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싫어하는 사람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기
"나랑 공 같이 쓸래?"
나는 농구를 좋아한다. 좋아한 지 10년이 넘었다. 나는 시간이 생기면 집 근처 농구장에 가서 혼자 농구를 하고 실력도 여자애 중에서는 잘하는 편이다. 그래서 저번 학기 교양수업으로 농구를 신청했다. 내 농구사랑이 통했는지 수강신청을 망쳤지만 농구수업은 잡을 수 있었다. 이제 나는 농구 실력을 발휘하면 된다. 물론 성적은 P/F에서 P를 받을 거라 생각했다.
온갖 자신감과 기대감을 품고 농구 수업에 참가했다. 수업 시작하기 5분 전에 농구장은 수강생들로 바글바글 했다. 그중에서 눈에 띄는 한 남학생이 있었다. 그는 외국인 수강생이었다. 체격이 확실히 다르다고 느끼면서 그를 쳐다보는 사이에 수업은 시작됐고 교수님께서 출석 체크를 하셨다. 출석 체크를 하면서 교수님 눈에 외국인 학생이 보이자 그에게 한국어로 수업을 진행하는 것에 대해 괜찮은지 물으셨다. 그는 자신이 한국에서 자랐기 때문에 한국어로 설명해도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그때였다. 내 마음속에서 묘한 감정이 들기 시작했다. 그건 점차 상대를 싫어하는 감정으로 성장했다. 나는 그 외국인 학생을 무의식적으로 '나와는 안 맞는 사람' 즉 '내가 싫어하는 사람'으로 각인시켰다. 나는 왜 이런 감정이 들기 시작했는지 모른 체 농구 수업에 들어갔다.
수강자는 대부분 남학생이고 여자는 나를 합쳐 5명 정도였다. 그러므로 교수님은 팀 구성을 할 때 남자들을 먼저 구성하고 그 자리에 한 명 식 여학생을 끼는 식으로 팀을 나누셨다. 간단한 워밍업이 끝나자 바로 시합이 시작됐다. 나는 이때를 기다렸다는 식으로 시합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종종 골을 넣기도 하고 그러면 팀 원들이 같이 기뻐해 줬다. 나는 너무 행복하다고 느꼈다.
중간고사가 끝날 때쯤, 나는 아직도 그에 대한 마이너스한 감정이 도대체 무엇 때문에 비롯했는지 궁금해했다. 수업에서 그를 마주칠 때마다 같은 팀이 안되도록 피하거나 그가 수업에 불참했을 때 나는 몹시 기뻤다. 하지만 점차 그러한 나의 태도와 내면 사이에서 불편함을 느끼자 그의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없애버리고 싶었다.
나는 그를 관찰했다. 그리고 그를 싫어하게 된 날을 머릿속으로 상상하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고 나는 퍼즐의 마지막 조각을 끼어 맞춘 것처럼 쾌락과 동시에 그 이유를 알아챘다. 내가 그를 싫어한 이유는 바로 내 과거의 모습을 그로 인해 봤기 때문이다. 과거의 나를 타인으로 인해 발견했고 그때의 나를 상상했을 때 싫다고 느끼던 감정을 그에게 느낀 것이었다.
나는 그를 다시 봤다. 그는 아랍 쪽에 가까운 생김새이며 입체적인 얼굴이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외국에서 살았다. 그래서 어딜 가도 외국인이라는 말을 들었다. 외국에 있을 때 나는 외국인인 것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다. 이미 충분히 외국인이라는 인식이 있지만 그것을 더 들어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걸 드러낸다면 나는 그 나라에서 완전히 적응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춘기가 다가오는 시절에는 그러한 외국인인척을 아예 하지 않고 현지인처럼 행동했다. 하지만 그러한 나의 모습은 결코 편하지는 않았고 나 자신을 바라보며 싫증이 났다. 그러한 나의 과거 모습을 그 학생을 통해 보게 됐고 그때에 감정이 다시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나와 닮은 그가 싫었던 것이다.
기말고사가 다가온 날. 나는 이번이 마지막 수업이라는 것에 대해 아쉬워했다. 그리고 그동안 무작정 싫어하던 외국인 남학생한테 미안한 감정이 느꼈다. 그는 내가 그를 싫어한다는 것을 못 알아챘을 수도 있고 어쩌면 이건 나만의 갈등으로 인해 생긴 거라,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나는 이러한 심정을 해결하고자 그를 다시 보며 관찰하는 사이에 문제로 다가오던 나의 복잡한 감정이 깔끔하게 정리됐다.
그리고 나는 그한테 다가가 공을 내밀며 이렇게 말했다.
"나랑 공 같이 쓸래?"
사과와 용서에 마음으로 나는 그 앞에 스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아무 말하지 않고 고개를 끄떡이며 우리는 코트 안으로 발길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