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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름달 Mar 13. 2024

아이의 독립

부모가 내려놓지 않음으로 아이의 기회를 빼앗는다.

  "아이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다."


  이 말은 이미 많은 부모들이 알고 있다. 요즘은 여기에 한 마디를 덧붙이고 싶다.  


  "부모는 절대 그 아이가 될 수 없다."

  

  가끔 뉴스에 나는 가족동반자살을 보면 아직도 아이가 부모의 소유물이라는 사람들의 생각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음을 느낀다. 동반자살이 아니라 그건 살인이고 살해인데도 불구하고 동반자살이라는 단어가 쓰이는 이유는 자녀를 아직도 부모의 소유물로 여기는 풍토가 깊은 어딘가 남아있기 때문은 아닐까. 아이가 다니기 싫은 학원을 여러 개 다니고, 적성과 관련 없이 좋아하지도 않은 진로를 택하는 것도 아직은 부모가 아이를 휘두르고 싶어 하는 마음이 담겨있지 않나. 아이를 위해 부모가 방향을 정한다는 명목아래 부모는 아이를 놓아주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끌어가고자 한다.

아이가 어릴 때  일방적인 존중과 사랑만 베풀어주는 것도 좋지 않지만 소유물로 생각하고 부모의 뜻대로 끌어 가는 것도 문제가 있다. 어쨌든 요즘은 부모라는 이름으로 아이를 자기의 소유물로 여기는 것은 예전에 비해 겉으로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아이를 존중하는 시대적 분위기로 인해 부모라는 이름과 지위로 아이를 마음대로 하고자 하는 것을 점점 멈추는지 모르겠다.


  대신 요즘은 아이와 동일시하는 부모를 많다. 아이가 상처받으면 더 아파하고, 아이를 혼낼 때 자신이 혼나는 것처럼 움츠리거나 자기가 모욕당한 것처럼 화를 참지 못한다. 아이와 자신을 떨어뜨려서 생각하지 못하고, 독립적인 개체로 인정하지 못한다. 즉, 아이의 상황이나 감정을 그 아이의 개별적인 것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신에게 투사하거나 내사하는 경우가 많다. 아이의 감정을 자동적으로 흡수하고,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렇게 말하면 다들 거기까지는 아니라고 하지만 생활 속에서 살펴보면 아이를 아직 품속에서 내놓지 못하고 있다, 아이는 이제 세상을 향해 한 걸음 한걸음 내딛고 있는데도.

가장 흔한 경우는, 아이가 학교 가서 혼날까 봐 숙제를 하도록 종용하거나 대신해 주는 것이다. 아이의 이미지가 부모의 것인 것처럼 미리 야단맞을 기회를 차단한다. 또는 아이가 혼날까 봐 미리 변명해 주는 부모도 많다. 아이가 와서 직접 말하면 될 것을 아이의 상황과 사정을 미리 이야기함으로 양해를 구한다. 이 모든 것은 아이를 위한 행동 같아 보이지만 사실 아이가 책임질 기회를, 설명할 기회를 앗아간다. 더 심각한 것은 아이가 살면서 느껴야 하는 온갖 감정을 느끼기도 전에 방어막을 친다는 것이다. 특히, 부정적인 감정에 대해서는 부모가 더 발 벗고 나선다. 아이는 살면서 느끼는 많은 기회를 가장 안전한 곳에서 경험하고 느끼고 또 해결해 나가야 하는데 부모는 사랑 또는 안전이라는 이름을 앞세워 많은 부분을 차단하는 것이다.


  옛날에는 아이를 독립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그러나 요즘은 부모가 아이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의 삶과 자신을 분리시키지 못한 채 우리 아이가 아직 어려서 그렇다고 계속 안고 간다. 아이가 어떻게 클 수 있겠는가. 아이로부터 독립하지 못한 채 주변을 맴돌고 뭔가를 끊임없이 대신해 주는 부모가 있는데. 아이가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르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아니, 사실이 되어서는 안 된다. 아이는 아이 몫의 삶을 살고 부모는 부모대로 살아야 서로의 짐이 되지 않을 수 있다. 아이들과 함께 읽기 위해 먼저 읽은 <페인트>의 한 구절이 와닿는다. 이 부분을 보면서 이 책은 아이와 부모가 함께 읽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독립이란 성인이 된 자녀가 부모를 떠나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의 말처럼, 어쩌면 부모 역시 자녀로부터 독립할 필요가 있는 건지도 몰랐다. 자녀가 오롯이 자신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걸 부모에 대한 배신이 아닌 기쁨으로 여기는 것, 자녀로부터의 진정한 부모 독립 말이다.    -이희영 작가의 <페인트>에서 발췌


   부모가 아이로부터 독립해야 아이가 삶에서 갖는 기회를 놓치지 않게 할 수 있으며 누릴 수 있는 삶의 희로애락을 충분히 경험할 수 있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적당한 거리가 있어야 함을 느낀다. 누가 누구를 위해 희생하거나 헌신하는 것은 서로에게 짐이 될 수밖에 없다. 건강한 한 사람으로 홀로 서서 너무 멀지도 그렇다고 너무 가깝지도 않은, 딱 좋은 거리를 찾아내서 서로를 지지해 주고 바라봐주는 것이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평생 벗이 되는 길이 아닐까 생각한다. 서로에게서 독립한다고 사랑이 바래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를 더 많이 사랑하는 기회가 된다. 아이가 나이를 먹고 성장할수록 부모와 자식이라는 관계를 벗어나 사람과 사람으로 만나길 고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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