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채환 Jan 27. 2024

[인간의 마음] 1/3

함께 책 읽기 ⑫ - 에리히 프롬, The Heart of Man

■ 읽게 된 계기

 [사랑의 기술], [자유로부터의 도피] 표지 안쪽 작가 소개란에 수록된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살펴보다가 읽어보고 싶은 것들이 있어서 2권(이 책과 [건전한 사회])을 사서 먼저 읽은 책이다. 한나 아렌트라는 작가의 경우는 [페미니즘의 도전]에서 처음 알게 되고 그 후로 두 번 정도 더 책과 칼럼에서 마주치게 되면서 한 번 읽어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인터넷 서점에서 무작정 검색을 해서 표지가 제일 예쁜 [한나 아렌트의 말]이라는 책을 사서 읽어 보았다. 알고 보니 사실 이 책은 나중에 읽어야 하는 것이었고 작가를 이해하려면 [전체주의의 기원], [공화국의 위기],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등을 먼저 읽었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슨 책부터 어떻게 읽어야 하나 막막하던 때도 있었는데 이런 방법도 썩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 감상 및 추천

▶ 화끈함, 통쾌함?

 '화끈한 액션영화'를 한편 재미나게 보았는데, 신문 칼럼에 그 영화는 잘 만들어진 작품이기는 하지만 '폭력에 대한 미화'도 담겨있다는 평론글이 올라와 있는 것을 보고 영화일 뿐인데 뭐 그리 골치 아프게 따질 것까지 있나 생각한 적이 종종 있었던 것 같다.   

 '악의 축'을 상대로 벌인 걸프전 때는, 전황과 더불어 전해지는 연합군의 막강한 군사력과 그것을 구성하는 각종 첨단 무기 등의 재원과 성능 소개, 화력 시범 등을 보며 멋지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던 것 같다.

 3편까지 나와서 대박 행진을 이어가고 있는 영화 [범죄도시]를 보면서는, 압도적인 완력을 갖춘 '선한' 주인공 형사가 '악한' 범죄자를 곤죽으로 만들거나 실신시키는 장면에서 통쾌함을 느꼈던 기억이 있다.


▶ 사람이 죽음을, 폭력을 사랑할 수 있다고?

 이 책의 3장에서 '죽음에 대한 사랑'이라는 표현를 처음 접하고 뜨악했다. 이럴 수가 있다고? 사람이 죽음을 사랑할 수가 있다고? 그렇다면 좀 완화해서 '폭력에 대한 찬미' 정도는 어떤가? 말도 안 되는 정도는 아닌 것 같지만 선뜻 동의하고 싶지도 않다. '악한 자에 대한 처절한 응징'은 어떤가? 나쁜 놈은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지나치지만 않으면 괜찮을 것도 같다. 그럼 '타격감이 좋다'라는 말은 어떤가? 술이나 담배의 목넘김을 묘사할 때도 있지만 어원은 상대나 짐승을 때리는 오락게임에서 온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럼 '때리는 느낌이 좋다'는 말이 아닌가? 때리는 느낌이 좋다고? 사람을 해치거나 죽일 목적으로 개발되어 쓰이는 것이 무기인데, 물론 그 용도 때문이 아니라 기술력과 첨단성에 매혹되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런 무기를 보고 멋있다는 생각이 들어도 되는 걸까? 헷갈린다.


▶ 이 정도는 괜찮은 거 아니야?

 [범죄도시]에서 마석도 형사는 '악한' 범죄자들을 상대로 '주저 없이', '자비 없이' 폭력을 행사한다. 상대가 '악한 존재'이기만 하면 그에 대한 폭력은 정당화되는가? 그것도 무제한으로 정당화되는가?

 '악의 축'에 해당되는 국민을 상대로 전쟁을 벌일 경우는 몇 십만 명을 죽여도 괜찮은 건가? 자국민을 살상하고 납치한, 혹은 먼저 도발한 국가에 대해서는 천배 만배의 피의 복수를 해도 되는 것인가?

 사회에서는 미디어를 통해 심심치 않게 '마녀로 의심되는 - 악인으로 명확히 확인되지 않은 - 존재'가 대중에게 던져진다. 범죄 혐의가 의심되는 사람, 불륜이 의심되는 사람, 뇌물 수수가 의심되는 사람, 향정신성 약물을 사용한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 등등 다양하다. 우선 신상털기부터 시작한다. 사생활 보호나 개인정보 보호법 따위는 알 바 아니다. 과거에 어떤 비행을 저질렀다더라, 은밀한 사생활을 까발리고, 카더라 통신을 통해 흘러나온 각종 근거가 불분명/불충분한 루머가 쏟아지고 셀 수도 없는 욕설과 저주의 댓글이 달린다. 해당 행위가 법에 어긋나는지, 저지른 행위에 비추어 가해지는 비난의 강도는 적정한지, 윤리적 근거는 충분한지 등에 구애받지 않고, 해당 인물이 사회적으로 매장되거나 생물학적으로 죽음에 이르게 될 때까지 쉬지 않고 물어뜯는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나쁜 놈이니까 이 정도는 괜찮은 걸까?

