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채환 Jan 27. 2024

[인간의 마음] 3/3

함께 책 읽기 ⑫ - 에리히 프롬, The Heart of Man

5. 근친상간적 유대

 갓난아이는 무력하고 자신의 힘에 의지할 수 없으므로 자신의 힘으로는 구할 수 없는 사랑과 보호를 욕구하게 된다. 이러한 기능을 어머니가 수행하지 못하면 어머니의 기능을 대신할 수 있는 H. S. 설리번의 이른바 '어머니와 같은 사람'이 수행한다.


 이러한(통제할 수 없는, 예측할 수 없는 사고, 병, 죽음 등) 환경에서 사람이 확실성과 보호와 사랑을 주는 힘을 미친 듯이 갈망하는 것보다 더 자연스러운 일이 있을까?


 만일 남성이건 여성이건 간에 사람이 나머지 생애를 통해 '어머니'를 찾아낼 수 있다면 그 삶은 모험과 비극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양성 단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어머니 고착의 형태가 있다. ... 자기를 위해주고 사랑해주고 칭찬해 줄 여자가 필요하다. 그들은 어머니처럼 돌봐주고, 먹여주고, 보호해 줄 여자를 바란다. 그들은 이러한 사랑을 얻지 못하게 되면 약간은 불안해지고 의기소침해진다.


 어머니 고착의 이 두 번째 단계에서는 남성이 자신의 독립성을 발달시키지 못한다. 이러한 단계의 별로 심하지 않은 형태를 보면 언제나 돌봐주면서 요구는 거의 하지 않거나 전혀 하지 않는 어머니 같은 인물, 다시 말해 무조건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언제나 옆에 있어야 하는 고착이다.


 어머니 고착이 유혹적인 남성의 자아도취적 태도와 혼합되는 또 하나의 형태가 있다. 이러한 남성은 흔히 어릴 적에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자기를 더 좋아하며 자신은 어머니의 찬양을 받고 있지만 아버지는 경멸당하고 있다고 느꼈던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의 경우 자기 자신을 가치 있다고 생각하게 하는 모든 의식은 그들을 무조건 한없이 찬양하는 여성과의 관계에 달려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강렬한 어머니 고착의 다른 모든 경우와 마찬가지로 어머니 같은 인물 이외의 다른 사람에게 (그가 남성이건 여성이건 간에) 사랑이나 관심이나 충성을 느끼는 것은 죄다.


 아버지의 기능은 다르다. 아버지는 사람이 만든 법과 질서, 사회적 규칙과 의무를 대표하고, 벌을 주고 상을 주는 자이다. 그의 사랑엔 조건이 붙어 있어서 요구하는 바를 할 때에만 얻을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말미암아 아버지와 결합된 사람은 아버지의 뜻을 따름으로써 쉽게 아버지의 사랑을 얻으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지만 완전하고 무조건적인 사랑이라는 행복감, 확실성과 보호는 아버지와 결합된 사람의 경험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또한 아버지 중심적인 사람에게서는 어머니 고착과 관련하여 설명하려고 하는 심각한 퇴행을 보게 되는 경우가 드물다.


 어머니 고착의 가장 심각한 단계는 '근친상간적 공생' 단계다. ... 공생적으로 달라붙어 있는 사람은 그가 달라붙어 있는 '숙주' 같은 사람의 한 부분이고 그 사람과 한 덩어리다. 그는 이 사람 없이는 살 수 없으며 만일 이러한 관계가 위협받으면 몹시 불안해지고 두려워진다.


 그는 상대방과 일체가 되고 그녀의 한 부분으로서 그녀와 섞여 있다고 느낀다.


 중증일 경우, 공생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사람이 그의 숙주에게 '의존'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왜 잘못인지를 이러한 분리감의 결여를 통해 설명할 수 있다.


 근친상간적인 정위는 자아도취와 마찬가지로 이성 및 객관성의 갈등을 일으킨다.


