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석병산에서 내려섰을 때 혹독하게 추웠던 삽당령은 포근했다. 열흘 전 강릉에 100c미터의 폭설이 내렸지만, 해발 680미터의 삽당령 도로는 눈이 치워져 있었다. 그러나 산에는 여전히 눈이 쌓여 있었다.
오늘은 삽당령에서 대관령까지 27킬로미터의 산행을 계획하고 있다. 지난주에는 백두대간 구간 중 빼재에서 덕산재까지 14킬로미터를 6시간 동안 걸었다. 오늘 산행은 눈이 더 많이 쌓여 있어 더욱 힘들 것으로 예상된다. 윤진한 대장은 "누가 대신 걸어줄 것도 아니니까, 가보자!"라며 힘을 북돋아 주었다.
우리 산 벗들은 눈 덮인 산을 여러 번 경험해 왔다. 산의 기후는 급변하기 쉬워 준비 없이 산에 오르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그래서 우리는 철저하게 준비했다. 각자의 장비를 점검하고, 서로의 상태를 확인하며 출발 준비를 마쳤다.
산행 중, 허벅지까지 빠지는 깊은 눈 속을 헤치며 걸었다. 눈이 스패츠 속으로 밀려 들어와 양발이 축축해졌다. 임식형 대장은 임도로 걸어오면서 평탄한 길을 걸었다며 웃었다. 그 말을 들으며 ‘생각이 짧으면 몸이 고생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나무 숲을 지나 해발 810미터의 들미재에 도착했다. 들미재는 들미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홍송들은 눈의 무게를 견디며 꿋꿋하게 서 있었다. 스틱은 눈 속에서 끼익 소리를 내며 울렸고, 발걸음은 점점 무거워졌다.
이장신 선생이 내 뒤에서 함께 걷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요즘 무슨 책을 읽고 있나요?” 이 선생은 “지난 5개월 동안 조정래 선생의 『아리랑』을 읽었고, 요즘은 『오, 하느님!』을 읽고 있어요”라고 답했다. 그는 나와 함께 산행할 때 내가 추천한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요즘 새로 맡은 업무로 인해 몸이 고단해서 책을 읽지 못하고 있다.
최근 내가 읽는 책은 오항녕의 『조선의 힘』이다. 책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넘나들며 조선 역사를 다루고 있다. 역사는 되풀이되며, 기록은 후대에 교훈을 남긴다. 『작은 책』의 안건모 발행인은 자기 삶을 글로 쓰자고 주장했다. 그렇게 쓴 글은 곧 자기 역사이다. 나도 글을 써서 책장에 꽂아두고 내가 쓴 글을 가끔 들춰본다. 그때마다 나는 삶을 허투루 보내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표지석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며 생각했다. 옛사람들은 혼이 빠져나간다며 사진 찍기를 꺼렸고, 또 어떤 이들은 사진이 잘 나오지 않는다고 사진 찍을 때면 자리를 피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보니, 사진 외에 남는 것이 많지 않다. 결국 남는 것은 글과 사진뿐이었다.
가끔 사람들이 나에게 묻는다. “이번 주에는 어느 산에 다녀오셨어요?” 나는 한 달에 한 번씩 백두대간을 산행하다 보니, 산에 자주 다니는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아마도 글을 통해서일 것이다. 나는 2008년 12월부터 백두대간을 타기 시작하면서 인터넷 신문 그래스루티(grassrooti.net)와 안산시청 내부 통신망인 새올 문예 마당에 산행기를 연재해 왔다.
백두대간을 타며 쓴 글과 사진을 모아두고, 지난 1년 동안의 산행 기록을 CD로 간직하고 있다. 그런데 시간을 되돌아보니 사진 속 내 표정은 늘 굳어 있었다. 시간이 10년, 20년, 30년 흐른 후, 내 후손들이 내가 남긴 글과 사진을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해진다.
지난달 하산하며 부봉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에서는 웃고 있었다. 보기에 좋았다. 오늘부터라도 사진을 찍을 때는 웃는 얼굴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내가 좋아서 산에 오르는데, 웃지 못할 이유가 없다. 물론 웃을 일이 많지 않아서 늘 웃는 얼굴을 할 수는 없겠지만, 사진을 찍을 때만이라도 웃어보자. 산 벗들도 내 마음을 읽은 듯 밝게 웃었다.
