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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채환 Jan 27. 2024

[인간의 마음] 2/3

함께 책 읽기 ⑫ - 에리히 프롬, The Heart of Man

3. 죽음에 대한 사랑과 삶에 대한 사랑

 죽음을 사랑하는 정위를 가진 사람은 살아 있지 않은 모든 것, 다시 말해 죽어 있는 모든 것, 곧 시체, 부패, 배설물, 오물에 집착하고 매혹당하는 사람들이다. ... 그들은 오로지 죽음에 대해 말할 때만 생기가 돈다.

 순수하게 죽음을 사랑하는 유형을 보여주는 명백한 예는 히틀러다. ... 한 병사가 썩은 시체를 바라보며 넋을 잃고 꿈쩍도 하지 않는 히틀러를 보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냉담하고 쌀쌀하며 '법과 질서'의 신봉자다.


 죽음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두 가지 '성 性', 곧 강력한 자와 무력한 자, 죽이는 자와 죽음을 당하는 자가 있을 뿐이다. 그는 죽이는 자를 사랑하고 죽음을 당하는 자를 비웃는다.


 삶의 특징은 구성적/기능적 방식으로 성장하는 데 있지만 죽음을 사랑하는 사람은 성장하지 않는 모든 것, 기계적인 모든 것을 사랑한다.


 죽음을 사랑하는 사람은 어둠과 밤에 집착한다.


 죽음을 사랑하는 경향은 대체로 사람들의 꿈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꿈에서는 살인, 피, 시체, 해골, 배설물 등이 나오고, 때로는 사람이 기계로 변하거나 기계처럼 행동하기도 한다.


 흔히 겉모습과 몸짓에서 ... 그는 냉담해 보이고, 살갗은 죽은 사럼처럼 보이며, 마치 나쁜 냄새를 맡은 듯한 불쾌한 표정을 짓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이러한 표정을 히틀러의 얼굴에서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죽음을 사랑하는 정위에 대한 지금까지의 설명에서 나는 여기서 기술한 모든 특징이 죽음을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반드시 발견된다는 인상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죽이고 싶다는 소망, 힘 숭배, 죽음과 오물에 대한 집착, 가학증, '질서'를 통해 유기적인 것을 무기적인 것으로 바꿔놓으려는 소망 등 이러한 정위가 보여주는 여러 가지 특징은 동일한 기본적 정위를 구성하는 다양한 부분들이라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개인이 문제가 되는 경우 이러한 각각의 경향은 강도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나는 프로이트의 '죽음의 본능'에 대한 가정에 반대한다. 대신 수많은 생물학자들과 철학자들이 "살려고 하고 그 존재를 유지하려 하는 것은 모든 생명체의 고유한 성질"이라고 가정했던 것에 동의한다.


 성적 본능은 생물학적으로 삶에 이바지하는 것이지만 심리학적으로는 반드시 삶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성적 본능에 이끌리지 않거나 뒤섞이지 않을 수 있는 강렬한 감정은 거의 없는 듯하다.


 그러나 이유는 어떻든지 간에 성적 욕망과 파괴성이 섞여있다는 사실에는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삶에 대한 사랑이 충분히 전개되는 모습은 생산적인 정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삶을 충분히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삶과 성장의 과정에 매혹된다.


 삶을 사랑하는 윤리는 스스로 선과 악의 원리를 가지고 있다. ... 선은 삶을 존중하는 것, 삶과 성장과 전개를 드높이는 모든 것이다. 악은 삶을 질식시키고 삶을 옹색하게 만들고 삶을 조각나게 하는 모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죽음을 사랑하는 정위와 삶을 사랑하는 정위는 독특한 방식으로 섞여 있으며 중요한 것은 두 경향 가운데 어떤 면이 지배적인가 하는 것이다.


 삶에 대한 사랑을 발달시키기 위해 필수적인 조건 ... 어린 시절에 따뜻하고 애정 어린 사람들과 자주 접촉하는 것, 자유롭고 아무 위협도 없는 상태, 내면적 조화와 힘을 기르는 원리의 가르침, 설교보다는 시범으로 행하는 '살아가는 기술'에 대한 지도, 남의 영향과 자극을 받고 이에 반응하는 것, 참으로 즐거운 생활방식 등이다.