 이러한 형태의 판단력 손상은 고착의 대상이 어머니가 아니라 가족, 민족 또는 인종일 때에는 매우 애매해진다. 이러한 고착은 미덕으로 생각되므로 강렬한 민족적/종교적 고착은 쉽게 편견을 갖고 왜곡된 판단을 내리게 하며, 이러한 판단은 같은 고착에 참가하는 다른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는 것이기 때문에 진리로 생각된다.   


 두 번째로 가장 중요한 병리학적 특색은 다른 사람을 충분히 사람으로 경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 근친상간적 고착은 퇴행의 정도에 따라 사랑하는 능력을 손상시키거나 파괴한다.


 세 번째 ... 독립성과 성실성과의 갈등이다. 어머니나 종족에게 결합되어 있는 사람은 마음대로 자기 자신이 될 수도 없고 자신의 확신을 가질 수도 없으며 마음대로 어떤 일에 관여하지도 못한다.


 근친상간적 고착은 대체로 그 자체로는 알아볼 수 없거나 또는 합리적인 것으로 보이도록 합리화된다. ... 어머니에게 이바지하는 것이 나의 의무라거나, 어머니는 나를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았고 나의 생명은 어머니가 준 것이라거나, 어머니는 너무나 고생을 했다거나 또는 어머니는 참으로 훌륭하다거나 하는 식으로 합리화하는 것이다.


 어머니 같은 사람이나 어머니와 동등한 것들, 즉 혈연, 가족, 종족에 결합되어 있으려는 경향은 모든 사람에게 고유한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태어나고, 진보하고, 성장하려는 반대되는 경향과 끊임없이 갈등을 일으킨다.


 자기가 왔던 곳과 유대를 잃고 싶지 않다는 소망, 자유에 대한 두려움, 그 사람을 위해서라면 스스로 어떠한 독립성이라도 포기하고 무력해지려는 바로 그 인물에 의해 파멸당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등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정위(죽음에 대한 사랑, 자아도취, 근친상간적 고착)가 악성이면 악성일수록 세 가지 경향은 더욱 집중된다.


 그들은 물론 이와 같은 동기를 갖지 않을 사람들조차 진정한 동기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투쟁, 분쟁, 냉전 또는 열전의 시기에 증오라는 전염병을 퍼뜨리는 위험한 보균자가 된다. 그러므로 그들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 다시 말해 그들이 죽음을 사랑하고 독립성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며 그들에게는 오직 자기 자신이 속한 집단의 욕구만이 현실성을 갖는다는 사실을 간파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꼭 배워야 할 게 하나 있다. 곧 말을 곧이곧대로 현실로 받아들이지 말고 인간만이 걸리 수 있는 병, 다시 말해 삶이 사라지기도 전에 삶을 부정하는 병에 걸린 사람들의 기만적인 합리화를 간파할 줄 알아야 한다.


 한편 최적의 성숙에 도달한 사람의 경우에도 이 세 가지 정위는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죽음에 대한 사랑의 반대는 삶에 대한 사랑이고, 자아도취의 반대는 사랑이고, 근친상간적 공생의 반대는 독립성과 자유이다. 이러한 세 가지 태도의 증후군을 나는 성장의 증후군이라고 부른다.


6. 자유, 결정론, 양자택일론

 우리는 사람의 본질 또는 본성을 말할 수 있는가? 만일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 정의될 수 있는가?


 하나는 사람의 본질 같은 것은 없다는 견해이다. 이러한 견해는 인류학의 상대론이 주장하는 것으로 사람은 사람을 형성시키는 문화적 패턴의 소산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한편 진화론적 개념을 받아들이고 사람은 끊임없이 변한다고 믿는다면 이른바 사람의 '본성' 또는 '본질'의 내용만으로는 무엇이 남을까?


