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전국에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어 새벽 3시에 일어나 배낭을 챙기며 우의를 넣었다 빼기를 반복했다. 오늘의 산행 거리는 접속 구간을 포함해 30킬로미터로, 지리산 종주 코스를 제외하면 가장 긴 거리였다. 그래서 배낭 무게를 줄이려 했지만, 비를 맞으면 감기에 걸릴 수 있어서 우의와 스패츠, 여벌 옷까지 챙겨 집을 나섰다. 새벽 공기는 쌀쌀해서 한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한 달 만에 만난 회원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눈 후, 지난 5월 소백산에서 내려왔던 고치령으로 향했다. 오늘 산행 인원은 스물일곱 명으로 평소보다 적었다. 아마 긴 거리 때문에 부담을 느낀 것 같다. 김정녕 회장은 음식을 많이 준비했는데 인원이 적으니 산행 후 실컷 쇠고기를 먹자며 웃음을 지었다.
좌석리에서 고치령까지는 4킬로미터의 접속 구간이 있었다. 강원도의 꼬불꼬불한 산길을 연상시키는 이 구간은 힘이 많이 들 것 같아 좌석리 이장님의 트럭을 타고 이동했다. 화물차 뒤 칸에 서거나 쪼그려 앉아 서로의 몸을 부여잡고 이동한 끝에, 오전 7시 30분에 고치령에 도착했다. 드디어 22차 산행이 시작되었다.
산행은 8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마구령을 오르고, 해발 966미터의 갑곶산과 가파른 선달산을 지나 박달령, 옥돌봉을 거쳐 도래기재로 내려가는 26킬로미터 코스였다. 예정된 산행 시간은 10시간이었다. 고치령에서부터 시작된 1킬로미터는 가파른 오르막이었고, 그다음 1킬로미터의 능선길에서는 숨을 고르며 1시간 이상 걸었다. 비 예보와 달리 맑은 하늘과 시원한 바람 덕분에, 2시간쯤 지나 마구령에 도착했다.
산길에는 빈 잣송이들이 떨어져 있었다. 임 대장은 청설모가 잣송이를 따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떨어진 잣송이를 주우면 된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우리는 초등학생들처럼 재잘거리며 웃음이 끊이지 않는 즐거운 산행을 이어갔다.
선달산에 오르기 전, 점심을 먹기로 하고 능선을 오르내렸다. 11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갑곶산의 평평한 곳에 자리를 펴고 쉬었다. 뒤따라오던 일행은 밥을 준비하지 않고 떡만 가져왔으니 앞서가겠다고 했다. 우리는 매실주 한잔하고 가라며 그들을 붙잡았다. 입에 넣어주는 안주를 오물거리며 후미 일행이 우리 앞을 지나갔다.
김 회장은 나에게 시 낭송을 부탁했다. 임 대장이 요청한 첫 번째 시는 내가 매일 아침 가장 먼저 낭송하는 윤동주의 <서시>였다.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다.” 모두 함박웃음을 지으며 박수를 보냈다. 이어 김춘수의 <꽃>을 낭송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여성 벗들은 소녀 시절에 외웠던 기억을 되살리며 따라 읊조렸다. 마지막으로 나는 <귀천>을 선택했다. 하늘이 맑았고, 얼마 전 천상병 시인의 아내가 하늘로 떠났기 때문이었다.
귀천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귀천>의 일부)
이태 전 문화예술의 전당에서 연극 <소풍>을 보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었다. 그 연극은 시인 천상병의 이야기였다. 시에 숨겨진 뜻이 불순하다고 고문하던 군사독재 시절의 이야기였다. 유고 시집이 되었던 <귀천>은 우리 역사 속의 암울함을 상징한다. 잠시 시의 세계에 빠졌던 산 벗들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점심을 먹고 2킬로미터를 더 걸어가니 앞서갔던 일행이 늦은목이에서 쉬고 있었다. 오늘 산행의 절반인 13킬로미터 지점이었다. 이곳부터 1.9킬로미터의 오르막길을 올라야 선달산에 도착할 수 있다. 12시 30분에 늦은목이를 출발해 1시간 후 선달산에 도착했다. 해발 1,236미터의 선달산은 소백산과 태백산 사이에 자리 잡고 있었다. 동쪽으로는 남대천이 보였고, 서쪽으로는 박달령이 보였다. 부근에는 부석사가 있다는 안내 표지판도 보였다.