 이러한 조건들과 반대되는 것은 죽음에 대한 사랑하는데 촉진제가 된다. ... 아무 자극도 없는 상태, 틀에 박힌 흥미 없는 삶으로 만들기 위한 조건인 공포, 사람들 간의 직접적이고 인간적인 관계 속에 결정되는 것이 아닌 기계적인 질서 등이다.


 삶에 대한 사랑을 발달시키는 사회적 조건을 보면 ... 경제적/심리적인 풍요 대 빈곤이라는 상황이다. 사람의 에너지 대부분이 생명을 지키기 위해, 또는 굶주림을 막기 위해 쓰여지는 한 삶에 대한 사랑이 저해받지 않을 수 없고 죽음에 대한 사랑이 조장되지 않을 수 없다.

 삶에 대한 사랑을 발달시키는 또 하나의 중요한 사회적 조건은 부정을 없애는 것이다. ... 부정이라는 개념은 사람이 자기 자신의 목적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어버린 사회적 상황을 가리킨다.


 요약하자면 위엄 있는 생활을 위해 기본적인 물질적인 조건이 위협받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안전 보장이 되고,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정의로우며, 각자가 사회의 능동적이고 책임 있는 일원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의미에서 자유로운 사회일 때 삶에 대한 사랑은 가장 원활하게 발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핵전쟁의 폐해가 이렇게 막대한데도) 왜 이를 항의하는 움직임이 더 이상 확대되지 않은 채 핵전쟁 준비가 계속되고 있을까? 자식과 손자를 거느린 사람들이 분연히 일어나 항의하지 않는 까닭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에 대한 많은 대답이 있다.17)
     주석 17)  중요한 대답 가운데 하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들의 개인적인 생활을 깊이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 같다. 입신출세하려는 끊임없는 투쟁, 실패하지나 않을까 하는

                끊임없는 공포는 지속적인 불안과 스트레스 상태를 만들어내고, 이러한 상태는 평범한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과 세상의 존재에 대한 위협을 잊게 한다.


 관료적으로 조직되고 중앙집권화된 산업주의에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최대한으로, 그것도 예측할 수 있고 이익이 될 수 있는 방향으로 소비하도록 하기 위해 취미가 조작된다. 독창적이고 모험적인 것보다는 평범하고 무난한 것을 선택하게 하는 기준이 점점 더 큰 역할을 함에 따라 그들의 지성과 성격은 점차 표준화되어 간다.


 죽이는 것이 우리들의 오락에서 맡고 있는 역할을 생각해 보자. 영화, 만화 시리즈, 신문 등은 파괴, 가학증, 잔인성으로 가득 차 있어서 온통 흥분되게 하는 것뿐이다.


 이미 죽음에 대한 매혹이 얼마나 깊어졌는지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죽음에 대한 사랑에서 생기는 삶에 대한 경멸과 빠른 속도 및 기계적인 모든 것에 대한 찬양이 인척관계에 있다는 것은 지난 수십 년 동안 비로소 분명해진 사실이다.


 문제는 삶의 원리가 기계화의 원리에 종속되어 있는가 또는 지배적인가 하는 것이다. 분명 산업화한 세게는 아직까지 여기서 제시된 문제, 곧 어떻게 하면 오늘날 우리들 삶을 지배하고 있는 관료적 산업주의에 반대되는 휴머니즘적 산업주의를 창조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대해 명쾌한 해답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4. 개인적 자아도취와 사회적 자아도취

[개인적 자아도취]

 프로이트의 발견 중에서 가장 풍요롭고 가장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 것 가운데 하나는 자아도취라는 개념이다. 프로이트 자신도 이 개념을 그의 가장 중요한 발견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했으며, 정신병(자아도취적 신경증), 사랑, 거세 공포, 질투, 가학증 같은 명백한 현상 그리고 피지배 계급이 그들의 지배자들에게 충성을 바치는 것 같은 대중현상을 이해하는 데 이 개념을 사용했다.


 "외부세계로부터 철수된 리비도는 자아로 향하게 되고 따라서 자아도취라 부를 수 있는 태도를 발생시킨다."


