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재로 향하는 승용차에 탄 다섯 명의 웃음소리에 차마저도 웃는 듯했다. 지난 6월 4일, 댓재에서 백복령까지의 산행에서 ‘합천댁’이라고 불렀던 여성의 본명은 유영*였다. 그녀는 머리 아픈 것은 질색이라며 '유영'이라는 애칭을 스스로 지었다고 했다. 내 애칭 '새벽'이나, 다른 여성 '안다미로의 의미와 비교하면 독특하고 흥미로웠다.
김정녕 회장과 김철은 대장은 유영 님의 머리가 단단하다며 우리를 웃게 했다. 그녀는 백두대간을 알지 못한 채, 눈이 많이 내린 겨울에 속리산 구간을 아이젠 없이 오른 경험담을 들려주면서 포기하지 않고 백두대간을 걷는 지금이 고맙고 행복하다고 말했다.
많은 사람이 백두대간 종주를 시도하지만, 실제로 완주하는 사람은 드물다. 자기 의지도 중요하지만, 몸이 아프거나 직장 생활 등으로 인해 종주를 이어가기 어렵기 때문이다. 종주를 중단한 사람들은 보충 산행으로 그 아쉬움을 달래곤 한다. 오늘의 산행도 그런 보충 산행이었다. 김 회장은 발목 부상으로 백복령에서 삽답령 구간을, 나는 항공전 행사 때문에 지난 5월 7일 피재에서 댓재 구간을 놓쳐 오늘 함께하게 되었다.
오전 9시 20분, 김 회장 일행은 안다미로 님과 나를 피재에 내려놓고 백복령으로 향했다. 우리는 각자의 길을 걸으며 오후 5시쯤 댓재에서 만나기로 했다. 해발 920미터의 피재는 지난해 12월 4일에는 을씨년스러웠지만, 지금은 아카시아 향기로 가득했다. 삼수령이라고 부르는 피재는 한강, 낙동강, 오십천의 발원지이자, 백두대간 낙동정맥의 분기점이기도 하다.
오늘의 산행 거리는 26.1킬로미터로, 피재에서 건의령을 거쳐 덕항산에 오른 후 황장산을 지나 댓재로 내려가는 코스였다. 산에는 나와 안다미로 님 둘 뿐이었다. 피재에서 건의령까지는 6.4킬로미터였고, 그 길은 고요하고 부드러운 구릉으로 이어져 있었다. 안다미로 님은 큰아들이 올해 1월에 입대해 수색 부대에 배치되었다며, 훈련병 시절에는 걱정이 많았지만, 이제는 잘 적응해서 고맙다고 했다.
오늘은 내 아들이 군대에서 맞는 두 번째 생일이었다. 아내는 아들을 군대에 보내놓고 안절부절못했으며, 천안함과 연평도 사건 때에는 뉴스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내년 1월이면 전역이라니, 시간이 참 빠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아들이 대견하고 고마웠다.
1시간 30분 만에 건의령에 도착한 우리는 푯대봉으로 향했다. 안다미로 님은 숨이 차고 갈증이 심해 자주 멈추고 물을 마셨다. 해발 1,009.2미터의 푯대봉에 도착한 시간은 11시 20분이었다. 우리는 푯대봉 표지석을 배경으로 인증사진을 찍고 구부시령으로 길을 잡았다.
그러나 리본이 보이지 않았다. 숲속으로 이어진 길을 20여 분 동안 내려갔지만, 리본이 보이지 않아 '알바(길을 잘못 든 것)'를 의심했다. 지도를 펼쳐보니 푯대봉에서 급경사 표시가 있었고, 우리가 내려가는 길은 바로 그 급경사였으며 저 멀리 화전을 일군 곳이 보였다. 김 회장에게 전화했지만, 그는 확실하게 답하지 못했다. 안산에서 피재로 가는 길에 안다미로 님은 '안다미로'가 그릇에 담은 것이 넘치도록 많다는 뜻이라고 알려주었다. 나는 '안다미로'와는 달리, 잔에 술이 넘치지 않게 한다는 '계영배'를 떠올렸다. 계영배는 잔에 술이 넘치지 않게 하는 도구로, 과유불급의 교훈을 담고 있다. 오래전 읽은 최인호의 소설 『상도』에 나오는 계영배는 욕심을 경계하라는 메시지를 주었지만, 나는 때때로 욕심을 부리곤 했다. 산은 나에게 지나침을 경계하라는 메시지를 늘 되새기게 한다.