우리는 자리를 정리하고 5.1킬로미터 앞에 있는 박달령으로 향했다. 박달령까지는 내리막길이었다. 신령각이 보였는데, 그곳은 박달령 산신령을 모셔둔 곳이었다. 촛불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절을 했다. 그러자, 이판사판 님이 무슨 소원을 빌었냐고 물었다. 나는 웃으며 “이야기 안 해줘!”라고 대답했다.
선달산을 오를 때와 달리 옥돌봉 오르는 길에는 평지가 간간이 있어 숨을 돌릴 수 있었다. 2.8킬로미터 지점에 쉼터가 있었지만, 우리는 쉬지 않고 40여 분 만에 옥돌봉에 올랐다. 옥돌봉 표석에는 앞서간 선두들이 따라오는 벗들에게 힘내라는 의미로 남겨둔 사과가 있었다. 좌석리 이장님이 맛보라며 준 몇 알의 사과는 정말 맛있었다. 우리는 뒤에 있는 일행을 위해 몇 알 남기고 도래기재로 내려섰다. 2.68킬로미터를 내려가야 한다.
이곳까지 20킬로미터 넘게 걸어서 지쳐 있었다. 박달령에서 옥돌봉까지는 3킬로미터를 올라야 했다. 문득, 한비야 님이 쓴 『그건, 사랑이었네』 에세이가 떠올랐다. 그녀는 1년에 책 100권을 읽고, 국토 종단을 하고, 세계 여행을 하며 빈민 난민 구호 활동을 했고, 히말라야의 한 귀퉁이를 올랐다. 그녀는 앞으로 백두대간을 종주하고 싶다고 했다. 산에 오르면 남성들의 다리 근육을 보며 기분이 좋아진다고 하던 그녀의 모습이 내 삶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녀의 많은 책을 읽으며 나는 그녀의 삶에서 영향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차 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도래기재에 도착했다. 서벽리 북서쪽 2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마을 이름을 따서 도래기재라고 불렀다고 한다. 터널 위에는 경상북도와 강원도의 경계 표시가 있었다. 드디어 강원도에 입성했다. 경상남도에서 시작해 전라남도, 충청도를 지나 경상북도를 통과해 강원도에 들어선 것이다. 지금까지 걸은 거리는 490.4킬로미터였다. 오후 5시가 되었으니, 산속에서 9시간 20분을 보낸 셈이다.
포장도로를 따라 500여 미터를 내려오니 일행이 팔각정에 앉아 있었다. 임 대장이 참나무에서 땄다는 노루궁뎅이버섯과 김정녕 회장이 딴 송이버섯이 불고기와 함께 볶아지고 있었다. 다음 산행은 태백산이다. 겨울에만 열서너 번 올랐던 태백산을 늦가을에 오른다고 생각하니 벌써 마음이 설렌다.
(22차, 고치령 - 선달산 - 도래기재)
새벽 4시, 도시를 휘감은 안개가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한 달 만에 다시 만난 산 벗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우리는 지난달 산행을 마쳤던 경북 봉화군 춘양면과 강원도 영월군 상동읍 경계에 있는 도래기재로 향했다. 오늘의 산행은 도래기재에서 시작해 구룡산을 오르고, 신선봉과 깃대배기봉을 지나 태백산을 거쳐 화방재로 내려오는 24.2킬로미터의 구간이다.
아침 8시 5분, '아홉 마리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이 깃든 구룡산 오르막길에 발을 내디뎠다. 도래기재에서 시작된 오름길은 예상대로 가팔랐다. 한 달 만에 산에 오르니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가슴이 터질 듯했다. 오늘의 산행 시간은 8시간. 절대 쉽지 않은 코스였지만, 이겨내리라 마음먹었다.
도래기재에서 구룡산까지는 5.46킬로미터였다. 산 벗들과 웃음을 주고받으며 오르는 동안, 기슭에서 몰아친 바람이 서늘함을 더해 주었다. 능선에는 나뭇잎들이 산길에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사-아 싹. 차 아 착.” 바람에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가 고요한 산을 깨우는 듯했다. 마치 산이 이방인인 우리를 맞이할 준비를 일찌감치 마친 것만 같았다.