 '정상적'이고 '성숙한' 사람은 자아도취가 완전히 없어진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있을 만큼 축소된 사람이다.


 자아도취의 가장 기본적이 예 가운데 하나는 보통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육체에 대해 보이는 태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의 몸이나 얼굴이나 생김새를 좋아하고, 좀 더 멋진 사람으로 변하고 싶지 않냐고 물으면 아주 분명하게 싫다고 대답한다.

 이 점을 좀 더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배설물은 무척 싫어하면서도 자신의 배설물을 보거나 냄새 맡는 것에 개의치 않는다는 사실이다.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여성을 짝사랑하는 자아도취적인 사람에게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자아도취적인 사람은 여성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자아도취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의 현실이 자신의 현실과 다르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는 점에 있다.


 자기애 ... 우울증 ...

 ... 중요한 것은 이 두 현상의 배후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도취적인 선입관, 외부 세계에 거의 관심을 잃게 하는 선입관이 깔려 있다는 점이다.

 도덕적인 우울증도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 ... 이러한 사람은 언제나 부정을 하고 잘못을 저질렀다는 죄책감, 자기가 저지른 일에 대한 죄책감 등에 마음이 사로잡혀 있다.


 자아도취적 사람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 ... 온갖 자기 만족의 징후를 보이는 사람이 바로 이러한 유형이다.


 우리는 또한 이들이 어떤 종류의 비판에도 무척 민감하다는 점에서 자아도취적인 사람을 알아볼 수 있다.


 많은 경우 자아도취적 정위는 수줍고 겸손한 태도의 배후에 숨겨져 있을 것이다. ... 자아도취의 모든 형태에 공통된 점은 외부 세계에 대한 순수한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매우 자아도취적인 사람은 대체로 끊임없이 말을 한다.


 자아도취가 심하면 심할수록 자아도취적인 사람에게는 스스로 실패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거나 다른 사람의 비판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욱 어려워진다.


 자아도취적인 사람은 '자아상'을 자아도취적 애착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과 관련된 모든 것에 애착을 느낀다. 그의 사랑, 그의 지식, 그의 집, 또 그의 '관심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아도취적 애착의 대상이 된다.


 어른들의 남녀 사이 사랑도 때로는 자아도취적 성격을 띤다. 어떤 여자를 사랑하는 남성은 일단 '그의 것'이 되고 나면 자신의 자아도취를 여성에게 전이할 수 있다.


 극단적인 개인적 자아도취가 모든 사회생활에 심한 장애물이 된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자아도취가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하며 동시에 생존에 위협이 된다는 역설적 결과에 이르렀다. 이 역설의 해결에는 두 가지 방향이 있다. 하나는 최대의 자아도취보다 최적의 자아도취가 생존에 이바지한다는 것이다. ... 또 하나는 개인적 자아도취가 집단적 자아도취, 즉 개인 대신에 씨족, 나라, 종교, 인종 등을 자아도취적 격정의 대상으로 삼는 자아도취로 바뀐다는 사실입니다.


 자아도취적 애착의 가장 위험한 결과는 합리적 판단의 왜곡이다.


 자아도취적인 사람은 자기 자신이 만들어낸 것을 높이 평가하기 쉬우며 그가 만들어낸 것의 실제 성격은 이러한 평가에 있어서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보통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자기 생각은 객관적이고 현실적이라고 확신한다. 따라서 그의 생각하고 판단하는 능력은 더욱 심하게 왜곡된다.


 자아도취적인 사람은 비판을 받으면 격렬하게 화를 내는 반응을 보인다. 그는 이 비판을 적대적인 공격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고립감과 공포는 자아도취적인 자기팽창에 의해 보상을 받는다. 만일 그가 세계라면 밖에 그를 두렵게 만드는 세계가 있을 수 없다. 만일 그가 모든 것이라면 그는 홀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자아도취가 상처를 받고 그의 처지가 비판자에 의해 주관적으로든 객관적으로든 약하다는 것 등의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화를 낼 수 없는 것이 되면 그는 의기소침해진다. 그는 세계와 관계가 없으며 세계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자아도취적인 사람은 자신의 자아도취가 상처를 입은 결과 생기는 의기소침한 상처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이러한 상처를 피하려고 한다. 상처를 피하는 몇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외부 비판이나 실패가 자신의 자아도취적 태도에 사실상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자아도취를 강화하는 것이다.