 나는 사람의 본질을 타고난 소질 또는 실체로 정의하지 않고 인간 존재에 내재하는 모순으로 정의할 때 이와 같은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사람 내부에 있는 갈등 자체가 해결을 요구한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홀로 있다는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어 세상에 안주하고 합일감을 갖게 하는 조화를 갖기 위해 사람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모든 대답이 갖추어야 할 한 가지 조건이 있는데, 곧 그 대답은 분리감을 극복하고 합일감, 일체감, 소속감을 얻도록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어야 한다.


 분리를 초월해 합일을 이루려는 추구에 대한 첫 번째 대답을 나는 퇴행적 대답이라 부르려 한다. ... 퇴행적인 원초적 경향을 많은 사람들이 공유할 때 우리는 대중적 우행을 보게 된다.


 이러한 공통된 어리석음에 참여하는 개인은 완전한 고립감이나 분리감을 갖지 않으며 따라서 전진적인 사회에서 겪게 될 강렬한 불안감을 느끼지 않는다.


 사람의 문제에 대한, 사람이라는 부담에 대한 퇴행적이고 원초적인 해결을 대신하는 것이 전진적 해결, 다시 말하면 퇴행이 아니라 모든 인간적인 힘, 자기 내면의 인간성을 충분히 발달시켜 새로운 조화를 찾으려는 해결 방법이다.


 삶이 제기하는 문제에 올바른 대답을 함으로써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었고 사람이 충분히 사람다워짐으로써 분리되어 있는 공포를 버리려는 것이었다.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500년 후와 1천 년 후에 유럽과 지중해 여러 나라들에 각각 같은 사상을 전했을 때 ... 스스로 충분히 사람다워지는 대신 사람은 신과 교리를 '새로운 목표'가 나타난 것으로 우상화했으며, 따라서 형상 또는 말을 자기 자신의 경험의 현실성으로 삼게 되었다.


 이 같은 모든 새로운 종교의 사상 개념은 서로 달랐지만 사람에게 기본적인 양자 택일이 있다는 사상만은 공통되었다. 사람은 두 가지 가능성, 곧 퇴행 가능성과 전진 가능성을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오늘날 이 같은 전진적인 문화에 있어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당히 힘 있는 퇴행적 기능을 갖지만 이러한 경향은 정상적인 생활 과정에서 억압되고 전쟁 같은 특별한 조건에서만 나타난다.


 현대 사회에는 의식적으로는 기독교 교리나 계몽주의 주장을 믿으면서도 이러한 전면의 배후에서는 '광포한 전사'이거나, 죽음을 사랑하는 사람이거나, 바알 신 또는 아슈타르테(고대의 신)를 숭배하는 원초적인 정위를 가진 사람들이 몇 백만이나 있는 것이다.


 개인이나 집단은 각기 어떤 시점에서는 가장 불합리하고 파괴적인 정위로 퇴행할 수도 전진적인 정위로 나아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우리들에게 중요한 문제이다.


 현실적으로는 두 가능성 모두 현실적인 잠재력으로 보고 그중 하나를 발달시키는 조건이 무엇인지를 연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고찰을 통해 우리는 자유라는 문제에 도달한다. 사람은 어느 순간에도 선을 선택할 자유를 갖고 있을까?


 결정론자들은 사람은 자연의 다른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원인에 의해 결정되므로 자유롭지 않다고 말해왔다. ... 사람은 그를 결정하고, 그에게 강요하고, A나 B를 선택하게 하는 동기 때문에 A 또는 B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결정론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정반대 주장을 한다. 첫째, 종교적 근거에서 신이 사람에게 선과 악을 선택할 자유를 주었으며 따라서 사람이 이러한 자유를 갖는다는 주장이다. 둘째, 사람이 자유롭지 않다면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질 수 없으므로 사람은 자유롭다는 주장이다. 셋째, 사람은 자유롭다는 것을 주관적으로 경험하며 이러한 자유에 대한 인식은 자유가 존재한다는 증거라는 주장이다.

 이 세 가지 주장은 모두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 같다. 첫 번째 주장은 신을 믿을 것을 요구하고 ... 두 번째 주장은 사람으로 하여금 책임을 지게 하고 이에 따라 처벌할 수 있게 하려는 소망에서 나온 듯하다.


