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방재(어평재)에 도착하니 차가운 바람이 뺨을 스치며 지나갔다. 어제는 바람이 몹시 불었지만, 오늘은 잦아들 것이라는 예보와 달리, 이곳의 바람은 여전히 매서웠다. 해발 935미터의 고지대라서 그런 듯했다. 급히 겉옷을 꺼내 입고 모자까지 눌러썼지만, 몸이 휘청거릴 정도로 바람은 셌다.
오늘의 산행은 화방재에서 시작해 만항재를 거쳐 함백산에 오른 다음 두문동재로 내려와 금대봉과 비단봉을 지나 매봉산에 올랐다가 삼수령(피재)으로 하산하는 21.45킬로미터의 긴 여정이다. 스물아홉 명의 일행은 만항재로 오르는 가파른 산길로 접어들었다. 날씨는 차가웠고, 칼바람은 몸속 깊이 파고들었지만, 산을 오르니 이내 땀이 흘러내렸다. 땀은 두툼한 옷을 뚫지 못하고 피부 위에 머물렀다.
20여 분을 오르자, 능선길이 나타났다. 산을 오를수록 맞은편의 태백산이 점점 가까워 보였다. 예전에 태백산에서 함백산을 바라보며 그 모습을 궁금해했던 적이 있었는데, 함백산도 태백산처럼 밝고 웅장한 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은 먼 곳에서부터 몰아치다가 이내 잦아들고, 다시 강하게 불어왔다. 마치 바닷물결이 몰아치는 듯한 느낌이었다. 화방재에서 3.45킬로미터를 걸어 해발 1,330미터의 만항재에 도착했지만, 쉬지 않고 2.85킬로미터 떨어진 함백산을 향해 발길을 재촉했다. 능선길을 걷고, 낮은 구릉을 오르내리던 중, 고개를 들어보니 군사시설 같은 구조물이 삐죽 솟아 있었다. 산은 돌계단으로 이어져 있었다.
한 계단씩 오르다 보니 눈앞이 환해졌다. 드디어 한반도 남쪽에서 여섯 번째로 높은 함백산 정상에 도달했다. 해발 1,572.9미터의 함백산 정상에는 표지석이 세찬 바람에도 흔들림 없이 서 있었다. 저 멀리 태백산이 보였고, 그동안 걸어온 수많은 봉우리가 한눈에 펼쳐졌다.
산은 나의 멘토였다. 나는 삶이 힘들 때마다 산을 찾아 위로받고, 산과 대화하며 답을 구하곤 했다. 일주일 전에는 스위스 융프라우에 올라 융프라우 신에게 나에게 바라는 편지를 썼다. 나, 최경호에게. 2010년 11월 27일, 나는 해발 3,454미터의 융프라우에서 신에게 기도를 올린다. 늘 정직하게, 생각한 대로 살아가자. 그러면 신께서 나에게 힘과 용기, 그리고 지혜를 선물하실 것이다. 잊지 말자.
지리산의 신령도, 덕유산의 신령도, 태백산의 신령도, 그리고 함백산의 신령도 나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라 믿는다. 함백산에서 두문동재로 가는 길은 분간하기가 애매했다. 사방이 터져 있었고, 여러 갈래 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산등성이를 따라 능선을 타고 걸었다. 답답했던 가슴이 시원하게 뚫린 듯 편안해졌다. 하지만 오후가 되면 날씨가 따뜻해질 것이라는 일기예보를 비웃기라도 하듯, 바람은 여전히 매서웠다.
은은한 햇빛을 받는 은대봉(1,442.3미터) 표지석을 깨우고 싶지 않아 조용히 싸리재로 향했다. 하지만 싸리재보다 두문동재라는 표현이 더 자주 쓰였고, 산길 곳곳에 안내판이 서 있었다. 두문동재는 함백산에서 5.4킬로미터 떨어져 있었다. 고려 말, 일흔두 명의 문신이 개성 송악산 서쪽 자락 만수산에 은둔했으며, 동쪽 자락에는 마흔여덟 명의 무인이 숨어 살았다. 그들은 이성계 장군이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세운 조선을 거부했다.
조선 태조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지 않았다. 이로 인해 '두문불출'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그들은 조선의 불화살을 맞으며 목숨을 버렸다. 불에 타 죽고 살아남은 일곱 충신이 흘러 들어온 곳이 바로 이곳 정선의 두문동재였다.
기울던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고자 했던 그들의 결단이 과연 옳았는지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줄서기와 변절이 만연한 사회에서, 그들의 정신은 우리에게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전화가 울렸다. 늦은 발걸음을 재촉하는 목소리였다. “어디쯤 있나요?” 곧바로 눈앞에 커다란 입간판이 보였다. 싸리재, 아니 두문동재였다. 산불초소 옆은 바람이 불지 않았다. 그곳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산행을 시작한 지 3시간 만에 두 다리를 쭉 펴고 앉아 먹는 점심시간은 정말 행복했다. 산 벗이 산불 감시원에게 사과를 내밀었다. 살아있는 사람의 따뜻한 마음이었다.
