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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해원 Sep 18. 2023

중절모 신사

이름 없는 관계_6

© 바람



<윗집 일기>


아랫집 할아버지와 아이들을 보며 종종 나의 할아버지를 떠올린다. 우리 할아버지도 아랫집 할아버지 같은 사람이었으면 어땠을까?


어릴 적 나는 까만 피부, 깡마른 몸에 주머니가 많은 조끼와 초록색 새마을 모자, 그리고 장화를 신고 다니는 농촌 할아버지들을 보며 '저 할아버지가 우리 할아버지였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다. 하나뿐이었던 나의 할아버지는 언제나 정장에 롱 코트, 거기에 맞는 서양식 구두와 중절모를 쓰고 다녔다. 그리곤 매일같이 어디론가 홀연히 떠났다. 할아버지 행방에 신경 쓰지 않던 어린 내가 어른들의 말을 엿들을 수 있을 정도로 컸을 때 알게 됐다. 할아버지는 매일 새로운 사업구상과 투자 그리고 실패를 반복하러 서울로 향하고 있었다는 것을.


할아버지는 대체로 집에 잘 안 계셨고 무뚝뚝했다. 그래서 같이 이야기 한 기억이 별로 없는데. 명확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순간이 있다. 어느 날 할아버지가 아주 다정한 모습으로 나를 불렀다. 그는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작은 액세서리 뭉치를 꺼냈다. “어떠냐?”라고 물으며 이런저런 알 수 없는 설명을 하셨다. 그 액세서리들은 어린 내가 봐도 형편없었는데 할아버지가 실망할까 봐 좋아하는 척 연기를 했다. 할아버지는 그런 나의 모습을 보며 뿌듯해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할아버지에게 그 액세서리에 대해, 어디서 가져온 물건이며 어디에 쓰는 것이고 할아버지가 이걸 가지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묻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액세서리들이 할아버지의 새로운 사업 아이템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른들은 생각보다 아이들 앞에서 많은 얘기를 한다) 나는 충격을 받았다. 마치 회사원처럼 매일을 근면 성실하게 나갈 뿐 아니라 자식들과 싸워가며 자식들의 돈으로 매번 실패를 맛보면서도 꿋꿋이 도전하는 사업 아이템이 저런 것이었다니.


할아버지는 자식들에게 받지 못하는 인정을 어린 손녀에게라도 받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기대와는 달리 나는 그때 이후 할아버지의 알 수 없던 행동들을 의심하게 되었다. 왜 우리 할아버지는 장화가 아닌 구두를 신고 다니는지, 주머니 많은 조끼가 아닌 정장을 입고 다니는지, 새마을 모자가 아닌 멋들어진 중절모를 쓰고 다니는지, 그리고 자식 앞에선 초라한 할아버지가 왜 할머니와 우리 엄마에게만 화를 낼 수 있는지. 물음에 답을 하나씩 찾을 때마다 나는 다른 할아버지들을 보며 저 할아버지가 우리 할아버지였으면 좋겠다고 상상했다.