능선을 걸으며 올해를 돌아보았다. 어느덧 두 달도 채 남지 않은 한 해. 계획했던 일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본다. 연초 생각했던 것들을 해냈다. 내년에는 더 많은 여행을 즐겨보자. 새로운 일에 도전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멋지게 준비하고 이뤄보자.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몸에 배었으니, 그 시간을 잘 활용해 보자는 다짐도 해본다.
그렇게 나를 돌아보며 앞날을 그리던 중, 어느새 1,071봉에 도착했다. 쉼 없이 걷다 보니 1시간 35분 만에 구룡산에 닿았다. 쌀쌀했던 날씨는 어느새 온기를 품었고, 땀방울은 등산화로 뚝뚝 떨어졌다. 구룡산은 태백산과 옥석산 사이에 자리한 백두대간의 마루금이었다. 이 산에서 발원한 물줄기는 남북으로 흘러 낙동강과 남한강으로 이어진다.
해발 1,345.7미터의 구룡산 정상에는 헬기장이 있었지만, 여러 산을 조망할 수 없는 것이 아쉬웠다. 고직령으로 내려서는 길은 급경사였으나, 곰넘이재까지는 완만한 능선이 이어졌다. 곰넘이재는 신(神)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태백산으로 넘어가던 사람들이 넘던 고개로, 신성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햇빛이 비치는 곳에 올라서니, 해발 1,280미터에 신선봉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정표가 걸린 양지바른 곳에는 묘지가 하나 있었다. 무덤은 결코 한 생애의 종말을 알리는 경계가 아니라 끝없는 삶으로의 입문을 표시하는 경계라고 『투탕카멘』의 저자 크리스티앙 자크는 말했지만, 맨몸으로 올라오기도 힘든 이곳에 묘지를 썼다니.
10킬로미터 남짓 걸었을 때, 배꼽시계가 점심을 알렸다. 각화산 갈림길을 지나 낙엽이 가득한 곳에 자리를 펴고, 준비해 온 음식을 배낭에서 꺼냈다. 묵은지, 조개젓, 풋고추, 열무김치 등 각양각색의 반찬들이 차려져 마치 뷔페를 연상케 했다.
뻐근해진 다리를 이끌고 해발 1,370미터의 깃대배기봉에 올랐다. 이곳에는 회색 표피를 띠고 자라는 사스래나무가 서 있었다. 고산에서만 볼 수 있는 이 나무들은 태백산으로 가는 길에 우뚝 서 있었다. 숲은 이미 화장을 지운 얼굴처럼 소박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이맘때의 산을 특히 좋아한다. 제대로 된 산의 모습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무들은 굽었다가도 다시 하늘로 꼿꼿이 뻗어 있었다. 쓰러지지 않고 다시 일어선 모습이 미인송보다도 더 아름답고 대견하게 느껴졌다.
깃대배기봉에서 태백산까지는 3.9킬로미터 거리였다. 부소봉을 지나 능선을 따라 걷다 보니, 돌로 쌓은 제단이 보였다. 나는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저기!" 십여 년 동안 눈에 덮인 모습만 보아왔던 천제단이었다. 태백산에는 눈 대신 맑고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허름한 나뭇가지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향해 파르르 떨고 있었다.
사람들은 종종 나에게 그동안 오른 산 중에서 어느 산이 가장 좋았냐고 물어보곤 한다. 나는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산마다 각기 다른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태백산은 나에게 특별했다. 어째서 순위에도 오르지 못하는 태백산을 열네 번이나 찾았는가? 태백산은 그저 나를 끌어당기는 산이었다.
포리스트 카터의 자전적 소설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에서 주인공 작은나무가 산에서 인디언 체로키족의 생활 철학을 배웠듯, 나 역시 태백산에서 무언가를 배우고 느꼈다. 태백산은 나에게 억울한 일들을 털어놓고, 부족한 것을 채워달라고 응석을 부릴 수 있는 존재였다. 지리산이 엄격한 어머니라면, 태백산은 따뜻한 작은어머니 같은 산이었다.