 세 번째 주장은 ... 스피노자는 "우리는 우리의 욕망을 알고 있으나 그 동기는 모르기 때문에 자유롭다는 환상을 갖는다"고 지적했다. 라이프니츠도 "의지는 부분적으로는 의식되지 않는 경향에 그 동기가 있다"고 지적했다. ... '선택의 자유'에 대한 문제는 무의식적인 힘이 우리를 결정한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해결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자유의 최적 조건을 획득하고 필연의 쇠사슬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그 사람 개인에게 달려 있다. 프로이트의 경우 무의식을 아는 것이, 마르크스의 경우 사회적/경제적 힘과 계급의 이익을 아는 것이 해방을 위한 조건이었다. 두 사람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각성에 덧붙여 능동적인 의지와 투쟁이 해방의 필요조건이었다.


 의지와 자유에 대한 종래의 논의가 보여주는 오류는 ... *특수한 어느 개인의 선택의 자유가 아니라 인간의 선택의 자유를 말한다는 점에 있다. ... 선택의 자유를 가진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선택의 자유를 상실한 사람도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사람이 선과 악을 '일반적으로' 선택하고 선을 선택할 자유를 갖는다는 듯이 일반적인 방식으로 선과 악의 문제를 다루는 경향 ... 선택 문제에 대한 우리들의 도덕적 갈등은 우리가 선과 악을 일반적으로 선택할 때가 아니고 구체적인 결정을 내리지 않을 수 없을 때 일어난다.


 *성향의 여러 가지 정도보다는 오히려 선택의 자유와 선택의 결정론을 대립시켜 다루고 있다는 점에 있다.


 *'책임'이라는 개념 ... 책임이라는 말은 보통 내가 벌받을 만하다, 또는 내가 비난받을 만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된다.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라", 즉 "악을 외면하고 악한 것을 골똘히 생각하지 말고 선을 행하라"고 쓰여 있는 까닭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대는 잘못을 저질렀는가? 그렇다면 올바른 일을 해서 균형을 이루도록 하라.


 [구약성서]에 나오는 'chatah'라는 말은 보통 '죄'의 의미로 번역되지만 사실은 '(길을) 잃은 것'을 뜻한다. ... '참회'에 해당하는 히브리 말은 'teschubah'인데 이는 '(신에게, 자기 사진에게, 올바른 길로) 되돌아온다는 것'을 의미하며 ...


 이러한 모든 결심(흡연이 해롭다는 것을 알고 끊기로 하는 결심)은 관념과 계획, 상상에 지나지 않으며 진정한 선택을 할 때까지는 이러한 결심이 거의 또는 전적으로 현실성을 갖지 못한다.


 선택의 문제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상관없이 선택의 성격은 똑같다. 바로 이성의 명령을 받는 행동과 비합리적인 격정의 명령을 받는 행동 중에서 선택하는 것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사람의 행동은 격정 또는 이성이 원인이 되어 결정된다. 격정의 지배를 받을 때 사람은 속박받고 이성의 지배를 받을 때 사람은 자유롭다.

 비합리적인 격정은 사람을 압도하여 자신의 참된 관심과는 모순되는 행동이 불가피하게 만들고, 그의 힘을 약화시키고 파괴해서 고통받게 하는 격정이다.


 선택의 자유는 ... 오히려 그 사람의 성격 구종의 기능이다. 성격 구조가 선에 따라 행동할 능력을 잃었기 때문에 선을 선택할 자유를 갖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바로 그들의 성격 구조가 악에 대한 갈망을 상실했기 때문에 악을 선택할 능력을 잃어버린 사람도 있다.


 이제는 '자유'라는 개념을 두 가지 다른 뜻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 분명해졌을 것이다. 첫째로 자유는 성숙해 있고 충분히 발달해 있는 생산적인 사람의 태도와 정위, 성격 구조의 일부이다. ... 사실상 자유로운 사람은 사랑할 줄 알고 생산적이고 독립적인 사람이다.


