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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해원 Oct 09. 2023

도토리 전사 1

이름 없는 관계_4

© 해원 / 한국식기박물관



<윗집 일기>


우리 집은 산 아래 마을 가장 끝에 자리하고 있다. 마을 초입에서 우리 집까지 산을 타듯 계속된 오르막을 거쳐야 우리 집에 도착한다. 이 길의 단점은 차가 없으면 밖으로 나가기 힘들고, 눈이 오면 아예 못 나가는 날도 있으며, 배달 음식은커녕 택배 아저씨 눈치까지 봐야 한다는 것이다.(택배차가 오면 일단 숨고 본다) 그러나 그 모든 단점을 감수할 수 있는 풍경을 보며 살 수 있다는 것과, 대부분의 마을 어르신들이 우리 집까지 올라오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시골에 몇 해 살다 보면 우리가 상상하는 촌 생활에 대한 환상이 사실은 엄청난 노력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된다. 아름다운 깔끔하고 아름다운 텃밭과 마당 생활은 끝없는 풀과의 전쟁을 무사히 치른 사람에게나 오는 특혜다. 나같이 게으른 사람은 한 번도 맛보지 못한. 올해도 나는 작년의 내가 했던 다짐(내년엔 텃밭에 아무것도 심지 않을 거야, 절대로)을 망각 한 채 열 평도 되지 않는 작은 텃밭에 이것저것을 심었다. (봄은 야속하게도 작물은 아름답게, 잡풀은 해치 울만 하게 보이게 한다) 그래도 올해는 초여름 까지는 싹 난 풀들을 호미로 긁어 주며 올해는 이 풀들을 어떻게든 잡으리, 잡아서 아랫집 할머니처럼 아름다운 텃밭 정원을 만드리라 꿈꾸었다. 그러나 그것은 한낱 꿈에 불과할 뿐. 언제나 그랬듯 장마에 비를 잔뜩 먹고 신나게 커버린 풀들을 보며 텃밭 정원의 꿈을 접었다.


만약 매 해 반복되는 내 밭에 이런 꼴을 마을 어르신들이 봤다면 꽤나 안타까워했을 것이다. “젊은 사람이 워찌 이런다냐”라며 한 마디씩 하시거나 본인 밭에 약을 치다 보게 된 우리 밭이 딱해 함께 약을 쳤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도 나는 이렇다 할 반박 한 번 못하고 고개를 숙일 것이다. 나보다 나이도 훨씬 많고 몸도 성치 않아 허리가 잔뜩 굽은 할머니 할아버지의 밭과 마당은 너무나 정갈하고 아름답기에. 


그래서 나는 우리 집이 긴긴 오르막을 지나 마을 끝에 있다는 것에 안심한다. 아랫집 할머니 할아버지를 제외한 마을 어르신들은 웬만한 일이 아니고서는 우리 집까지 올라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농촌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평생 정갈하고 아름다운 텃밭과 마당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무릎을 바쳤으므로, 그들의 무릎은 낮은 언덕도 오를 힘이 없다. 그 무릎을 생각하면 마음이 시큰 하지만 게으른 나의 모습이 그대로 노출된 나의 밭을 그대로 둘 수 있어서, 그런 내 모습을 그대로 인정할 수 있어 우리 집으로 향하는 이 오르막길이 고맙기도 한 것이다. 


그럼에도 일 년에 한두 번 아랫마을 할아버지가 올라오실 때가 있다. 요즘이 바로 그때, 도토리의 계절이다. 우리 집 뒷산에는 상수리나무가 아주 많다. 원래는 노씨 할아버지가 오토바이를 타고 올라와 커다란 포대자루 하나 가득 채워 가곤 했는데, 올해는 한 번도 올라온 적 없던 신씨 할아버지가 온다. 신씨 할아버지는 아이들 등하원 하는 길목에 항상 잔뜩 굽은 등으로 땅을 짚어 가며 일하던 할아버지다. 가끔 눈이 마주쳐 인사를 하는 날이면 이가 없이도 밝은 표정으로 인사해 주시곤 했다. 그런데 신씨 할아버지는 노씨 할아버지가 다녀가던 숲이 아닌 아랫집 할아버지네 마당에 떨어지는 도토리를 주워 갔다. 그리고 더 문제는 그 모습이 내가 일하고 있는 우리 집 2층 창문에서 너무나 잘 보인다는 것이었다.


