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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해원 Sep 27. 2023

가족이 뭐 길래 1

이름 없는 관계_7

© 해원


<윗집 일기>


오랜만에 부모님이 다녀가셨다. 엄마는 오자마자 또 그 이모 얘기를 쏟아 낸다. 지난번에 들은 얘기랑 비슷한 얘기를 몇 시간째 쏟아낸다. 듣다못해 “엄마, 이제 그 이모 얘기 좀 그만해”라고 말하면 그때야 엄마는 “그래그래, 내가 또 너무 계 얘기만 했지?”라며 잠시 소강상태로 돌입하나 싶다가 곧장 다음 패턴의 주제로 넘어간다. 나의 건강과 미래를 위한 투자(밥 좀 잘 챙겨 먹고 연금 꼭 가입해라), 그리고 엄마의 미래(연금과 주택 보증으로 생활할 것이며 병에 걸리면 요양원에 가겠다)에 대한 변함없는 레퍼토리. 그 얘기를 주고받다 보면 엄마도 나도 징 하다는 생각이 든다. 언제나 같은 얘기를 무한 반복하는 엄마도 징 하고 거기에 입바른 소리만 해대는 나도 징 하다.


이번엔 엄마의 한결같은 레퍼토리에 한 가지가 더 추가되었다. “너도 요양보호사 자격증 하나 따놔. 그럼 나중에 엄마 아플 때 돈 받으면서 엄마 케어 할 수 있잖아.” 언제나처럼 흘겨 들으면서도 입바른 소리만 하던 나는 이번에도 눈치 없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럴 땐 전문가 불러야지 무슨 소리야~” 순간 정적. 나도 아차 싶어 대충 얼버무린다. “앗, 방금 나 말 좀 서운하게 했네. 그치? 아직 엄마 60도 안 됐잖아~ 엄마가 너무 젊어서 그런 얘기가 하나도 와닿지가 않아서 그래. 나중에 그때 가서 필요하면 딸게.” 엄마는 그제야 웃는다. 아마 앞에 얘기는 들리지 않고 맨 뒤에 스치듯 말한 ‘(자격증)딸게’만 귀에 들어온 듯하다. “그래~ 잘 생각했어. 엄마 좀 서운 할 뻔했다? 순간 자식 낳아봐야 소용없네, 했다니까?” 다행히 웃으며 위기를 넘겼지만 나는 뒤돌아 생각했다. 내가 와닿지 않았던 정말로 엄마가 했던 말이었을까, 혹시 엄마가 살아온 삶은 아니었을까.


나는 꽤 오래 엄마를 이해하지 못하며 살았다. 생리를 했을 때쯤부터, 그러니까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고등학교에 갈 때까지 특히 그랬다. 엄마랑 나는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웠다. 엄마는 매일 술을 마셨고, 나는 매일 방문을 잠갔다. 무엇에도 거침없고 솔직했던 엄마는 어떤 일에도 강하게 대처했지만 그럴수록 엄마의 마음속엔 계속해서 생채기가 나는 것 같았다. 안타깝게도 아버지는 좋은 사람이었고, 아버지의 그런 점이 엄마를 더 외롭게 했다. 


그때 나는 엄마에 대해 이미 다 안다고 생각했다. 다 알고 있기 때문에 궁금해하지 않았고,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엄마를 쉽게 판단했다. 왜 엄마는 술을 먹으면 화를 내는지, 왜 주변 사람들과 자꾸 싸우는지, 왜 그렇게 외삼촌을 싫어하는지, 왜 착한 아버지를 자꾸 괴롭히는지. 그런 엄마가 부끄럽고 미웠다. 모든 게 엄마의 잘못으로만 보였다. 