태백산은 백두산으로부터 금강산, 설악산, 오대산, 그리고 청옥, 두타산을 지나며 뻗어 내려온 백두대간에서 소백산맥으로 갈라지는 지점에 솟아 오른 산이다. 태백산의 이름은 ‘크고 밝다’는 의미의 우리말 ‘한밝뫼’에서 유래했다. 산 전체가 하얀 자갈로 이루어져 있어 눈이 쌓인 듯 밝게 빛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동국여지승람』에는 태백산이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신성한 산으로 기록되어 있다.
영봉 아래쪽 하단이라 일컫는 천제단을 지나쳐 정상에 올랐다. 해발 1,560.6미터의 영봉에는 자연석 녹니편마암으로 쌓은 천왕단(天王壇)이 서 있었다. 천왕단은 위쪽은 원형, 아래쪽은 네모꼴이다. 이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난다는 것을 나타낸 구도이다. 장군봉(1,566.7미터)에도 사각형으로 된 장군단이 있다. 이 세 개의 제단을 천제단이라고 한다. 천왕단은 하늘에, 장군단은 사람(장군)에, 하단은 땅에 제사를 지냈던 곳이다.
문수봉이 멀리서 하얗게 서 있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한 사람의 등산객도 만나지 못했는데, 천제단에서는 여러 사람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한배검 표석 앞에서 좌선하는 이들의 모습은 마음을 경건하게 만들었다. 표지석에는 붉은 글씨로 한배검이라 쓰여 있었다. 나는 아홉 번의 절을 올리며 천부경의 첫 구절인 '일시무시일 一始無始一'과 마지막 구절인 '일종무종일 一終無終一'을 되뇌었다. 늘 '처음처럼'을 생각하자 다짐했다. 세찼던 바람이 선선해졌다. 나는 켜켜이 겹친 백두대간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이시여! 땅이시여! 백두대간 신령이시여! 태백산 신령이시여! 나에게 힘과 용기와 지혜를 주소서." 내 목소리는 우렁찼지만, 떨리고 있었다. 사길령 매표소를 지나 화방재까지는 4.5킬로미터였다. 장군단에서도 좌선하고 앉아 있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그들은 무엇을 간절하게 바라며 저리 움직임 없이 가부좌를 틀고 있는 것일까.
생천사천(生千死千), 살아 천년, 죽어 천년, 주목이 고고한 자태로 발길을 잡는다. 매년 태백산을 찾을 때마다 눈 속에 서 있었던 주목은 경외심을 일으켰지만, 화장기 없는 주목은 새로운 느낌을 주었다. 뜨겁게 달구었던 지난여름 열기를 온몸으로 받아들여 더욱 강한 힘을 느끼게 하는 생천과 사천은 그렇게 겨울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쌓인 눈이 1년 내내 있을 것 같았던 태백산 길은 삐죽삐죽 솟아 나온 돌들이 툭툭 불거져 있었다. 덧쌓인 눈을 걷어낸 맨몸이다. 그동안 겨울에 열세 번을 찾았던 태백과는 달리 가을에 태백을 만난 나는 생소한 느낌을 받았다. 사길령으로 내려가는 길은 지루했다. 무릎이 시큰거렸다. 20킬로미터 넘게 산길을 걸었다. 사길령은 얄밉도록 멀었으나 그곳에서 태백산과 함백산을 전체로 조망할 수 있어 위안이 되었다.
드디어 산령각과 울진 무장 공비 침투 루트였다는 안내도가 보였다. 해가 산 너머로 뉘엿거리고 있었다. 산은 아쉬운 빛을 고스란히 받아들여 황금색 물결을 이뤘다. 자동차 소리가 났다. 화방재였다. 봄이면 진달래와 철쭉으로 붉게 타올라 꽃방석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 사람들은 어평재라고 불렀다.
태백산의 신이 된 단종의 혼령이 이제부터 내 땅이라는 의미로 어평(御坪)이라 해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삼촌 수양대군에게 임금의 자리를 빼앗기고, 열다섯 나이로 삶을 마감했던 단종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후대가 비각을 이곳에 세웠다. 화방재 맞은편에 있는 망경사 옆에는 조선 태백산 단종비각이 있다. 그래서 민초들은 단종을 태백산의 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8시간 20분 만에 만난 화방재야 반갑다.
(23차, 도래기재 - 태백산 - 화방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