2차선 아스팔트 길옆에는 ‘백두대간 두문동재’ 표지석이 옛 정신을 일깨우려는 듯 세찬 바람 속에서도 꼿꼿하게 서 있었다. 이제 금대봉으로 향했다. 임도는 소형차가 다닐 만큼 넓고 평탄했다. 점심을 먹고 배가 부르니 마음도 한결 여유로웠다. 햇볕을 받던 은대봉을 깨우지 않았는데, 1시간 뒤 금대봉에 도착했다. 은대봉과 같은 크기의 표지석을 보니 금과 은이라는 이름에 얽힌 사연이 있는 듯했다.
서기 636년, 신라 선덕여왕 5년에 자장율사가 함백산 북서쪽에 정암사를 세우며 금탑과 은탑을 세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때 두문동재 사이에 은대봉과 금대봉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해발 1,418.1미터의 금대봉 표지석 옆에는 ‘양 강 발원 봉’이라는 표지목이 서 있었다. 이곳이 한강과 낙동강의 발원지였다. 표지목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흔들거렸다.
산과 강은 우리의 생명이다. 한강과 낙동강은 우리 생명을 지켜주는 4대 강 중 두 강이다. 정부는 오랫동안 4대 강을 살리겠다며 공사를 강행하고 있고, 반대편에서는 4대 강의 생명을 지키겠다며 공사를 저지하고 있다. 훗날 우리는 후대들에게 무엇을 말할 것인가. 나라 발전을 위해 개발할 수밖에 없었다고 할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탐욕이 생명을 파괴했다고 할 것인가. 참으로 안타깝고 슬픈 일이다.
가파른 산길은 숨이 가쁘게 만들었다. 그곳은 비단봉이었다. 이름만으로도 비단결 같은 능선이 떠오르는 이곳은 정말 '비단봉'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산일까? 지난달에 올랐던 태백산과 함백산이 그랬고, 두문동재라는 이름도 마찬가지였다. 모양과 산세가 이름에 걸맞아야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는데, 비단봉의 산세는 비단결 같지 않았다. 숨을 헐떡이며 이 봉우리에 오른 사람들이 과연 이곳을 '비단봉'이라 부를까?
저 멀리 풍력발전기가 보였다. 그곳은 매봉산이었다. 백두산에서 시작해 금강산과 설악산을 거쳐 내려온 산줄기가 매봉산에서 백두대간과 낙동정맥으로 나뉜다. 1984년, 여성 최초로 백두대간을 단독 종주한 남난희 씨가 떠올랐다. 그녀의 이야기를 담은 『하얀 능선에 서면』의 표지에 인쇄된 그녀의 사진을 보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나도 언젠가 그런 날이 오기를 바란다.
부산 금정산에서부터 그녀가 걸어왔던 길 위에 지금 내가 서 있다. 드넓은 평야가 눈앞에 펼쳐졌다. 매봉산에 오르는 길은 고랭지 채소밭과 국유림 사이로 겨우 한 사람이 걸어갈 수 있을 정도로 좁았다. 채소밭은 이미 배추를 수확해 텅 비어 있었고, 국유림에는 손가락 두께의 나무들과 잡풀이 바람에 덜덜 떨고 있었다.
다시 산길로 접어들자, 삼수령과 매봉산 갈림길에 안내판이 서 있었다. 매봉산은 옛날 이곳에 바닷물이 밀려들었을 때, 매가 앉을 만큼의 봉우리만 남았다고 전해진다. 마침내 삼수령 표지석이 보였다. 이곳은 한강, 낙동강, 그리고 오십천의 발원지라고 한다. (24차, 화방재 - 함백산 - 삼수령)
1월 16일, 서울의 최저 기온은 영하 17.8℃, 안산은 영하 10℃까지 내려갔다. 한파가 한반도를 강타한 지 한 달이 넘었다. 옷을 여러 겹 껴입었음에도 추위는 여전했다. 오늘의 산행은 백복령에서 시작해 석병산에 오르고, 강릉의 삽당령으로 내려서는 18.5킬로미터의 백두대간 25차 코스였다. 원래는 지난해 12월 4일 피재에서 댓재까지의 26.1킬로미터 구간을 걷기로 계획했으나, 강원도에 내린 폭설과 지속적인 한파로 인해 짧은 구간으로 조정되었다.
안산 백두대간 종주 클럽의 김정녕 회장은 지난주 수암봉에서 발목을 다쳤다고 했다. 그럼에도 깁스를 한 채로 회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산행을 돕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함께 나왔다.
우리 사회에는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서 권리만 주장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김 회장을 보며 소임과 책임을 다하는 중요성을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백복령이 있는 정선으로 향하는 길에서 관광버스 기사인 박달영(가명) 사장은 "저곳이 아우라지입니다. 사랑하는 남녀가 강을 두고 만나지 못하다가, 다리가 놓이면서 비로소 만날 수 있게 된 곳이죠"라고 설명했다.
