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관령휴게소를 벗어나자마자, ‘대굴령마을 11킬로미터’라는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강원도 강릉시와 평창군의 경계에 있는 대굴령은 영서지방과 영동지방을 잇는 중요한 관문이다. 이곳은 대관령으로 불리며, 이름에는 아흔아홉 개의 험준한 고개를 오르내리며 ‘대굴대굴’ 구른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
선자령으로 오르는 길이 익숙했지만, 연녹색 잎이 가득한 산은 눈 덮인 겨울과는 달리 낯설게 느껴졌다. 오늘의 산행은 대관령에서 시작해 선자령을 오르고, 곤신봉과 매봉을 지나 소황병산과 노인봉을 거쳐 진고개로 내려가는 25.8킬로미터의 긴 코스였다.
이번 산행은 안산 백두대간 클럽의 서른여 명 회원과 함께했던 이전과는 달리, 이판사판 님, 꼬깨비 님, 그리고 이장신 선생과 함께했다. 지난 4월 2일에 백두대간 클럽이 이곳을 찾았을 때, 나는 몸이 아파서 함께하지 못했지만, 그들도 당시에 눈 덮인 길을 찾지 못해 오늘 다시 이곳을 찾았다.
겨울이 지나 대관령 목장은 파릇한 풀로 덮였다. 자연은 겨울에서 봄으로 돌아왔고, 나는 팍팍한 삶에서 벗어나 자연 속에서 위로받고자 이곳에 섰다. 누군가 자연은 인간에게 주는 위대한 선물이라고 말했다.
이슬비가 오락가락했고, 하늘에서는 가끔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골짜기 기슭에서는 굿을 하는 듯한 타악기 소리가 들려왔다. 문득 배뱅이굿을 신명 나게 부르던 인간문화재 이은관 선생님이 떠올라 미소가 지어졌다. 아흔다섯의 연세에도 최선을 다하시는 모습이 나를 채찍질했다.
한국의 알프스라고 불리는 선자령 가는 길에는 노란 양지꽃이 이슬비를 맞으며 피어 있었다. 해발 1,157.1미터의 선자령은 계곡이 아름다워 선녀가 아들들과 목욕하고 놀다가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있다. 백두대간을 이루는 영동과 영서의 분수령인 이곳은 겨울의 칼바람과 달리, 봄바람이 선선하게 불었다. 하지만 나뭇잎들은 서쪽에서 북쪽으로 몸을 돌려 겨울의 차가운 기억을 잊지 않으려는 듯했다.
대관령에서 5.84킬로미터를 걸어 선자령 표지석 앞에 서자, 아련한 기억들이 떠올랐다. 10여 년 전, 공무원 노동조합원들을 이곳으로 안내하여 해맞이 행사를 했던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나이가 들수록 추억을 먹고 산다는 말처럼, 가슴 아팠던 지난 시간은 좀처럼 잊히지 않았다.
선자령에서 매봉으로 가는 길은 임도를 따라 이어졌다. 진고개에서 선자령으로 넘어온 사람들은 새벽 2시부터 산을 탔다고 했다. 7시간을 걸어온 그들은 피곤해 보였지만, 이제 1시간 30분 정도면 산행을 마칠 수 있다는 안도감에 자연을 배경으로 즐겁게 사진을 찍었다.
매봉으로 향하는 6.9킬로미터의 길은 안개가 시야를 가렸다. 삼양목장 목초지를 오르다 오른쪽 길로 접어들자, 산길은 부드럽게 이어졌다. 선자령에서부터 함께하던 두 명의 사나이는 부산에서 출발해 어제 대관령에 도착하여 승용차에서 잠을 자고 오늘 산행에 나섰다고 했다.