산세를 살펴보니, 백두대간 길로 되돌아가기에 너무 많이 내려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 멀리 화전이 보였고, 저곳으로 가면 대간 길을 다시 만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전으로 내려가는 길은 가파르고 잡목이 발을 잡았지만, 결국 우리는 가축이 없는 휑한 삼밭골 목장을 통해 산으로 들어섰다.
내 판단이 맞다면, 20여 분 정도면 대간 길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늘재에서 바람티까지 한 구간 전체를 알바하여 백악산에 오른 적도 있고, 대관령과 진고개 구간에서 3시간을 알바한 경험도 있다. 안다미로 님 또한 2주 전 청옥산에서 알바한 경험이 있어 오늘의 알바를 비교적 편안하게 받아들였다. 우리는 산에서뿐만 아니라 삶에서도 수없이 엉뚱한 길로 들어섰다가 제 길을 찾아가곤 한다. 엉뚱한 길로 갔다가 한없이 그 길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거나 좌절해 주저앉지만 않으면 된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안다미로 님의 멘토는 누구인가요?” 그녀는 “엄마요!”라고 답했다.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엄마를 떠올린다고 했다. 신경숙의 장편소설 『엄마를 부탁해』가 떠올랐다. 나는 그 책을 읽고 ‘세상에서 가장 짧고 아름다운 기도, 엄마.’라는 글을 남긴 적이 있었다. 내 멘토는 산과 길, 그리고 책이다. 사람마다 저마다 마음속에 멘토가 있다.
산 중턱에 들어서자, 구부시령 5.4킬로미터라는 안내판과 리본이 보였다. 우리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편안한 길이 이어져 있었다. 우리가 내려왔던 비탈길이 눈앞에 펼쳐졌다. 삼밭골 목장에서 50여 분 걸었다. 우리는 웃으며 그곳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1시간 정도 알바했지만, 견딜 만한 경험이었다. 알바하고 제 길을 찾느라 참았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바람이 잘 부는 능선에 오붓하게 자리를 펴고 식사를 시작했다. 걷기 위해서는 먹어야 한다.
구부시령(九夫侍領)은 태백 하사미의 외나무골에서 삼척 도계읍 한내리로 넘어가는 고개다. 옛날 한내리에 여인이 살았는데, 서방만 얻으면 죽어서 아홉 명의 서방을 모셨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기구한 팔자다. 오후 2시 45분, 물 한 모금 들이켜고 덕항산으로 향했다. 땀으로 몸은 끈적거렸다. 헉헉 거친 숨소리를 내며 올라선 곳에 해발 1,071미터 덕항산 표지석이 보였다. 안다미로 님은 표지석을 만지며 “어머! 쓰러지려고 해요.”라고 했다. 어쩌면 그녀 자신의 몸 상태를 말하는 것 같았다.
오후 3시가 지났지만,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었다. 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배낭을 짊어졌다. 그녀는 산에 오를 때 근심, 두려움, 설움, 미움 등 온갖 속세의 잡념을 배낭에 짊어지고 와서는 산에서 내려갈 때는 모두 비우고 가라고 했다. 그런데 도시락까지 비우고 2,000미터l 생수를 다 마셨는데도 내 배낭은 여전히 무겁기만 하다. 이제는 남은 내 삶을 위해 마음도 비워내야겠다고 생각해 본다.
해발 1,080미터의 환선봉(幻仙峰)에 도착한 시간은 3시 40분이었다. 길은 여러 산악회가 걸어간 흔적이 뒤섞여 있었다. 오전에 알바했던 터라 우리는 신중하게 헬기장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저 멀리 고랭지 배추밭이 보였다. 그곳은 광동댐 이주민들이 조성한 귀네미마을이었다. 해발 1,000미터 되는 곳에 배추밭이라니, 청풍 댐 수몰지구 이주민들의 실향 아픔과 삶을 이어가기 위한 차마고도가 떠올랐다.