9시 20분, 해발 780미터의 백복령 고갯길에 도착하니 바람이 거세게 휘몰아쳤다. 오늘 산행 예정 시간은 7시간 30분이다. 이미 선두는 산으로 들어섰고, 후미도 부지런히 뒤를 따랐다. 거친 숨소리가 산속에 울려 퍼졌다.
30여 분 동안 눈길을 걸어 오르니 땀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오른쪽으로 해발 972미터의 자병산이 보였는데, 시멘트 작업장 때문에 허물어져 있었다. 지리산 천왕봉에서 여기까지 오면서 무너져 내린 백두대간의 산들이 떠올랐다. 자본의 논리에 의해 백두대간이 점차 훼손되고 있었다.
백두대간은 한반도의 등뼈다. 남난희가 백두대간을 걸었던 길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이후 백두대간을 걷는 이들이 점점 늘어났다. 백두대간은 우리의 정신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본에 의해 이 귀한 산줄기가 훼손되고 있다.
1시간 30분 만에 생계령에 도착했다. 칼바람에 얼굴이 얼어붙을 듯했다. 최근 한파로 산행 중 동상에 걸린 사람들을 떠올리며, 나도 얼굴을 자주 만지고 목에 두른 버프를 얼굴에 감쌌다. 산길에는 눈이 그대로 쌓여 있었고, 능선에 오를 때마다 불어오는 칼바람에 어깨는 더욱 움츠러들었다. 멀리 바다가 희미하게 보였다.
대퇴근에 경련이 일기 시작했다. 혹한으로 운동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석병산으로 가는 길에서 인천 미소산악회를 만났다. 온몸을 옷과 천으로 꽁꽁 감싼 사람들을 구분하기 쉽지 않았다. 안전한 산행을 하라는 의미의 “안산!”을 외치며 길을 안내해 주는 이들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야호 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해발 1,055미터의 석병산에 도착했다. 석회암으로 병풍처럼 둘러싸인 산이다. 자병산과 석병산의 '병(屛)'은 병풍 병(屛)자를 쓴다. 그렇다면 석병산과 자병산은 형제가 아닐까. 아우인 자병산이 허물어져 버린 만큼, 형 격인 석병산은 슬픔을 간직한 듯한 모습으로 우뚝 서 있었다.
이제 두리봉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삽당령까지는 5.5킬로미터, 약 2시간 거리였다. 앞서간 사람들이 남긴 발자국을 따라 걷다가, 그 발자국을 벗어나면 눈구덩이에 빠지기도 했다. 루쉰의 소설 <고향>의 한 문장이 떠올랐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곳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처음 그 길을 걸었던 사람을 기억해야 한다.“
20년 전 상사로 모셨던 동장님이 떠올랐다. 두 달 전, 그분이 내가 근무하는 사무실에 찾아오셨다. 완고하면서도 소년 같은 수줍음을 지니셨던 동장님은 이제 일흔다섯이 되셨다. 허리는 많이 굽으셨고, 이마에는 깊은 주름이 파였다. 그분은 2005년 안산 단원 환경 마라톤 대회에서 처음으로 10킬로미터를 완주한 후, 지난해 춘천 마라톤 대회에서는 42.195킬로미터 풀코스를 완주하셨다고 말씀하셨다.
일흔의 나이에 마라톤을 시작해 5년 만에 풀코스를 완주한 동장님은 안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냈다. 손녀가 써준 마라톤 기록이었다. 6시간 56분 14초였다. 기록은 중요하지 않았다. 20킬로미터 지점에서 근육 경련이 일어나 25킬로미터까지 1시간 이상을 걸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완주한 그분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내 즐거웠다.
강릉이 고향이신 그분은 내년에 걸어서 국토를 횡단해 보고 싶다고 하셨다. 꿈이 있으면 늙지 않는다고들 한다. 국토 종단과 마라톤 경험이 있는 나는 그분의 꿈이 이루어지도록 여러 가지 조언을 해드렸다. 연세가 있으니 무리하지 말고 즐겁게 달리라고 당부했다. 목표를 가지고 사는 사람은 호기심과 희망이 있어서 행복하다. 오늘은 6시간 30분 동안 대간 길을 걸으며, 과거와 현재의 내 삶을 돌아보았다. 강릉시 옥계면 해발 680미터의 삽당령에 도착하자, 후들거리던 다리가 언제 그랬냐는 듯 꿋꿋하게 버텨주었다. 윤 산악 대장은 수고했다며 듬뿍 떡국을 퍼주었고, 김 회장은 맥주를 건넸다. 송 총무는 강원도 음식인 부꾸미를 권했다. 함께 손을 잡고 걸었던 여러 산 벗과 2011년 신묘년에도 건강을 기원하며 잔을 부딪쳤다. (25차, 백복령 -석병산 - 삽당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