그들과 이야기하던 중, 그들은 내가 공무원이거나 법무사일 것 같다고 말했다. 용두산 이야기를 하고 중구에서 숙박했다고 말하는 나를 보고 공무원 냄새가 난다고 한 것이다. 많은 사람이 나를 공무원 같지 않다고 했지만, 그들은 나의 직업을 족집게처럼 맞췄다. 나도 그들에게 물었다. “직업이 혹시 형사나 탐정 아니세요?” 그들은 웃으며 산신령이라 했다. 산은 이렇게 사람들을 어울리게 했고 모두 벗이 된다.
상념에 잠겨 있던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처음 만난 그들이 나를 공무원으로 본 것처럼,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나를 어떤 공무원으로 생각할까? 열정적이고 정의롭고 시민을 위한 공무원으로 보일까? 아니면 교활하고 비굴한 모습으로 보일까? 나는 과연 시민들에게 어떤 공무원일까.
이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산 밑에서 불경 소리가 들려왔다. 능선에 절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우리는 매봉으로 가는 길에서 3킬로미터 정도 벗어나 보현사 가는 길로 잘못 내려가고 있었다. 하늘길을 걸으며 아무 생각 없이 40여 분 동안 엉뚱한 길을 걷고 있었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리본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을 깨닫고서야 길을 잘못 들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순간 다리가 풀렸다.
잘못 내려갔던 길을 1시간 동안 다시 올라 삼양목장 초지로 돌아왔지만, 매봉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임도를 따라 쭉 가면 된다는 말을 듣고 또다시 표지판 없는 거리를 헤매다가, 이상함을 느껴 전화로 안산 백두대간 클럽 산악 대장들의 도움을 받아 해발 1,131미터의 곤신봉을 찾았다.
비는 하염없이 내렸고 안개는 자욱했다. 초지 위에 홀로 서 있는 소나무를 보며 삶이란 자기만의 길을 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길과 산은 나에게 멘토다. 나는 길에 내가 가는 길이 맞는지를 묻곤 한다. 그런데 오늘은 산길을 걷고 있으니, 이 산이야말로 내 최고의 멘토였다.
이장신 선생은 산꾼들을 통제하는 오대산 지킴 터가 앞에 있다며 발소리를 죽이고 말소리를 낮추라고 했다. 앞에 있는 초소를 우회해 산을 내려서고 다시 올라 초소를 벗어나 진고개로 가야 했다. 국립공원관리소 안내판에는 ‘백두대간을 보존하는 방법은 무엇일까?’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산림청조차 산길을 통제하는 관리공단의 처사를 못마땅해한다고 하던데, 백두대간을 다니면 자연이 파괴되는 것일까 하고 나는 묻고 있었다.
각자의 방법으로 관리 초소를 피했다고 생각했지만, 나뭇가지에 할퀴고 찔리면서도 초소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초소에는 아무도 없었다. 산신령이라 불렸던 부산 사나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한기와 허기로 몸을 떨며 그들을 기다려야 했다. 그들은 엉뚱한 방향에서 헤매고 있었다. 이곳에는 대피 번호판이나 안내 표지판조차 없어, 서로 전화로 위치를 알려도 내가 서 있는 곳을 정확히 알릴 수 없었다.
초소 옆의 나무 울타리에 철조망이 쳐져 있었다. 그들은 우리가 백두대간 길을 가지 못하게 하려 했고, 우리는 그 길을 가고 있었다. 나는 길에 물었다. 왜 내가 비를 맞으며 이 길을 가야만 하는 것일까?
오대산 노인봉으로 가는 길은 부드러웠다. 오대산은 해발 1,563미터의 비로봉을 주봉으로, 호령봉, 상왕봉, 동대산, 두로봉 등 다섯 봉우리가 병풍처럼 늘어서 있고, 노인봉은 동쪽으로 따로 떨어져 있었다.
