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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슬 Dec 05. 2023

간극에서 오는 낭만

나는 내가 지난 가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1)


당근마켓에 좋은 의자를 판다는 글이 올라왔다. 내가 사겠다고 하고, 구매자와 만나 꽤 무거운 의자를 들고 4층 집까지 무사히 올라왔다. 불편한 접이식 의자를 치우고, 나무 의자를 놓으니, 생각보다 더 좋았다. 앉는 부분이 깊어 편했고, 등을 완전히 기대면 영화관 의자 같은 느낌을 냈다. 뭐가 어렵다고 지금까지 의자 바꾸기를 미뤘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 접이식의자 위에 올라가 커튼을 달다가 무게중심을 잃고 의자와 함께 접혀버릴 뻔한 적이 있다.



의자도 바꿨겠다, 책상 앞에 앉는 기분이 이렇게 편안하니 영화를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택한 영화는 <남색대문>. 대만 청춘물. 사실 여름과 더 어울리는 영화지만 이번 여름은 너무 더웠으므로 조금 선선한 가을에 보는 게 다행이라는 위로를 한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고등학생들의 사랑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내가 열일곱 살 때 어떻게 학교를 다녔는지 생생하게 기억난다. 점심시간엔 마피아 게임을 하고, 느지막이 매점에 가서 주먹밥 사 먹고, 옥색 체육복 입고 9시까지 야간자율학습을 했다지. 그래서 그 간극에서 오는 차이는 매우 낭만적일 수밖에 없다. 경비아저씨 몰래 학교 수영장에서 수영하고, 학교 끝나면 학원 같은 건 없는 거, 작고 오래된 나무 책상, 이름의 끝 두 글자를 반복해서 부르는 별명 같은 거… 원래 가지지 못한 것이 더 좋아 보이고, 가보지 않은 길이 더 궁금하다.


자신을 “난 전갈자리, 기타클럽, 수영부야” 라고 소개하는 스하오. 스하오 식으로 나를 소개한다면

난 양자리, 개그동아리, 방송부야 정도가 될까. 개그동아리는 고등학교 2학년 때 마음이 맞는 친구들끼리 만든 교외동아리다. 여름에 산 아래 수영장에 가서 수영하고, 고기 구워 먹고, UCC를 찍은 게 추억이라면 추억이다.


눈을 감아도 네 모습은 보이는데, 내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커로우. 나에게도 이번 여름은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 같았고, 스스로 ‘내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며 방황했다. 여름에 떠돌던 나는 어디로 갔을까나. 가을을 지나서 겨울까지 왔다. 잘 와서 그때의 회고록을 쓰고 있다. 커로우에게 뭐라도 말해주고 싶지만, 그땐 어떤 말을 해도 들리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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