 또 한 가지 방법 ... 현실을 어느 정도까지는 자신의 자아도취적 자아상에 맞도록 바꾸려고 하는 해결책이다.


 더 중요한 해결책은 다른 사람의 동의를 얻으려고 하고, 또한 가능한 한 몇 백만 명의 동의를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 몇 백만 명의 찬양과 지지를 얻음으로써 자신의 잠재적인 정신병이 공공연하게 터져나오는 것을 막으려는 공공 인물인 경우이다. 후자의 경우 가장 잘 알려진 예는 히틀러이다.


 양성 형태에서 자아도취의 대상은 자기 자신의 노력의 결과다. ... 자신의 노력과 자신의 업적에 대한 그의 배타적인 관심은 일 자체의 과정과 그가 다루는 소재에 대한 관심 때문에 끊임없이 적당한 균형을 유지하게 된다. 따라서 이처럼 양성인 자아도취의 역학은 적절한 자기제어를 하고 있다.


 악성 자아도취의 경우 자아도취의 대상은 그가 하는 일이나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갖고 있는 것, 예컨대 자신의 몸, 자신의 건강, 자신의 재산 등이다.


[집단적 자아도취]

 살아남으려고 하는 조직의 집단적 관점에서 본다면 집단 구성원들이 그 집단에 대한 자아도취적 에너지를 공급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 집단의 생존은 어느 정도는 그 구성원들이 집단의 중요성을 자신의 생명만큼 크거나 또는 더 크다고 생각하는 데, 더 나아가 다른 집단과 비교할 때 자기 집단이 올바르고 우월하다고 믿는 데 달려 있다.


 경제적/문화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그 집단에 속해 있다는 자아도취적 자부심이 단 하나의 그리고 때로는 매우 효과적인 만족의 원천이다.


 이러한 현상을 보여주는 최근의 좋은 예는 히틀러 시대의 독일에 존재했고 오늘날에도 미국 남부에서 볼 수 있는 인종적 자아도취다. 두 경우 모두 인종적 우월감의 핵심은 중산 하층계급이었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비록 가난하고 교양이 없을지라도 나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집단에 속해 있기 때문에 중요한 존재다. 나는 백인이란 말이다."

 "나는 아리안 민족이란 말이다."


 어떤 사람이 "나와 내 가족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이다. 우리들만이 깨끗하고 총명하고 착하고 점잖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더럽고 어리석고 정직하지 못하고 무책임하다."고 말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사람을 균형을 잃은 미숙한 사람이라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광신적인 연설가가 대중에게 '나' 또는 '내 가족'이라는 말 대신에 민족/종족/종교/정당 등을 내세워서 말하면 그는 조국애, 신에 대한 사랑 등으로 많은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 존경을 받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성과는 관계가 없고 여론과 관계가 있을 뿐이다.


 큰 집단(민족, 국가 또는 종교)이 물질적/지적/예술적 생산 분야에서 무언가 가치 있는 일의 성취를 자아도취적 자부심의 대상으로 삼는 한 이러한 분야의 작업 과정 자체는 자아도취적 충전을 감소시킨다.


 가톨릭 교회 안에서 자아도취에 반작용하고 있는 요소는 첫째, 사람의 보편성과 이미 어느 특수한 종족이나 민족의 종교가 아닌 '보편적'인 교회라고 하는 개념이다.

 둘째, 신의 관념을 앞세우고 우상을 부정함으로써 생기는 자기 겸손의 관념이다. ... 그러나 이와 동시에 가톡릭 교회는 강렬한 자아도취, 곧 교회를 믿는 것이 구원을 받는 유일한 기회이며 교황은 그리스도의 대리인이라는 자아도취를 고취시켜왔다.


 자기 자신의 위치에 대한 이러한 과대평가와 처지가 다른 모든 사람들에 대한 증오의 본질은 자아도취에 있다. '우리'는 훌륭하고 '그들'은 보잘것없다. '우리'는 선하고 '그들'은 악하다.