  '거의 확실한(?) 나쁜 놈'을 단죄하는 장은 안전한 익명 속에서, 사회적 체면의 탈을 벗어던지고, '정의구현'이라는 미명하에, 각자의 '잠재된 폭력에 대한 사랑'마음껏 드러내도 되는 해방구인가? 우리는 왜 마녀사냥을 야만적이라고 했던가? '어떠한 경우에도 폭력은 정당화되지 못한다'는 말은 이제 옛말인가?

 의심스러운 사람이 나쁜 놈인지 아닌지를 제일 정확하게 전문적으로 가려달라고 사법부가 있다. '사형제도 폐지'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사법부의 오판 가능성 때문이라고 한다. 제일 정확하게 전문적으로 판단하라고 있는 곳조차도 오류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돌이킬 수 없는 일방적 가해를 주저하는데, 대중매체를 통해 알게 되고 인터넷과 카더라 통신으로 확인한 검증 절차 정도로 내린 판단에 대해 한 치의 의심도 없이 확신을 갖는 것은 온당하고 합리적인가? 이런 못된 자기 확신이 작가가 말한 '자아도취'의 일종일 것이다.

  

▶재앙이 되는 경우

 "어떤 사람이 '나와 내 가족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이다. 우리들만이 깨끗하고 총명하고 착하고 점잖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더럽고 어리석고 정직하지 못하고 무책임하다.'고 말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사람을 균형을 잃은 미숙한 사람이라 생각할 것이다."라고 작가는 말했다. 착각은 자유다. 하지만 행동(폭력)이 결합되면 얘기는 달라진다. 아무도 검증해주지 않은 스스로의 확신만 가지고 폭력을 행사할 경우, 사법체계도 경계했던 바와 같이 그 피해와 억울함, 대중들에게 조장되는 혐오와 폭력에 대한 자극적 욕망은 돌이킬 수가 없다. 작가는 특히 '집단적 자아도취'와 '폭력'이 결합해서 발생한 인류의 불행한 과거들에 대해 자세히 다뤘다.

 나쁜 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 대한 폭력은 괜찮다고 생각하는 대중의 인식, 대중매체에 대한 권력의 강한 지배력, 폭력을 사랑하는 지배자가 공존하는 사회라면 쉽게 크고 작은 재앙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생리에 익숙한 권력자의 눈에 거슬리는 가시 같은 존재(사람/집단/국가)가 생기면, 간단히 대중들에게 '이 사람(들)은 악마다'라고 지정만 하면 될 테니까. 그러면 사람들은 주저 없이 각자가 가진 '정의의' 몽둥이를 집어들 테니까 말이다.


▶그럼 양 떼들 사이에서 시집만 읽으며 살아가면 되는 건가?

 "사람에게는 악을 위한 모든 가능성을 상상하고, 따라서 이러한 가능성에 따라 욕망하고 행동하며, 자신의 사악한 상상을 살찌게 할 수 있는 상상력이 주어져 있다. 때문에 악의 잠재력은 더욱 커진다."

 "상처 입은 자아도취는 상처를 입힌 자가 궤멸되어 그 집단의 자아도취를 모욕할 수 없게 될 떼에만 치유될 수 있다."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라", 즉 "악을 외면하고 악한 것을 골똘히 생각하지 말고 선을 행하라"고 쓰여 있는 까닭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대는 잘못을 저질렀는가? 그렇다면 올바른 일을 해서 균형을 이루도록 하라.

 "이방인을 사랑하고 적을 사랑하는 것은 자아도취가 극복되었을 때에만, "나는 그대다"라고 할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xx는 나쁜 놈이라고 심히 의심된다"는 추측성 소문/기사를 접할 때, 누가 우리 귀에 대고 귓속말로 이렇게 속삭이고 있는 건 아닌지 가만히 의심해 볼 일이다.

"얘는 악마야. 그러니까 얘한테는 네 속에 있는 폭력성을 마음 놓고 드러내도 괜찮아."