 두 번째 뜻은 ... 반대되는 것을 양자택일해야 할 때 선택해야 하는 능력이라는 뜻이다. ... 이처럼 자유가 두 번째 뜻으로 사용될 때 가장 착한 사람과 가장 나쁜 사람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없고 단지 모순된 성향을 지닌 평범한 사람만이 자유롭다. 평범한 사람의 경우 선택의 자유라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선택의 자유를 뒷받침해 주는 요소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 더 나쁜 것보다는 더 좋은 것을 선택하게 해주는 결정적인 요인은 자각이라고 할 수 있다.


  1)선 또는 악을 구성하는 것을 아는 것

  2)구체적 상황에서 어떠한 행동이 소망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적합한 수단인지를 아는 것

  3)명백한 소망의 배후에 있는 힘을 아는 것 (이것은 무의식적인 욕구의 발견을 뜻한다)

  4)여럿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현실적인 가능성들을 아는 것

  5)그것 대신 이것을 선택한 결과를 아는 것

  6)안다는 것에 행동하려는 의지, 자신의 격정에 어긋나는 행동에 반드시 따르게 마련인 욕구불안의

    고통을 겪어 나갈 용의가 따르지 않는 한 아는 것 자체는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아는 것


 각성은 그 결과를 책임질 수 없는 '의견'이 아니라, 스스로 경험하고, 스스로 실험하고, 다른 사람을 관찰하고, 확신을 얻음으로써 배운 바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을 말한다.


 각성의 다음 단계는 그가 한 행위의 결과를 충분히 아는 단계다. 결정의 순간에 그의 마음은 욕망과 자위적인 합리화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행동 결과를 분명히 알 수 있었다면 그가 내린 결정은 달랐을 것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각성이 필요하다. 그것은 언제 사실상의 선택이 이루어지며 한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현실적인 가능성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삶에서 실패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그들이 아직도 이성에 따를 수 있는 자유로운 순간이라는 점을 모르는 점에 있다. 또한 결정을 하기에는 너무 늦은 순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선택을 하기 때문이라고 일반화해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잘못된 선택을 오래 계속하면 할수록 우리 마음은 굳어진다. 올바른 선택을 하면 할수록 우리 마음은 부드러워진다.


 결정적인 요인을 정당하게 분석할 줄 모르는 서투른 사람만이 이길 자유를 잃은 다음에도 여전히 이길 수 있다는 환상을 갖는다. 이러한 환상 때문에 그는 처참한 결말이 올 때까지 수를 계속하다가 결국에는 외통 장군을 당한다.


 자유는 우리가 '갖거나' 또는 '갖지 않는' 항구적인 속성은 아니다. ... 다시 말해 결정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행동만이 있을 뿐이다.


 삶의 각 단계가 나의 자기 신뢰, 나의 성실성, 나의 용기, 나의 확신을 증대시켜 준다면 양자택일을 해야 할 때 바람직한 선택을 하는 나의 능력도 증대하며 마침내는 바람직한 행동 대신에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을 선택하는 것이 더욱 어려워진다.


 선을 선택하는 자유가 크다면 선을 선택하기란 별로 어렵지 않다.


 잘못된 길을 걸으면 걸을수록 자신들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가 더욱 어려워지게 된다. 그것은 흔히 맨 처음 잘못 들어선 곳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정력과 시간을 낭비해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 싫기 때문이다.


 그가 비난해야 할 오직 하나의 사실은 문제에 직면할 용기와 그 문제를 이해할 이성이 자기 자신에게 없었다는 것뿐인데도 그는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자기 자신을 변호하고, 신에게 기도하는 잘못에 빠진다.


 자유는 '필연성을 알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양자택일과 그 결과를 알고 그것을 바탕으로 행동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세 사상자, 곧 스피노자, 마르크스, 프로이트 ... 이 세 사람은 흔히 '결정론자'로 불린다. 이렇게 부를 충분한 이유가 있으며 스스로 결정론자로 자처한 가장 훌륭한 사상가들이다.