할아버지는 부잣집 외동아들로 아주 귀하게 자랐다고 한다. 귀한 아들 징병이나 징용으로 끌려가지 않게 하기 위해 일본으로 유학도 보냈다. 가계가 기울어 가는 사정 속에서도 할아버지의 아버지는 고철을 주워 가며 아들 뒷바라지를 했다. 더 이상 유학할 자금이 부족해지자 일찍 결혼을 시켰다. 얼떨결에 일찍 독립한 할아버지는 사는 동안 부모와의 관계를 이어주던 매개가 오직 물질적 지원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할아버지도 자기 부모와 같은 방식으로 자식들을 지키고 싶었던 건 아닐까. 어쩌면 할아버지가 아는 방법은 그거 하나밖에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할아버지가 한창 서울을 다닐 때 아버지가 잠시 서울에서 일을 했던 적이 있는데, 아주 가끔 아버지가 할아버지를 모시고 올 때가 있었다.(그때 할아버지가 살던 집과 우리 집이 가까웠다) 한 번은 아버지가 차 문 닫히는 소리만 듣고 출발해서 집에 와서야 할아버지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적이 있다.(핸드폰도 없던 시절이다) 그때는 그저 웃긴 해프닝으로만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굉장히 슬픈 일이다. 그동안 같이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2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는 거니까. 할아버지는 멀어져 가는 아들의 차를 보며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할아버지는 왜 그렇게 사업에 집착했던 걸까? 성공해서 더 이상 자식들에게 빚지지 않고 떳떳한 아버지가 되고 싶었을까. 할아버지가 실패한 수많은 사업 중 단 하나라도 성공했더라면,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도 우리 엄마에게도 조금 더 다정한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내가 초등학교에 갓 입학했을 때 할아버지 할머니, 막네 고모 가족과 우리 가족이 잠시 함께 살았던 적이 있다. 그때 나와 동생은 종종 할아버지에게 아침 인사를 하러 갔다. 그러면 할아버지는 우리에게 하얀색 다이아몬드 모양의 박하사탕을 주셨다. 나는 약간 녹아 살짝 말랑해져 있는 박하사탕을 좋아했다. 가끔 잠이 잘 오지 않는 밤이면 주무시는 할머니 할아버지 옆에서 밤새 켜있던 TV를 혼자 보다가 잠들기도 했다. 할아버지가 있는 방에는 항상 파스 향인지 박하사탕 향인지 모를 알싸한 냄새가 났다. 지금 떠올려 보니 왠지 그 냄새가 할아버지가 살아온 인생 같기도 하다.



<아랫집 일기>


2018.10.16

뒤뜰에서 꽃밭을 만들고 있는데 울림이가 책을 들고 뛰어왔습니다. 사람을 쉽게 사귀지 못하고 책을 동무 삼아 살아온 터라 책을 들고 있은 사람을 보면 저도 모르게 마음이 갑니다. 교사로 살아가는 내내 학교에서 내게 맡긴 일도 도서관 일이었습니다. 오늘은 울림이가 들고 온 책 두 권 가운데 ‘사마귀’라는 자연 이야기책을 빌렸습니다. 사마귀는 일곱 차례 허물을 벗어야 어른이 되고, 첫 허물을 벗은 어린 사마귀들은 서로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뿔뿔이 흩어진다는 사실도 알게 되고, 날개로 자라날 곳을 가리키는 ‘날개싹’이란 말도 처음 들었습니다. 아이들과 사귀려면 아이들이 쓰는 말을 알아야 하겠지요. ‘무슨 사우루스’라고 부르는 공룡 이름도 익히고 만화영화에 나오는 로봇자동차도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어린이집에 가야 한다고 울림이가 불려 간 뒤 아침을 먹고 있는데 부엌문이 살짝 열리고 이음이가 혼자 나타났습니다. 웬일일까 이음이는 오늘 어린이집에 가지 않나 했는데 형이 왔다 갔으니까 저도 할아버지 집에 들렀다 가야 한다며 아주 잠깐 문 밖에 머물렀다 돌아갔습니다.