■ 함께 읽으면 좋은 책

▶ [피아노 치는 여자] - 엘프리데 옐리네크

 : [사랑의 기술]에서는 사랑의 공통된 기본 요소를 보호, 책임, 존경, 지식 등으로 보았다. 특히 이 책에서는 "만일 사랑의 세 번째 요소인 '존경'이 없다면, 책임은 쉽게 지배와 소유로 타락할 것이다. ... 존경은 이 말의 어원(respicere=바라보다)에 따르면 어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의 독특한 개성을 아는 능력이다. 존경은 다른 사람이 그 나름대로 성장하고 발달하기를 바라는 관심이다."라고 했다. 사랑의 기본 요소 중 존경을 철저히 무시하고 자기 본위의 보호와 책임만이 강조된 '근친상간적 유대'가 그려진 작품이다.


▶ [아직도 가야할 길] - M. 스캇 펙

 : 우리의 인생 목표는 '영적인 성장'이고 그것을 위해 스스로를 어떻게 훈육할 것인지, 그 길에 방해가 되는 것들은 어떤 것들이고, 그것들과의 타협을 우리가 어떤 식으로 속이고 포장하는지에 대해 다루어져 있다.

 [인간의 마음] 6. 자유, 결정론, 양자택일론에서도 결국 충분한 깨달음에 기반한 '영적인 성장'을 통해 자아도취에서 벗어나 정신적으로 성숙한 사람만이 선한 선택을 할 수 있다고 한 점에서 공통되는 부분이 있어 보인다.


▶ [프로이드의 의자] - 정도언

 : 정신과 의사가 정신의 질병과 건강 및 그 치료(사례)에 관해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공통점이 있다. 해당 분야의 이론 및 개념에 대해서 친절하게 소개해 주고 있고, 전문가임에도 신뢰를 심어주고자 하는 단정적인 말투보다 따뜻한 조력자로서 찬찬히 안내를 해주는 듯한 겸손한 말투가 편안하게 상담받는 느낌으로 책을 읽을 수 있게 해 준다.



■ 주요 문장 (요약 또는 마음에 드는 문장)

1. 인간은 늑대인가 양인가?

 사람은 늑대인 동시에 양일까? 아니면 늑대도 아니고 양도 아닐까?

 각 나라에서는 그들의 '적'을 전멸시키기 위해 가장 파괴적인 힘을 사용해야 할 것인지 숙고한다.


 [구약성서]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타락했다고 보지 않는다. 아담과 이브의 신에 대한 불복종은 죄로 불리지 않는다. ... 반대로 불복종은 사람의 자각, 곧 사람의 선택 능력을 위한 조건이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볼 때 이 같은 불복종이라는 최초의 행위는 자유를 향한 인간의 첫걸음이다.

 그들의 불복종은 신의 계획 속에 들어 있었던 것 같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사람의 모든 악은 환경의 결과에 지나지 않고, 따라서 사람은 사실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정신분석 학자로서 오랜 임상 경험을 가진 사람이 인간 마음속에 있는 파괴적 경향을 얕잡아 보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나는 이 시점에서 세 가지 현상을 골라내려 하거니와 이는 내가 보기에 인간 정위의 가장 사악하고 위험한 형태의 기반을 이루고 있다. 그것은 바로 '죽음에 대한 사랑', '악성 자아도취', '공생적-근친상간적 고착'이다. 이 세 가지 정위가 결합될 때에는 쇠퇴의 증후군, 다시 말해 사람들로 하여금 파괴를 위해 파괴하게 하고 증오를 위해 증오하게 하는 일종의 증후군을 형성한다.  

 *(역자 )정위 : 프롬은 경향군 또는 행동을 역동적인 관점에서 보는 태도라고 설명한다. 일반적으로는 자신과 환경 및 과거와의 관계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행동의 방향을 정하는 것을 말한다.


2. 폭력의 여러 가지 형태

 가장 정상적이며 병적이지 않은 폭력의 형태는 놀이에서 나타나는 폭력이다. 우리는 이러한 폭력을 파괴를 위한 것도 아니고 파괴성에 동기가 있는 것도 아닌, 단지 솜씨를 드러내기 위해 폭력을 쓰는 형태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실제로 훨씬 큰 중요성을 갖는 것은 반동적 폭력이다. 나는 반동적 폭력을 생명, 자유, 존엄성, 재산(자기의 것이든 남의 것이든)을 지키기 위해 쓰는 폭력으로 이해한다. ... 이러한 유형의 폭력은 죽음에 이바지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 이바지하며, 그 목적은 파괴에 있지 않고 보존에 있다.


 사람들은 위협받고 있다고 생각하면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죽이고 파괴를 한다.


 반동적인 폭력의 또 다른 측면은 욕구불만에 의해 발생하는 폭력이다. 소망이나 욕구가 좌절되었을 때 동물이나 어린아이, 어른들이 공격적인 행동을 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 폭력을 사용해 좌절된 목적을 달성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된다. 이는 분명 삶에 이바지하는 공격성이며 파괴를 위한 공격성은 아니다.