시멘트 길을 따라 올라가니, 고랭지 배추를 운송하기 위한 길이 조성되고 있었다. 숲속에 큰재로 가는 길이 보였다. 새소리가 맑게 들렸다. “새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걸까요?” 안다미로 님이 나에게 물었다. “오후 5시가 넘어섰으니, 하루를 마무리하며 수다를 떠는 게 아닐까요?" 나는 답했다. 그녀는 "그럴지도 모르겠네요.”라고 말했다. 몸은 지쳤을지 모르나 목소리는 여전히 맑았다.
해도 지쳤는지 산허리에 매달려 있었다. 황장산에 가는 길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었다. 참나무와 전나무가 하늘로 치솟아 있었다. 6시 30분에 황장산에 도착했다. 김 회장에게 전화하니 그들은 3분이면 댓재에 도착한다고 했다. 우리는 15분이면 도착할 수 있으니, 시간을 잘 맞췄다며, 안다미로 님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취나물을 씻는 유영과 삼겹살을 굽기 위해 준비하는 김정녕 회장, 우리를 향해 "수고했다"며 달려오는 김철은 대장이 그리도 좋아 보일 수가 없었다. 안다미로 님의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가 가득했다.
(30차, 피재 - 황장산 - 댓재)
지난 5월, 비를 맞으며 내려섰던 진고개 대피소가 보인다. 주변에는 손가락 한 마디만큼 자란 고랭지 채소가 비탈진 곳에서 자라고 있었다. 비가 오면 땅이 질어진다고 해서 ‘진고개’라는 이름이 붙은 이곳은 강릉시 연곡면 삼산리와 평창군 대관령면 병내리에 걸쳐 있으며, 동대산과 노인봉 사이에 있는 해발 1,072미터의 고개다. 오늘은 하늘이 쾌청하다.
산은 오르기 시작하자마자 가팔랐다. "오늘 죽었다!" 나는 신음을 내뱉었다. 오늘 산행 거리는 23.5킬로미터로, 더운 날씨에 쉽지 않은 거리였지만, 최근 26킬로미터와 29킬로미터 산행을 했던 터라 얕잡아 보았다. 게다가 어제저녁 직원들과 족구하고 늦게까지 막걸리를 마셔서 아직도 술 냄새가 났다.
어제 무리해서 그런지 몸은 힘들었지만, 기분은 상쾌했다. 다리 골절로 한동안 함께하지 못했던 미소 님은 모처럼의 산행이 힘든지 숨이 차서 뒤로 처졌다. 내 뒤를 따라오던 유영 님은 쉴 새 없이 말을 걸었다. 내가 낭송하는 시를 듣고는 에어컨 같다고 했다. 과잉 칭찬이다.
풀잎 님은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는 노래 아세요?"라고 물었다. 엄홍길 산악 대장과 히말라야에 오르던 가수 이문세 님이 고산지대에서 기타를 치며 불렀던 노래였다. 그들은 산소 부족으로 힘들었을 텐데 손뼉 치며 노래하던 모습이 정말 행복해 보였다.
그 다큐멘터리를 본 후 나는 그 노래를 즐겨 부른다. 행복은 내 마음가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시인 폴 발레리가 말하길, '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라고 했다. 이는 나를 다스리는 격언이다.
나는 산 벗들과 행복을 이야기하며 산길을 걸었다. 세상살이가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많은 사람이 노후 준비에 관심이 많았다. 노후 관리는 재정적인 사항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은퇴 후 재무 부문은 기본이고, 가족, 건강, 인간관계, 취미 생활도 노후에 행복의 중요한 요소이다. 고령화사회로 넘어가는 시점에 나는 정년퇴직까지 무엇을 어떻게 준비하고 이후 삶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행복을 느끼며 살 수 있을까?
40여 분을 걸으니, 온몸에 땀이 흥건하다. 1.7킬로미터를 걸어 해발 1,433미터의 동대산에 도착했다. 다리가 후들거렸고 숨이 가빴다. 오늘 산행에는 스물다섯 명이 함께했는데, 열 명은 앞으로 내달렸고, 일고여덟 명은 내 뒤로 처졌다.
6.7킬로미터 떨어진 두로봉으로 가는 길은 비법정 등산로였지만 다행히 능선길이었다. 나는 숨이 고르게 되자 이장신 선생에게 물었다. "요즘 무슨 책 읽고 계세요?" 그는 "『한강』을 읽고 있어요."라고 답했다. 그는 내가 추천한 조정래 소설가의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을 이어서 읽고 있었다.
