 윤리가 된다
‘편들아~’
박막례 할머니의 그 한마디가 나를 다시 살게 했다.
편듦은 단순한 애정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을 지키는 윤리다.
요즘 다시 박막례 할머니 유튜브를 본다.
할머니는 외래어를 자기식으로 발음하신다.
“편들아~”
‘편들’은 그 실수가 친근하고 귀엽다고 난리다.
나도 그렇다.
근데 틀린 말인가, 저게?
오히려 본질적 의미로 보면 더 옳은 말 아닐까?
‘팬’이란 결국 ‘편’ 아닌가 말이다.
언어적으로 보자면 fan은 fanatic의 축약이다.
광신도, 열광자, 미친 사람.
그런데 우리는 그 단어를 사랑의 이름으로 바꿔 부른다.
비이성의 자리에 애정을 놓고, 광기를 지지로 전환한다.
이건 언어가 감정에 의해 구원받은 드문 사례다.
팬은 작품의 소비자가 아니다.
그가 하는 일을 지켜보며, 실수와 실패까지 함께 감당하는 사람.
그러니까 팬은 단순히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같이 서 있는 사람’, 그의 편이다.
편이란 말에는 방향이 있다.
누군가의 옆에 선다는 건 그가 가는 방향으로 몸을 기울이는 일이다.
그건 감정의 선택이 아니라 존재의 선언이다.
나는 이 사람의 세계에 서 있겠다고,
그의 흔들림을 내 일처럼 받아들이겠다고 말하는 것.
생각해 보면,
내가 박막례 할머니의 채널을 다시 켜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분은 내게 ‘유튜버’가 아니라 ‘할머니’다.
세상에 맞서지 않아도 되는 자리,
내가 뭘 잘못해도 “괜찮다”라고 말해줄 것 같은 사람.
외부 자극과 피로에 지친 내가 그 채널을 켜는 건
아마도 본능적으로 익숙하고 편안한 안정의 편을 찾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막례 할머니의 팬이랍시고 영상을 ‘소비’하고 있지만,
그건 소비라기보다 위로에 가깝다.
할머니가 내 편을 들어주는 듯한 느낌 때문이다.
영상 속에서 할머니는 늘 말한다.
“너 자신을 좀 아껴라.”
“하고 싶은 건 다 해라.”
나는 그 말을 들으며,
할머니가 내 삶의 한가운데서 나를 두둔해 주는 듯한 기분에
잠시 쉬어간다.
진화심리학적으로 보면,
인간은 위협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누군가의 ‘편’에 속하려는 욕구를 발달시켰다.
존 보울비는 이를 애착 행동(attachment behavior)이라 불렀고,
로빈 던바는 그것을 사회적 결속(social bonding)으로 설명했다.
우리가 누군가의 옆에 설 때
뇌는 위협 대신 안정 신호를 보낸다.
결국 ‘편듦’은 생존의 언어다.
그런데 이 편듦은 본능을 넘어 윤리로 확장된다.
홀로코스트 생존자 엘리 위젤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언제나 편을 들어야 한다.
중립은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를 돕는다.
침묵은 고통 주는 자를 용기 내게 한다.”
그의 말처럼, 편듦은 선택이 아니라 책임일지도 모른다.
무관심은 인간성을 마비시키고,
편듦은 인간다움을 회복시킨다.
나는 박막례 할머니의 “편들아~”라는 한마디에서
그 두 극단 사이의 다리를 본다.
진화의 본능과 윤리의 책임이 교차하는 자리,
그게 바로 ‘편’이라는 말이 품은 온도 아닐까.
우린 서로의 편이 되어주어야 한다.
그래야 산다.
우리야말로 이 혹독하고 가혹한 세상에 맞선
피해자이자, 동시에 생존자이기 때문이다.
박막례 할머니의 음식엔 늘 미원이 ‘쬐까’ 들어간다.
우리 엄마는 그런 거 먹으면 안 된다고 하지만,
난 박막례 할머니의 편이기 때문에
장바구니에 미원 쬐깐한 거 하나 담았다.
할머니 레시피 따라 밑반찬을 만들 생각이다.
휴대폰 화면 너머로
우리가 같은 밥상에 앉아 있다고 상상하면서,
뜨신 밥 한 숟갈에 그 ‘편듦’의 맛을 꼭 삼켜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