 질투와 선망도 욕구불만의 특수한 종류다.


 반동적 폭력과 관련이 있지만 이미 병리학 쪽으로 한 걸을 더 나가 있는 또 하나의 폭력 유형은 복수의 폭력이다. ... 이 폭력은 현실적으로 일어난 일을 마술처럼 원상복귀시키려는 비합리적인 기능을 갖는다.


 복수의 동인(動因)은 집단이나 개인이 갖는 힘 또는 생산성과 반비례한다. ... 생산적으로 사는 사람은 그럴 필요가 전혀 없거나 거의 없다. 그는 비록 상처를 받고 모욕을 받고 위해를 입더라도 생산적으로 사는 과정 자체 덕분에 지난날의 위해를 잊을 수 있다. 생산하는 능력이 복수욕보다 더 강한다는 점이 증명되는 것이다.


 정신병리학적으로 중태인 사람의 경우, 복수는 그의 삶에서 지배적인 목적이 된다. ... 마찬가지로 우리는 경제적 또는 문화적이고 감정적 측면에서 가장 후진적인 집단의 복수심(예컨대 지난날 조국의 패배에 대한 등)이 가장 강렬하다는 것을 있다.


 미개사회는 강렬할 뿐 아니라 심지어 제도화되기까지 한 복수심과 복수의 패턴을 가지고 있으며, 그 집단의 일원에게 가해진 위해에 대해 집단 전체가 복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느낀다.

 ... 첫째는 ... 복수를 상실에 대한 보상의 필수 수단으로 삼게 하는 정신적 기근 분위기다. 둘째는 자아도취로 ... 강렬한 자아 도취로 볼 때 이 집단의 자아상에 대한 어떠한 모욕도 너무나 중대한 것으로 여겨져서 아주 자연스럽게 강렬한 적대감을 일으킨다.


 흔히 복수심의 폭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 어린아이가 겪게 되는 믿음의 파탄이 원인이 된 파괴성의 원천이다. ... 어버이의 사랑과 믿음직스러움과 정의에 대한 본래 믿음이 파탄을 맞게 되는 경우가 많다.


 폭력과 관련된 중요한 반응이 여전히 한 가지 남아 있다. 심각한 기만을 당하고 실망한 사람은 삶을 증오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미 실망의 고통을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 그는 삶은 악이고, 사람들은 악하며, 자기 자신도 악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려고 한다. ... 삶에 대한 실망 때문에 삶을 증오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보상적 폭력을 '무력'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생산적 활동에 대한 대상(代償 : 물건으로 대신 물어줌, 네이버 사전))으로 보고 있다.


 허약하거나 불안하거나 무능하다는 등의 이유로 사람이 행동할 수 없을 때, 따라서 심한 무력감을 느낄 때 그는 고통을 겪는다.


 한 가지 방법은 힘을 가진 사람이나 집단에 복종하고 동화하는 것이다. 타인의 삶에 이와 같이 상징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사람은 사실은 행동하는 사람들에게 복종하고 그 일부분이 된 것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자기 스스로 행동한다는 환상을 갖는다. 다른 방법은 여기서 가장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으로 인간이 지닌 파괴하는 힘을 사용하는 것이다.


 삶을 파괴하는 것 역시 이러한 지위를 초월해 완전한 수동성이라는 참을 수 없는 고난을 피하는 것을 뜻한다. ... 무력한 사람은 ... 그는 다른 사람의 생명이든 자기 자신의 생명이든 무조건 이를 파괴함으로써 삶을 초월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그는 그에게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는 삶에 복수한다.

 보상적 폭력은 바로 무력함에 뿌리를 두고 있는, 무력함을 보상하려는 폭력이다. 창조할 수 없는 사람이 파괴하려고 하는 것이다.


 보상적 폭력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 것은 동물이든 인간이든 생물을 완전히 절대적으로 지배하려는 충동이다. 이러한 충동이 가학증의 본질이다. ... 즉 다른 사람을 완전히 지배하고, 그의 신이 되어 그를 마음대로 다루려는 충동으로 귀속된다.


 보상적 파괴성을 고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람의 창조적인 잠재력, 다시 말해 사람의 힘을 스스로 생산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발달시키는 것이다. 사람은 무능하지 않을 때에만 파괴자나 가학자가 되지 않을 수 있으며, 삶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상태일 때만 과거와 현재의 인간을 수치로 얼룩지게 할 충동들을 멀리 사라지게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꼭 설명할 필요가 있는 폭력의 또 한 가지 유형이 있다. 바로 원초적인 피에 대한 목마름이다.


 피를 흘리게 하는 것은 살아 있다는 느낌을 주고, 강하고 독특하고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우월하다는 느낌을 준다.

작가의 이전글 [인간의 마음] 2/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