아랫집 할머니 할아버지네 집 마당 끝에는 아주 크고 풍성한 상수리나무가 하나 있다. 아랫집에서 자라나는 모든 식물들이 그러하듯 이 도토리나무 역시 아주 풍성하게 자라 매년 동글동글한 도토리가 열리고 떨어진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이 도토리를 주워 쫄깃쫄깃하고 탱글탱글하여 엄청나게 맛있는 도토리묵을 쑤거나 너무 많을 땐 시장에 내다 팔기도 한다. 그 도토리를 신씨 할아버지가 죄다 주워 가고 있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며 속 좁은 나는 혼자 안절부절못한다. 도토리를 빼앗기고 있는 그 모습이 너무나 잘 보이는 내 자리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다짐이라도 하듯 비장한 표정이 되어 아이들에게 말했다. “어린이들, 오늘부터 도토리 소탕 작전을 시작한다.”


이 상황을 아랫집 할머니 할아버지에게도 전했다. 할아버지는 신씨 할아버지가 다른 곳까지 갈 힘이 없어서 그런 것이라며 부처님 같은 표정으로 허허 웃으시고, 할머니는 조용히 우리와 함께 도토리 소탕작전에 합류했다. 도토리를 주우며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는데 신씨 할아버지가 올봄에 아랫집 할머니네 집 길목에 엄청난 양의 거름용 소똥을 쏟아 부운 사건이었다. 할머니는 거름 위에 비닐을 씌워 두긴 했지만 여름에 파리가 너무 많이 꼬여서 고생이 많았다며 마음이 힘들었다고 말했다. 할머니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벌어진 일이었고, 할머니는 그 사이 일을 이렇게 만든 할아버지를 조금 원망하는 듯했지만 할아버지는 또 부처와 같은 표정으로 어쩔 수 없었다며 허허 웃으셨다. 오히려 그 얘기를 듣게 된 내가 이상한 전투 심리가 생겨 할머니와 함께 더욱 열심히 도토리를 주웠다. 


며칠 안 되어 아랫집 할아버지와 아이들과 내가 우연히 산책을 함께 하다가 아랫집 마당에서 도토리를 줍고 계시는 신씨 할아버지와 마주쳤다. 신씨 할아버지는 스스로도 좀 무안하셨는지 먼저 “도토리 줍고 있슈~ 근데 도토리가 별로 없어~!”라며 말을 걸어오셨다. 아랫집 할아버지는 일전에 그 부처와 같은 표정으로 허허 웃으시며 “아, 저희가 주워서 그래요.”라고 말했다. 신씨 할아버지는 “아아고, 도토리 줍고 있는 거였어? 근데 내가 다 주워서 어쯔켜?”라며 조금 당황하신 눈치다. 아랫집 할아버지는 다시 또 온화한 표정으로 “아니예요~ 괜찮아요. 저희는 조금만 주워도 괜찮아요.”라고 말하고 헤어졌다. 그리고 그날 이후 신씨 할아버지는 더 이상 아랫집 마당에 도토리를 주으러 오지 않았다. 나는 아랫집 할아버지가 애타는 우리 맘은 몰라주고 부처님 같은 말만 하셔서 조금 서운했는데 이후 벌어진 상황을 보며 생각했다. ‘이것이 진정한 부처의 가르침?!’


그렇게 도토리 소탕 작전이 마무리되나 싶었다. 그런데 요즘 이 도토리 장사가 쏠쏠한 것인지 마을에 도토리를 줍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늘었고, 드문드문 외지인들까지 보였다. 그러더니 그 여파가 우리 집, 아니 아랫집 할머니 할아버지네 집 마당에까지 닿은 것인지 어느 날 낯선 파란 트럭 한 대가 나타났다. 그 트럭은 우리 집과 아랫집 사이를 서성거리더니 길 한가운데, 정확히 아랫집 도토리나무 옆에 차를 멈춰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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