2018.10.17

‘할아버지, 어린이집 갔다 와서 놀아요’ 크게 소리치고 아이들이 차를 타고 떠난 뒤 집 안에 들어서자 ‘당신, 친구가 없어 쓸쓸하겠네’ 라며 아내가 놀립니다. 요즘은 아이들 말을 배워, 갑자기 아이들이 나타날 때 ‘앗, 순간 이동’이라고 하면 아이들은 너무 좋아합니다. 가끔은 아이들을 놀리려고 ‘너희들 누구니’라며 짐짓 처음 본 듯 물으면 이내 ‘할아버지는 누구세요’라고 되받아칩니다. 그러다가 우리끼리 ‘사라져랏’이란 놀이를 만들어 놉니다. ‘사라져랏’이라고 말하면 그동안 기억이 다 사라지는 것이지요. 어제 저녁에도 산길을 한 바퀴 돌다가 울림이에게 ‘너 어디서 왔니?’ 라며 ‘사라져랏’ 놀이를 했습니다. ‘부영아파트’ 잇달아 ‘사라져랏’이라고 말하자 울림이는 ‘완주’ ‘엄마 뱃속’ ‘아기씨’라고 이어서 말합니다. 다시 ‘사라져랏’이라고 말하자 울림이는 잠깐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하늘나라’라고 말하고는 곧 ‘할아버지,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와서 하늘나라로 가는 거잖아요’ 라며 자신 있는 듯 크게 말합니다 ‘아, 그렇구나!’ 우리 아이들을 키울 적에 큰아이 우인이에게 ‘우인아, 우린 이 세상에 잠깐 소풍 온 거’라고 했더니 ‘아빠, 소풍이 왜 이렇게 지루해’ 하던 우인이 말이 떠올라 혼자 배시시 웃습니다.

환청이었을까요. 아이들은 어린이집에 간다고 갔는데 ‘할아버지’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 밭 가장자리까지 달려갔어요. 아무도 없고 돌아와 혼자 땅콩을 캐며 이 행복한 순간도 스쳐가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루종일 아이들이 없는 윗집은 텅 빈 듯, 키 큰 야윈 거인처럼 쓸쓸히 서 있어요. 오래전에 보았던 영화가 떠올라요 제목도 줄거리도 잊었지만 어슴푸레 마지막 장면이 가슴에 남아 있어요. 어느 날 손자와 동무처럼 지내던 할아버지가 하늘나라로 돌아가셔요. 엄숙한 장례식이 끝나고 아이 어머니는 조용히 아이를 불러 할아버지가 남긴 선물이 있다고 이야기해요. 아이는 할아버지가 쓰던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가 상자를 찾아 조심스레 끈을 풀고 열어봐요. 상자 속은 텅 비어 있고 종이쪽지엔 ‘너 이 놈, 또 나에게 속았지요!’이라고 적혀 있었어요.


2018.10.19

아이들과 만든 뒤뜰 꽃밭입니다.
 ‘할아버지 뭘 심을 거예요’
 ‘음, 물망초랑 꽃양귀비, 초롱꽃 그리고 수선화도 옮겨심으려고’
 ‘지금 같이 심어요’
 ‘할머니가 씨를 부어 놓았으니까 나중에 싹이 나면 우리 같이 심자’
꽃길도 내고 벽돌도 나르고 아이들과 일하다 보면 어느새 일은 놀이가 됩니다. 울림이는 윗주머니에 있던 유리구슬을 흙에 파묻습니다.
 ‘야, 구슬이 열리겠구나’
 ‘할아버지, 구슬나무는 어떻게 생겼을까요?’
 ‘네가 한 번 그려보렴’
 ‘아이구, 이음이는 호미나무를 심었구나’
이음이는 호미를 거꾸로 묻고 흙을 다지고 있습니다. 꽃밭놀이도 싫증이 나면 우리는 언덕에 누워 있는 우산바랭이 풀줄기로 우산도 만들고 풀싸움도 하고 그러다 보면 날이 어둑어둑해집니다. 울림이가 다짐하듯 묻습니다.
 ‘할아버지, 우리 나중에 꼭 같이 심어요’
 ‘그럼’
 ‘우리가 어린이집 가면은요’
 ‘할아버지가 기다릴게’
고개를 숙이고 흙장난을 하던 이음이가 장난스레 또 묻습니다.
 ‘우리가 자면은요’
 ‘그래도 기다려야지’
기다리다 보면 보드라운 아이들 ‘흙가슴’에도 눈부시게 빛나는 봄이 피어나리라는 것을 나는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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