그러나 내가 엄마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는 걸 알게 된 건 고3 추석 때였다. 나는 그때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언제나처럼 우리 가족은 명절 3일 전부터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신 막내 고모네로 갔다. 아버지의 다른 형제들은 추석 당일 날이 되어서야 하나 둘 모였다. 큰 아버지네 부인은 손수 만든 약식을 가져왔고, 둘째 큰 아버지네 부인은 돈 봉투를 들고 왔다. 그런데 우리 엄마만 그들이 오기 3일 전부터 음식을 하고 뒷정리를 했다. 항상 그랬는데, 그날도 변함없이 똑같았는데 이상하게 그날은 모든 게 이상하다고 느껴졌다. 구석에서 끊임없이 음식을 만들고 설거지를 하는 엄마의 뒷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런 엄마 옆으로 가서 같이 설거지를 하고 산책을 가자고 했다. 엄마는 놀라하면서도 기뻐했다. 


그날 돌아가는 차 안에서 처음으로 엄마와 아버지가 싸우지 않았다. 그때부터 나는 내가 모르는 엄마를 이해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랫집 일기>


2019.4.1

층층나무를 옮겨 심고 있는데, ‘할아버지, 할아버지’ 아이들이 달려와 소리칩니다. 우리를 업고 엄마도 뒤따라 왔습니다. ‘호미’가 쥐를 던지며 놀고 있다고, 처음 보는 광경인 듯 무척 놀라워하는 표정입니다. 늘 겪는 일이지만 덩달아 나도 아이들처럼 가슴이 뜁니다. 저만치 앞에 두고 달아나면 쫓아가 입으로 물어다 던졌다가 놓고 가끔은 앞발로 움켜쥐면서, 고양이가 쥐를 갖고 놀고 있습니다. 그런 생쥐를 울림이는 손으로 만지고도 싶고 키우고도 싶다고 합니다. 가끔, 이런 아이들이 어떻게 우리에게 왔을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지난주 토요일엔 아이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를 뵈었습니다. 겉으로는 서로 결이 달라 보이는 듯하지만 마음속에 곱고 맑은 하늘을 지니고 사시는 분들이십니다. 아, 저 뿌리에서 엄마 가지가 돋아나고 그 끝에 봄날 연둣빛 눈부신 새순으로 울림이와 이음이와 우리가 이 세상에 온 것입니다.


2019.8.31

정작 서울에는 왜 갔는지 생각나지 않는다는 울림이를 네 차례나 다그쳐 답을 알아냈습니다. 어제도 울림이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 서울 가서 자고 왔는데 친할아버지와 친할머니, 외할아버지 친할머니가 옆방에서 잤고, 외할버지가 숙소 가는 길을 일곱 번이나 잃어버렸다고 했습니다. 오늘 아침엔 그림을 그려가며 외할아버지가 어떻게 길을 잃었는지와 남산에서 케이블카를 탄 이야기를 하고, 서울에서만 살 수 있다는 것을 스티커를 자랑했습니다. 그제는 아빠 졸업식(학위수여식)이 있어 서울에 갔는데, 울림이는 그 일보다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옆방에서 자고, 외할아버지가 길을 헤맨 것이 마음에 깊이 남았나 봅니다. 하루 못 봤는데 우리가 쑥 자란 것 같습니다. 걸음걸이마저 여유가 느껴집니다.


2019. 9. 28

오미자를 담근 유리병들을 엄마 혼자 들기에는 힘들어 보여, 함께 나누어 들고 울림이네에 잠깐 들렀습니다. 할아버지가 왔다고 인사를 하라고 하자, 오르르 아이들이 몰려나옵니다. 아이들은 잘 됐다며 집에서 놀다 가라고 나를 붙듭니다. 울림이는 아빠한테 내가 못 가게 문을 닫으라고 하고, 이음이는 내 손을 붙잡고 안방으로 데리고 갑니다. 아직 할아버지가 아침을 먹지 않았으니, 밥을 먹고 놀자고 하니 울림이와 이음이는 멈칫하는데, 우리가 따라 나와 나에게 장화 한 짝을 건넵니다. 신을 신고 밖에 나가자는 뜻입니다. 우리를 번쩍 들어 품에 앉고 나무 계단을 내려서니, 마당 귀퉁이에 민들레 한 송이가 피어 있습니다. 우리가 신은 장화 빛깔을 닮은 연 노란 민들레는, 아이들이 보고 싶어 날마다 뜰에서 서성이는 외할머니 마음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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