오전 8시 35분, 삽당령을 출발해 4.9킬로미터를 걸어 해발 979미터의 연규봉에 올랐다. 멀리서 벌거벗은 곳이 보여 고랭지 채소밭인가 했더니 골프장이라고 했다. 강원도에는 10여 곳의 골프장을 만들고 있는데, 사업자의 부도로 사업이 중단된 곳이 많다고 한다. 자연이 사람들의 손에 난도질당하고 있었다.
계속되는 오름 끝에 해발 982미터의 석두봉에 도착했다. 김철은 후미 대장이 “석두봉은 마치 머리에 돌을 이고 있는 멍청한 산 같지 않나요?”라고 농담했다. 봉우리 언저리에는 돌무더기가 있었다. 대관령까지 가는 것은 무리라 판단한 집행부는 닭목령에서 산행을 종료하기로 했다. 6킬로미터를 걸었을 뿐인데 힘겨웠던 나는, 그 결정에 안도했다. 눈 덮인 산에서 적당한 자리를 찾아 허겁지겁 밥을 먹고, 따뜻한 녹차를 마신 후 다시 출발했다.
하늘은 쾌청했고, 산들은 하얀 옷을 입고 있었다. 대관령에 서 있는 풍력 발전기가 보였다. 화란봉으로 오르는 길은 경사가 심하지 않았지만, 길었고 눈이 허벅지까지 쌓여 있었다. 방수 등산화를 신었음에도 양말까지 축축해졌고, 땀은 비 오듯 흘렀다.
50여 분을 걸어 화란봉(1,069미터)에 도착했다. 부챗살처럼 펼쳐져 정상을 중심으로 겹겹이 둘러싸인 모습이 마치 꽃잎 같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봉우리였다. 정상은 밋밋했지만, 주변의 산자락에는 눈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산에는 우리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후 3시 20분, 강릉시 왕산면 닭목령에 도착했다. 오늘도 나는 후미였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걸었다. 자기 삶을 기록한 글은 곧 자기 역사다.
(26차, 삽당령 - 화랑봉 - 닭목령)
횡성을 지날 때, 해가 산 위로 오르며 강렬한 빛을 발산했다. 강릉휴게소에 잠시 들렀더니 눈이 한쪽에 수북하게 쌓여 있었고, 멀리 산등성이에는 풍력 발전기가 우뚝 서 있었다. 오늘 우리가 걸을 곳이었다. 30분쯤 차를 타고 산기슭으로 들어가자, 닭목령이 눈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닭목령 표지석 앞에 제단을 마련하고 시산제를 올렸다. 김정녕 회장이 산신께 강신을 청하고, 임 산악대장이 선서를 낭랑하게 외쳤다.
축문을 낭독하는 내 목소리도 산에 울려 퍼졌다.
“2011년 신묘년 3월 5일,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우리 안산 백두대간 종주 클럽 회원 일동은 이곳 닭목령에서 이 땅의 모든 산하를 굽어보시며 그 속의 모든 생명을 지켜주시는 산신령님께 고합니다. 산을 배우고 산을 닮으며, 그 속에서 하나가 되고자 모인 우리가 아무 낙오자 없이 안전하게 산행할 수 있도록 하여 주시고, 아름다운 조화로 가득한 산과 골짜기를 걸을 때마다 두 다리가 지치지 않도록 힘을 주시옵소서. 천지신명이시여! 오늘 준비한 술과 음식은 저희의 조그만 정성이오니, 어여삐 여기시어 즐거이 받아주시고, 올 한 해 각각 개개인의 산행길을 무사히 지켜 주시기를 바라오며 이 한 잔의 술을 올리나이다.”
오늘의 산행은 닭목령에서 출발해 왕산 제1쉼터와 제2쉼터를 지나 고루포기산, 전망대와 행운의 돌탑을 거쳐 능경봉을 오르고 대관령으로 내려서는 12.95킬로미터 코스다. 시루떡을 나눠 먹고 산으로 들어섰지만, 지난주 삽당령에서 이곳 닭목령까지 눈 속을 헤치며 걸었던 기억 때문에 선뜻 발걸음을 옮기기 어려웠다. 그러자 김래홍 산 벗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27차까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산행에 참여했으며, 올해 쉰일곱인데도 술과 담배를 멀리하며 꾸준히 운동해 왔다고 한다. 그의 힘과 속도는 실로 대단했다.
