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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해원 Oct 09. 2023

도토리 전사 2

이름 없는 관계_5

© 해원 / 한국식기박물관



두 명의 여자가 차에서 내렸다. 중년의 여성들이었다.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목과 얼굴에 수건을 둘렀으며 앉고 서기가 편한 펑퍼짐한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토리를 줍기에 최적화되어 있는 그녀들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이들이 바로 도토리 꾼?!' 그녀들은 길에 있는 도토리를 줍기 시작해 아랫집 할머니 할아버지네 마당까지 들어섰다. 나는 또 이 광경이 너무나 잘 보이는 내 책상 창문 앞에서 마음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너무 스크루지 영감 같은 마음을 가진 걸까?' 싶다가도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우리의 도토리를 주워 가는 것이 어지간히 신경 쓰이는 것이었다. (신씨 할아버지도 겨우 물리쳤는데!)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그들이 있는 곳을 향해 갔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랫집에 가는 척하며 그녀들 옆을 지나갔다. 내가 문밖을 나가니 그녀들이 나를 쳐다봤다. 나는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차분하게 물었다. “어디서 오셨어요?” 뒤에 여자는 나를 본체만체하더니 다시 도토리를 줍고, 앞에 있던 여자는 머쓱하게 웃으며 아주 가늘고 미세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토리 주우러 왔어요.” 나는 더욱 뛰는 가슴을 부여잡고 다시 물었다. “이 동네 사세요?” 뒤에 여자는 여전히 도토리를 줍고 있고 앞에 여자가 더욱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 하하. 네, 도토리 주으려고요.” 나는 앞에 여자의 어색한 표정과 물음에 맞지 않는 대답이 이상하다고 느껴 다시 한번 물었다. “이 동네 사신다구요?” 앞에 여자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하지 못하자 뒤의 여자가 허리를 펴고 소리쳤다. “그냥 이사 왔다고 해!” 앞에 여자는 더욱 어색하게 웃으며 마치 아바타가 된 것처럼 말한다. “네... 하하. 이사 왔어요.” 나는 뒤의 여자의 불쾌한 태도와 여전히 앞뒤가 맞지 않는 앞의 여자의 말에 화가 나서 가슴이 더욱 뛰었다. 여기서 더 따져 물었다가는 나만 기분이 상할 것 같아 아랫집 할머니 할아버지네 집으로 갔다.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바로 말하기에는 좀 민망하여 아직 아랫집 학교에서 하교 하지 않은 ‘우리’를 불렀다. 문 앞에서 들리는 내 목소리에 ‘우리’가 쪼르르 뛰어나왔다. “엄마, 왜?” 나는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야, 모르는 사람들이 할머니네 도토리 다 주워가려 그래!” 이 소식에 ‘우리’ 역시 마음이 다급해져 빠르게 뛰어가며 크게 소리쳤다. “할머니!! 할아버지!!! 모르는 사람들이 도토리 다 주워간대!!!!” 방에 있던 할머니가 다급하게 뛰어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지만 문 밖으로 나온 할머니는 아주 차분해 보였고, 표정은 온화했다. 


할머니가 집 밖으로 나오는 소리에 두 명의 도토리 꾼은 당황하여 곧장 허리를 펴 할머니를 쳐다봤다. 할머니는 아무 말하지 않고 그저 온화한 표정으로 그녀들을 쳐다봤다. 나를 본체만체 한 뒤의 여자가 아주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나~~ 여기 집주인이세요? 여기 도토리가 많은데 안 주으시길래 제가 작년부터 줍고 있어요~~” (작년부터 라니!) 할머니가 온화한 표정 그대로 웃으며 말했다. “아, 그러셨구나. 저희도 줍는데... 괜찮아요~” 뒤에 여자는 무척 당황하는 척하며 더욱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나~~ 줍고 계시는 거였구나~! 지난번에도 쌓아 놓고 안 주으셨길래 안 줍나 보다 했어요~!” 할머니는 더욱 온화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 그것도 저희가 주우려고 쌓아 둔 건데 가져가셨나 보네요... 괜찮아요~” 뒤의 여자는 다시 한번 무척 당황하는 척하며 말했다.(그녀의 목소리와 제스처에서 진심이 아니라는 것이 너무나 드러난다) “어머나! 어머나! 모아 두신걸 모르고 제가 주워 갔네요~! 아이고 어떡해~~” 할머니는 더욱 부처님 같은 표정으로 괜찮다고 웃으며 그녀들을 잠시 더 바라보다 집으로 들어갔다. 할머니가 들어가자 뒤의 여자는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서 어쩌나~ 오늘 주운 것도 두고 가야 하나~?” 그래 놓고 오늘 주운 도토리 두 포대를 그대로 들고 사라졌다.