 그러나 스피노자, 마르크스, 프로이트를 이와 같이 결정론자로 해석하는 것은 이 세 사상가의 또다른 철학적인 측면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다. 왜 '결정론자' 스피노자의 주저가 윤리학에 대한 책이었을까? 왜 마르크스의 주된 의도가 사회주의 혁명이었고, 프로이트의 주요 목표가 신경증 때문에 정신적으로 앓고 있는 사람을 치료하는 치료법에 있었을까?

 ... 세 사상가는 모두 사람과 사회의 행동이 어느 정도는 어떤 방식으로 기울어지고 때로는 결정적일 정도로 기울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그들은 설명하고 해석하려 한 철학자였을 뿐 아니라 변혁하고 변화시키려는 사람들이었다.


 스피노자의 책이 개인의 '구원'(여기서 구원은 자각과 노력에 의해 자유를 정복한다는 뜻)을 목적으로 하는 논문이라면 마르크스의 의도도 개인의 구원에 있었다.


 그(마르크스)의 모든 일은 어떻게 하면 각성과 노력에 의해 자유로워질 수 있는지를 사람에게 가르치려는 노력으로 귀결된다.


 프로이트도 변혁하려 한 사람이었다. 그는 신경증을 건강으로 바꾸고 이드의 지배를 자아의 지배로 바꾸어 놓으려 했다. 사람이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자유를 잃는 것 말고 그 어떤 신경증이 있겠는가?


 세 사상가 모두에게 공통적인 몇 가지 주요 개념이 있다.

 첫째, 사람의 행동은 선행된 원인에 의해 결정되지만 그는 각성과 노력을 통해서 이러한 원인의 힘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둘째, ... '구원' 또는 자유에 도달하기 위해서 우리는 알아야 하고 올바른 '이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행동하지 않고 투쟁하지 않는 한 알 수 없다.


 셋째, 사람은 독립과 자유를 위한 투쟁에서 패배할 수도 있다고 한 점에서 그들은 결정론자였지만 본질적으로 양자택일론자였다.


 우리들이 탐구한 결과를 요약해 보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1)악은 각별히 인간적인 현상이다. 그것은 사람 이전의 상태로 퇴행하고 각별히 사람답게 만드는 것, 곧 이성과 사랑과 자유를 제거하려는 것이다.


 악은 사람이 인간성이라는 짐을 벗으려고 비극적으로 노력하다가 자기 자신을 상실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에게는 악을 위한 모든 가능성을 상상하고, 따라서 이러한 가능성에 따라 욕망하고 행동하며, 자신의 사악한 상상을 살찌게 할 수 있는 상상력이 주어져 있다. 때문에 악의 잠재력은 더욱 커진다.


 2)악의 정도는 동시에 퇴행의 정도다. 최대의 악은 가장 삶에 반대하는 충동들, 곧 죽음에 대한 사랑, 자궁으로, 땅으로, 무기물로 되돌아가려 하는 공생적-근친상간적 충동, 바로 자기 자신의 자아라는 감옥을 떠날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을 삶의 적으로 만드는 자아도취적인 자기 희생이다.


 3)퇴행 정도가 적음에 따라 악의 정도도 덜하다.


 4)사람은 퇴행하는 경향 그리고 전진하는 경향을 갖고 있다.


 5)사람은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는 한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다. 그러나 책임은 흔히 윤리적인 요청이나 사람을 처벌하려는 권위자의 욕망이 합리화한 데 지나지 않는다.


 6)사람의 마음은 굳어질 수 있다.


 사실상 우리가 선을 택하기 위해서는 각성해야 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보고 가슴 아파하고 다른 사람의 친절한 시선, 새의 노래, 풀밭의 푸르름에 감동할 줄 아는 능력을 상실한다면 어떠한 각성도 우리를 도와줄 수 없을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섹스의 진화] 1/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