9시 10분, 산에 들어선 지 1시간 10분 만에 3.4킬로미터를 지나 왕산 제1쉼터에 도착했다. 땀이 흘렀지만, 능선에 올라 맞이한 바람은 선선했다. 서울의 최저 기온이 영하 4℃였던 반면, 대관령은 영하 21℃까지 떨어졌고, 며칠 전에는 32.9c미터의 폭설이 내려 바람이 매서웠다.
힘겹게 길을 헤쳐 나가고 있는 김래홍 산 벗을 응원하는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김래홍 파이팅!” 이석한 대장은 우리보다 앞서 빠르게 걸어 나갔다. 앞선 김래홍의 지친 모습을 본 그는 선두를 교체해 주기 위해 발걸음을 서둘렀다.
기러기는 먼 거리를 V자 대형을 갖추고 날아서 목적지로 이동한다. 가장 바람을 많이 받는 앞선 녀석이 힘들어하면 바로 뒤에 있는 녀석이 자리를 바꾸고, 그 녀석이 힘들어하면 또 다른 녀석이 앞서며, 서로 힘내라고 소리를 외치며 먼 거리를 날아간다고 한다.
기러기들이 먼 거리를 V자 대형을 이루며 날아가는 것처럼, 우리 일행도 앞서가는 동료가 힘들어지면 뒤에 있던 동료가 자리를 바꾸어 주었다. 눈이 녹아 미끄러운 길을 스틱으로 짚으며, 강원도 평창군과 강릉시 왕산면에 있는 고루포기산(해발 1,238.3미터)에 올랐다.
그곳에는 선두에 섰던 산 벗들이 컵라면을 먹고 있었지만, 버너를 가지고 온 이판사판 님과 코펠을 챙긴 꼬깨비 님은 보이지 않았다. 정작 라면은 나와 함께 있는 이장신 선생에게 있는데 말이다. 각자 배낭에 넣고 이곳까지 가져온 버너와 코펠, 그리고 물과 라면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어느덧 12시가 다가왔다. 이제 2시간 조금 더 걸으면 오늘 산행이 끝날 것 같은데, 이곳에서 점심을 먹지 않으면 마땅히 먹을 곳이 없을 것 같았다. 출발 이후 쉬지 않고 걸은 다리가 후들거렸고, 배에서는 밥 달라며 신호를 보냈다.
길옆에 연리지 안내판이 보였다. 가까이 자라던 두 나무가 맞닿아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줄기와 몸통이 하나로 합쳐진 것을 연리목이라고 하고, 가지가 하나로 합쳐진 것을 연리지(連理枝)라고 한다. 시인은 나무에도 영혼이 있다고 했다. 눈이 펑펑 내리고 거센 바람이 불던 날, 나무들은 홀로 서 있던 몸을 붙여 하나가 되어 서로를 보살피며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영동고속도로에 차들이 씽씽 달리는 횡계치를 바라보며 올라선 곳은 해발 1,123.2미터의 능경봉이었다. 눈을 겹겹이 이고 있는 첩첩산중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평창군 대관령면과 강릉시 왕산면에 걸쳐 있는 능경봉에는 눈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상고대였다. 이제 대관령으로 내려갈 차례였다.
선두들은 서둘러 내려가서 이미 보이지 않았으나, 후미는 여유를 부렸다. 여성 셋, 남성 넷. 그들은 내가 산상 음악회에서 연주한 하모니카 소리와 낭송한 시가 지친 몸에 힘을 충전해 주었다고 했다. 나는 눈길을 걸으며 윤동주 시인의 <눈>을 낭송했다. 산 벗들은 한 줄 한 줄을 따라 외웠다. 시를 외우지 못한 사람은 밥을 굶기로 하고 따라 외웠다. 결국 모두 시를 낭송했다.
눈
윤동주
지난밤에 눈이 소오복이 왔네
지붕이랑 길이랑 밭이랑
추워한다고
덮어주는 이불인가 봐
그러기에
추운 겨울에만 내리지
(윤동주의 <눈> 전문)
산 벗들은 내가 쓰는 산행기를 책으로 엮으라고 권했다. 책 이름을 『하늘길을 걷는 사람들』로 정하자는 제안도 받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후 2시 10분, 산에서 내려왔다. 시간당 2.6킬로미터를 걸었으니 느린 걸음은 아니었지만, 모처럼 여유 있는 산행이었다. 대관령에는 집채만 한 거북이 모양의 고속도로 준공 기념비가 서 있었다. (27차, 닭목령 - 고루포기산 - 대관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