산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진고개로 내려가는 돌계단은 무릎을 시리게 했다. 무릎에 이상 징조가 나타났고, 종아리도 뻐근해졌다. 물을 많이 먹은 등산화는 질척거렸다. 3시간 넘게 엉뚱한 길을 헤맨 몸이 지칠 대로 지쳤다. 오전 8시 20분부터 산에 올라 10시간 20분 동안 머물렀던 몸이 따끈한 황태 국물에 스르르 녹아내렸다. (28차, 대관령 - 소황병산 - 진고개)
오늘의 산행은 백두대간에서 지리산 종주 코스를 제외하고 가장 긴 29.1킬로미터의 여정이었다. 몸 상태가 염려되어 두세 번 뒤척이다가 새벽 2시에 잠에서 깼다. 오전 8시 10분,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에 있는 댓재에 도착했다.
해발 810미터의 댓재는 바람이 불고 해가 중천에 떠 있었지만,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2개월 만의 산행에 나선 나에게 여러 사람이 몸 상태를 묻고, 바쁜 일이 끝났는지 관심을 보였다. 댓재 표지석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동안 선두는 이미 산으로 들어갔고, 후미에 있던 사람들은 서둘러 뒤따랐다.
오늘의 산행 인원은 스물네 명이었다. 댓재에서 두타산으로 향했다. 산은 기슭에서 몇 발짝 걷자마자 가파른 오르막으로 이어졌다. 숨이 차오르고 목덜미가 뻐근해졌다. 동해안에 강한 바람이 불 것이라는 일기예보는 정확했다. 땀이 바람에 날렸다.
산에는 연분홍빛 철쭉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며 피는 꽃>이 떠올랐다. 뒤에서 따라오던 합천댁은 "흔들리지 않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라는 시구가 가장 가슴에 와닿는다고 했다. 애칭이 여왕벌인 클럽 여성 총무님은 "젖지 않는 삶이 어디 있으랴"라는 구절이 좋다고 했다.
산 벗들끼리는 애칭을 사용했다. 경조사 때도 애칭을 쓰다 보니, 조사(弔事)를 당한 산 벗 가족의 장례식장에서 조상(弔喪)한 사람들이 부의 봉투에 '저승사자'라는 애칭을 적어 민망한 웃음이 터진 적도 있었다.
나에게도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이 있지만, 나는 '새벽'이라는 이름을 좋아한다. 어둠이 물러가고 밝음이 밀려오는 새벽의 기운이 좋아서, 그렇게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새벽'이라는 애칭을 지었다.
3주 후 강원도 강릉에서 인천광역시 강화까지 308킬로미터 울트라마라톤에 도전하는 안산 백두대간 클럽 여성 총무 송옥순(가명) 여사가 떠올랐다. 나는 2년 전 그녀와 중랑천 50킬로미터 울트라마라톤에서 완주했었다. 그런데 그녀는 올해 100킬로미터 울트라마라톤 대회에서 완주하더니 이번에는 64시간 동안 308킬로미터를 달리겠다고 한다. 늦게 배운 도둑이 더 무섭다는 말이 있듯, 나보다 늦게 마라톤을 시작했지만, 이제는 울트라마라톤에 흠뻑 빠져 있다. 그녀에게 마라톤은 무엇일까? 왜 그토록 달리는 것일까?
내가 42.195킬로미터를 완주한 횟수는 32회다. 지난해에는 열두 번 완주했다. 사람들은 나에게 묻는다. "왜 힘들게 살아!" 소파에 누워 리모컨을 들고 있는 사람들의 눈에는 주말마다 마라톤을 완주하고 백두대간 산행을 하는 나와 이장신 선생이 미쳤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 선생이 내 이야기를 들으며 옆에서 실실 웃는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의 저자 무라카미 하루키는 매일 10킬로미터를 달리고, 100킬로미터 울트라마라톤을 완주하면서 '적어도 걷지는 않았다'라는 묘비명을 남기겠다고 했다. 2010년 아프리카 부룬디에서 한국으로 귀화한 김창남은 “한국에 와서 사람들을 사귀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게 한 것은 마라톤이다. 달리고 또 달리는 것이 인생이다.”라고 말했다.