 과학적 사고방식은 객관성과 현실주의를 요구하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면서 자신의 욕망이나 공포에 따라 왜곡시키지 말라고 요구한다. 또한 과학적 방식은 현실의 사실에 대해 겸허하고 전지전능해지려는 모든 희망을 버리라고 요구한다.


 고등교육이 어느 정도 개인적 또는 집단적 자아도취를 약화시키고 완화시킨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몰라도 현대의 집단적 자아도취의 표현인 민족적, 인종적 또는 정치적 운동에 '교육받은' 사람들 대부분이 열렬히 가담하는 것을 막지는 못하고 있다.

 반대로 과학은 자아도취의 새로운 대상을 만들어낸 것 같다. 그것은 바로 기술이다. 전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사물 세계의 창조자라는 인간의 자아도취적 자부심 ...


 이 만족감은 자기 집단은 우수하고 다른 모든 집단은 열등하다는 공통된 이데올로기에 의해 마련된다. 종교적 집단에서 이러한 만족감은 나의 집단만이 참된 신을 믿는 유일한 집단이고 따라서 나의 신은 오직 하나의 참된 신이므로 다른 집단은 잘못된 길로 들어선 비신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가정에 의해 쉽게 마련된다.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은 일단 전쟁이 시작되면 각국 정부들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필요한 심리적 조건으로서 민족적 자아도취를 고양하려 한다는 점이다.


 상처입은 자아도취는 상처를 입힌 자가 궤멸되어 그 집단의 자아도취를 모욕할 수 없게 될 떼에만 치유될 수 있다.


 심하게 자아도취적인 집단은 자신과 동일시될 수 있는 지도자를 열망한다. ... 개인의 자아도취는 지도자에게 전이된다. 지도자가 위대하면 할수록 추종자도 그만큼 위대해지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볼 때 특히 자아도취적인 퍼스낼리티는 이러한 기능을 수행하기에 가장 적합하다. 자신의 위대함을 확신하고 아무런 의심도 갖지 않는 지도자의 자아도취가 그에게 복종하는 사람들의 자아도취를 매혹하는 것이다.


 자아도취적인 사람의 경우 상대방은 있는 그대로의 사람이거나 전적으로 실재하는 사람은 결코 아니다. 오직 상대방의 자아도취적으로 팽창한 자아의 그림자로서 존재할 뿐이다.


 모든 위대한 휴머니즘적 종교의 본질적 가르침은 자기 자신의 자아도취적 극복이 사람의 목표라는 한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심리학적으로는 충분한 깨달음에 이르는 이러한 과정이 세상과의 관계를 통해 자아도취를 버리는 것과 같다.


 [구약성서]에서는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말한다. ... "너는 이집트 땅에서는 이방인이었으므로 이방인의 영혼을 알고 있다."


 이방인을 사랑하고 적을 사랑하는 것은 자아도취가 극복되었을 때에만, "나는 그대다"라고 할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정의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신이라는 개념이 우상숭배와 자아도취의 부정이기는 했어도 신은 곧 다시금 우상이 되었다. 사람은 자아도취적 태도로 신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었고, 따라서 본래 신의 개념이 했던 기능과는 완전히 모순을 일으켜 종교가 집단적 자아도취를 나타내게 되었다.


 만일 한 민족이나 인종, 한 정치체제가 대상이 되는 대신에 인류가, 곧 모든 인간 가족이 대상이 된다면 훨씬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만일 모든 나라의 교육 제도가 한 개별적 민족의 성취 대신에 인류의 성취를 강조한다면 사람으로서의 긍지를 갖기 위해 자각을 일깨우는 감동적인 상황이 조성될 것이다.


 자아도취의 대상이 단일한 집단에서 모든 인류와 그 업적으로 바뀌면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사실상 민족적인 혹은 이데올로기적인 자아도취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조건을 바탕으로 자아도취를 극복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과학적 정위와 휴머니즘적 정위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 비판적 사고, 객관성, 현실 직시 ... 타당한 진리의 개념 ...


 같은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두 번째 요인은 휴머니즘적 철학과 인간학을 가르치는 것이다. ... 정통을 주장하는 하나의 체계를 수립하는 것은 자아도취적 퇴행의 또 한 가지 원천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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