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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이두씨 May 10. 2024

#4. 내가 할 수 있는 것들

2021년 6월 18일~19일

"이 병원에서 계속 치료하실 건가요?"


아버지가 입원하신 B대학병원에서는 아버지의 병을 담도암으로 진단하고 나서, 추후 당 병원에서 계속 치료할 것임에 대한 의향을 물어왔다. 진단되는 암의 종류에 따라 그 분야의 전문가로 불리는 의사분이 전국 각지에 흩어져 계시니, 어찌 보면 환자의 의향을 현실적으로 묻는 질문이었다.  

우리 가족은 이를 결정하기 위한 조촐한 회의를 유선으로 개최했다. 국내 최고의 대학병원인 S대학병원, 그 분야에 최고 권위자가 있다는 Y대학병원과 A병원까지 몇몇 병원이 우리 가족의 입에 올랐다가 내려갔다가를 반복했다. 그러나, 우리의 많은 논의에 대한 최종적인 결정은 아버지의 몫이었다. 아버지는 코로나19 상황으로 인한 번잡스러움, 그간의 병증 악화로 인한 고통과 함께, 이제 와서 병원을 옮길 때 발생될지 모르는 기약 없는 기다림과 비용 등을 걱정하셨다.


"그냥 여기서 하자. 죽든 살든 여기서 해볼게."


정확히 그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나름 확고하게 말씀하셨지만, 우리 가족은 못내 아쉬움을 숨길 수 없었다.


우리가 아버지의 의사를 B대학병원에 알리자, 병원에서는 후속조치로 아버지 몸의 정확한 상태 진단을 위한 '정밀검사'를 진행하였다. 이 검사를 통해 암이 얼마나 전이되었는지, 수술은 가능한 상황인지 등 보다 구체적인 몸상태를 점검할 수 있다고 하였다. 담도암의 경우 비교적 상황이 '좋은 경우에만' 수술이 가능하다고 했기 때문에, 이제는 오히려 수술할 수 있는 상황이 되길 빌었다. 정밀 검사 결과는 며칠이 지나야 알 수 있었다.

아버지의 입원, 치료 지속 등 초반에 결정되어야 하는 사항이 비교적 빠른 시일 내에 결정되자, 내가 할 수 있는 현실적인 도움을 찾아보려고 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봐도 내가 드릴 수 있는 도움은 극히 제안적이었다. 병원비용이나, 안부 전화 등은 손가락 몇 개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옆에서 도움을 드리고 싶었지만, 코로나19에 대한 국민적 공포감이 점차 커지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대형병원 면회가 보호자 1인으로 제한된 상황이었다. 그 자리는 어머니가 메우셨다. '코로나가 우리 가족에게도 영향을 미치는구나.' 싶었다.


국내에서 막 접종을 시작한 코로나 백신을 맞으면 면회를 자유롭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이른바 '노쇼백신'인 잔여백신을 맞아보기로 했다. 그것이 그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대응이었다. 스마트폰을 들고 새로고침을 연속했다. 매크로 수준의 새로고침 끝에, 목요일인 6월 17일 오후 즈음에 연구원 근처의 병원에서 주인 잃은 백신을 예약할 수 있었다. 세상을 얻은 것처럼 기뻤다. 회사에 공가 신청 후 백신 접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쉬었다. 새벽 1시쯤 되어 심각한 오한으로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다음날인 18일 금요일 오전에 잡혀있는 정부부처 공무원과의 회의를 위해 몸을 일으켰는데, 온몸에 화끈한 열이 느껴졌다. 그래도 회의를 취소할 수가 없어서 움직였다. 몇 시간 회의를 했는데,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흐릿했다. 회의 후 불편한 몸을 이끌고 회사로 돌아왔다. 그날은 하루 종일 정신이 몽롱했는데, 이게 백신 후유증인지 아버지의 병세로 인한 스트레스인지 알 수 없었다.  


의사도 사람이기에, 대학병원도 주말은 특별한 소식을 전해주지 못했다. 우리 가족은 아버지의 정밀검사 결과가 궁금했으나 주말에는 이 결과를 도통 알 수 없었다. 아무것도 오지 않는 택배처럼 다음 주 초가 되길 기다려야 했다.

다음 주 화요일인 22일이 되어서야 어머니와의 통화로 진단검사의 일부가 전해졌다. 당시 전해 들었던 수많은 검사명을 일일이 외울 수는 없었다. '초음파'와 'CT' 까지는 많이 들어 봤었는데, '양성자 방출 단층촬영'이라는 단어부터는 나의 무지함이 슬슬 답답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인터넷 포털로 검색해 보니 대충 암이 어느 정도 퍼져있는지 살펴보는 검사 같았다. 중간중간 모르는 단어를 접하면서 아 이래서 '집안에 의사 하나쯤 있어야 한다.'는 거구나 싶었다.  


"그래도, 수술이 가능하다고 하시네."


복잡한 단어 뒤에 희망의 단어가 있었다. 일단 수술이 가능하다는 것은 무언가 고무적인 것 같았다. 수술은 무척 힘든 수술이 될 것이라고 했다. 담도암의 위치를 고려할 때, 간, 십이지장, 췌장의 일부를 절제해야 하고, 이를 다시 연결하는 대수술이 될 것이라 했다. 의사 선생님의 집도 가능한 날짜를 확인해서 빠른 시일 내로 알려준다고 하셨다.  


... (중략)...


나는 병원을 떠나면서 전날 헌혈 후에 붙인 그 커다란 반창고를 떼어냈다. 하루 만에 내 팔은 그 아픔보다도 훨씬 큰 퍼런 멍이 들어있었다. 내 마음도 그렇게 퍼렇게 멍이 든 것 같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2년이 흐른 뒤에, 지금에서야 이 글을 엮어 책으로 출간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드립니다.

https://bookk.co.kr/bookStore/66332918fc0d5301c78a2ed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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