산과 같이 길도 나에게 멘토다. 길을 걷고 달리다 보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어서 매력을 느낀다. 이 선생은 산악마라톤에 관심이 있다며 지리산 화대(화엄사에서 대원사까지) 구간을 달려보고 싶다고 한다. 내 옆에 있는 이판사판 님과 꼬깨비 님은 산을 좋아한다. 마라톤에 도전해도 충분히 잘할 것이라고 추켜세워도 그들은 달리기를 싫어하고 오직 산이 좋다고 한다. 특히, 이판사판 님은 몇 달 전에 내가 백두대간 산행을 제안했을 때, 올랐다가 내려오는 산을 왜, 타느냐고 되물었는데 이제는 산에 푹 빠져 있다.
나는 공직을 떠나기 전에 풀코스 101번 완주를 목표로 했지만, 요즘으로 봐서는 이루기 어려울 것 같았다. 산 벗들은 여왕벌 님을 마녀라고 불렀다. 풀잎 님은 오랜만에 합류한 나에게 자주 말을 걸며 자신을 산녀라고 불러 달라고 했다. 그녀는 백두대간 종주 산행과 함께 한북정맥을 동시에 타고 있었다.
댓재에서 출발한 지 1시간 만에 3.6킬로미터를 걸어 두타산에 도착했다. 우리는 쉬지 않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땀이 등산화로 떨어졌다. 해가 질 때까지 백복령에 도착하려면 견뎌내야 했다. 두타산 정상은 해발 1,353미터로, 정상은 어중간한 곳에 있었고 그 옆에는 무덤이 있었다. 3.7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청옥산이 보였다. 그곳으로 가는 길은 비교적 쉬웠다. 백두대간 길은 인적이 드물어 고즈넉했다.
태백산맥에서 갈라져 나온 해안산맥에 솟아있는 청옥산 정상도 두타산 정상처럼 밋밋했다. 해발 1,403.9미터의 청옥산 정상은 푸른 옥돌(청옥석) 때문에 그렇게 불린다고 했다. 시장기가 몰려와 청옥산 헬기장에서 자리를 펴고 상추쌈으로 점심을 먹었다.
고적대로 향하는 길은 표지판이 분명하지 않았다. 고적대는 동해시, 삼척시, 정선군의 분수령으로, 신라의 고승 의상대사가 수행했던 곳이라고 한다. 해동 삼봉이라고 부르는 두타, 청옥, 고적은 불교와 깊은 연관이 있는 산임이 틀림없다.
이기령 가는 내리막길은 편안했다. 해발 970.3미터의 상월산을 오르고 원방재로 내려섰다. 종점인 백복령까지 7.1킬로미터가 남았는데 다리가 후들거렸다. 백복령에 도착하여 마실 막걸리를 생각하며 힘을 냈다.
해발 959미터의 사름봉을 넘으니 또 다른 봉우리가 보였다. 소백산 옆 신의터재에서 갈령삼거리까지 23킬로미터를 오르락내리락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오늘은 그때보다 6킬로미터가 더 길다. 29차 산행을 하면서 쉬운 구간은 없었지만, 오늘은 특히 힘들었다.
저 멀리 눈에 익숙한 표지석이 보였다. 해발 810미터의 백복령이다. 삼척시에서 시작해 강릉시 옥계면에 도착했다. 거리가 길다고 걱정하며 오지 않았다면 후회했을 것이다.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오후 6시 25분이었다. 10시간 10분 동안 머물렀던 산은 뭔가를 이루려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해발 810미터의 백복령에서 텐트를 치고 밥을 준비하는 부부는 행복해 보였다. 택시 안에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마이클 샌델의 책이 보였다. 하버드대학교의 마이클 샌델 교수는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정의를 '미덕을 키우고 공동선을 고민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는 받아야 할 사람이 받지 못하고, 받지 말아야 할 사람이 받는 일이 많다. 정의가 질서보다 우선시되어야 함에도, 우리 사회는 질서를 정의보다 중요시하고 있다. (29차, 댓재 - 두타산 - 백복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