뛰는 가슴을 부여잡고 속으로 안달복달하던 나와는 달리, 온화한 표정으로 적들을 물리친(아님) 할머니의 모습은 마치 강인한 여전사의 모습 같기도, 모든 것을 통달한 부처님의 모습 같기도 했다. 그런 할머니의 모습을 보며 ‘유능제강’(부드러운 것이 강함을 이긴다) 이라는 말이 이럴 때 쓰이는 거구나 싶었다. 어쨌거나 그 이후 무사히 도토리를 지켜내고 있는 요즘이다. 올해는 열심히 지킨 도토리인 만큼 손이 많이 가고 어려워 미뤄 두었던 도토리묵 쑤는 법을 배워 봐야겠다. 쫄깃하고 쌉쌀한 도토리묵을 상추와 김, 그리고 참기름 잔뜩 들어간 양념과 함께 버무려 먹을 생각에 군침이 돈다. 



<아랫집 일기>


2018. 10. 23 

더 놀았으면 하는 아이들을 달래어 집에 바래다줍니다. ‘울림아, 내일 꼭 우리 집에 놀러 와’ ‘안 오면요’ ‘그럼 할아버지가 엉엉 울 거야’ 손을 잡은 채 장난스레 이야기하고 가는데, 아내 손을 잡고 뒤따라오던 이음이가 달려와 내 손을 쥐더니 ‘할아버지 여기서 같이 살아요’라고 말합니다 나는 갑자기 마음이 슬퍼집니다. 오늘은 마늘과 양파를 심을 밭에 거름을 내고 산길을 내려오면서, 이음이는 레몬 냄새가 난다고 했는데, 비목나무 잎을 손으로 비비어 냄새도 맡고, ‘땡꿀’이라 부르는 까마중 까맣게 익은 열매를 따먹었습니다. 나는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렸지만 울림이와 이음이는 늘 나를 어린 시절로 데려갑니다. 

맞선을 보고 채 두 달도 되지 않아 혼인을 한 나와 아내는, 내 어릴 적 고향으로 신혼여행을 갔습니다 내가 살던 집과 다니던 초등학교, 어머니와 개발(?조개)을 캐러 갔던 바닷가를 아내에게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어린시절 생각이 나, 비탈길을 올라 학교 울타리에 난 개구멍으로 들어가 보려고 했는데 아내도 괜찮다며 부드럽게 말리고 이제 그러기에는 너무 커 버려 그만두었던 기억이 납니다.


2018. 10. 24

‘쌔게(‘빨리’의 경상도 말) 와 봐요.’ 아내가 불러서 마당을 쓸다가 성큼성큼 뛰어가니 혼잣말로 ‘왜 이래 나를 깜짝깜짝 놀래키노.(놀라게 하냐)’ 하며 바라보는 밭둑에는 용담 꽃이 피어있습니다. 아내가 늘 보고 싶어 하는 꽃입니다. 갈퀴에 할퀴어지고 낫에 아무렇게나 베어진 풀더미 속에 보랏빛 고운 등을 밝혔습니다. ‘당신이 부르니까 왔지 용담도 으아리도 저기 노오란 산국도.’ 지리산이 불러 나도 ‘매화 꽃내 그윽한 골짜기’에 흘러들어가서 살았고, 누구인가 애타게 손짓하여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 울림이와 이음이도 여기까지 왔겠지요.


2018. 11. 16

울림이와 이음이가 어서 집으로 돌아가길 기다리며, ‘우리’를 업은 아기 엄마가 무엇인가 유심히 바라보고 있습니다 무엇일까 궁금했는데 아침에 책상을 정리하다가, 아내가 ‘가을걷이와 겨울 준비’라고 적어 놓은 종이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내의 꿈은 지금도 큰 농사를 한번 지어 보는 것입니다. 
아내가 쓰는 말은 일하는 사람의 말이고, 내가 쓰는 말은 책에서 배운 말입니다. 내가 쓴 글은 조금만 깊이 들어가 보면 가짜임이 드러나지만, 아내가 하는 말은 울림이와 이음이 말처럼 받아 적으면 그대로 살아있는 시가 됩니다. 그나마 내 글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것은 아내가 한 말을 그대로 받아 적은 것입니다. 밭둑에 피어난 보랏빛 애기용담을 보고, ‘왜 이래 나를 깜짝깜짝 놀래키노.’ 툭 던지는 아내 말을 나는 받아 적습니다. 아내는 글 쓰는 것을 힘들어 합니다. 그냥 말하는 대로 쓰라 하면 그 말이 다시 벽이 되어 아내 생각을 가로막습니다. 아내는 또 경상도 사람이라 된시옷 발음이 흐릿하고, ‘어’와 ‘으’를 헷갈려 합니다. 엄마를 보고 말을 배운 우인이가, 초등학교 다닐 적 받아쓰기 시험에서, 무슨 낱말인가 ‘어’를 써야 하는데 ‘으’로 적어 틀린 적이 있다고 합니다 ‘마늘밭 짚으로 덮으주기’처럼요. 말과 글을 사이에 두고 아내와 나는 함께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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