돌이켜보니 책은 나를 변화시켰다. 십수 년 전, 친구가 선물한 스펜서 존슨의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라는 책이 생각난다. 스니프 등 네 마리의 생쥐를 의인화한 이 책은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발 빠르게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않고 안주하면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후 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책을 읽었다. 산행을 떠날 때도, 여행을 떠날 때도 책을 들고 다녔다. 책을 읽는 것은 좋은 습관이다. 링컨 대통령은 『원칙의 힘』에서 “독서에 재미를 붙이면 선인들이 탐구했던 수많은 지식을 직접 볼 수 있다. 책은 어려운 문제들을 성공적으로 해결할 지혜와 능력을 갖추게 한다.”라며 독서의 습관화를 강조했다.
최진 대통령 리더십 연구소장이 쓴 『대통령의 독서법』은 대한민국 대통령들의 독서 습관을 엮은 책이다.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고 김대중 대통령의 정독파 관찰 독서법이다. “세상을 멀고 깊게 내다보게 만드는 역사의식이야말로 삶을 진지하게 살도록 유도하는 길잡이다. 좋은 문학작품은 메말라가는 정서를 새롭게 하고 우리의 정신에 환기와 탄력을 주는 윤활유 역할을 한다.”라고 강조한 부분이 인상 깊다. 고 노무현 대통령은 “비판적 시각을 갖되 균형 감각을 잃지 말라”라며 자기만의 시간 관리법을 개발했던 다독파의 비판 독서법을 소개했다.
책을 읽으면서 대통령들의 국정 철학이 독서와 매우 연관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앞으로도 책 읽기를 게을리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며 해발 1,421미터의 두로봉에 올랐다. 뒤따라오던 유영 님이 “바다다!”라고 외쳤다. 그녀는 초록색 옷을 입은 산에 내려앉은 안개를 보며 바다 같지 않으냐고 했다.
두로봉에서 응복산으로 가는 8.15킬로미터 길은 잡목이 우거졌고, 아름드리나무들이 벼락 맞아 쓰러지고 바람에 뽑혀서 길을 막고 있었다. 능선은 멧돼지가 파놓아 너저분했다. 먹을 것이 없어 나무뿌리를 파먹은 흔적이 이어져 있었다. 사람들에게도 흔적이 있다. 내 흔적도 나중에 그대로 남을 것이다. 그 흔적이 너저분하면 못 견딜 일이다.
응복산으로 가는 길 중간에 해발 1,281미터의 만월봉이 있었다. 200년 전, 어느 시인이 이 봉우리를 바라보며 시를 읊었는데, 바다에 솟은 달이 산에 비쳐 만월이 가득했다고 전해진다. 해발 1,359미터의 응복산 정상은 밋밋했다.
이곳에서 6.8킬로미터 떨어진 구룡령까지는 몇 개의 봉우리를 더 오르내려야 한다. 응복산에서 4.8킬로미터 떨어진 약수산을 헤아려보니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었다. 이장신 선생은 저 멀리 우뚝 솟아오른 산이 약수산이라고 했다. 나는 파김치가 된 몸으로 “거기까지 가려면 한나절은 가야 할 것 같은데,”라고 말했다. 오른쪽에 삐쭉 솟은 산에서 능선을 타고 왼쪽으로 한참 가서 보니, 정말로 이 선생이 이야기한 약수산이었다.
나는 산 정상으로 오르는 곳에서 주저앉았다. 종아리가 땅겼다. “정상에 가서 쉬시죠.” 이 선생이 재촉했다. 나는 일어섰지만, 몇 번을 더 주저앉았다. 그렇게 올라선 곳은 해발 1,306미터의 약수산 정상이다. 산새 소리가 맑았다. 나는 지친 몸을 일으키며 외쳤다. “약수산 신령이시여! 나에게 힘과 용기와 지혜를 주소서.” 구룡령까지는 1.9킬로미터 남아 있었다.
해발 1,031미터라고 쓰인 구룡령 표지석이 보였다. 구룡령은 아홉 마리 용이 기상을 보이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설악산과 오대산을 가로지르는 고개에는 양양군과 홍천군 분수령 표지판이 서 있었다. 오후 5시였지만, 해는 쨍쨍했다. 땀이 엉겨 붙은 몸에 계곡물을 뿌리니 정신이 맑아졌다. 9시간의 산행으로 몸은 힘들었지만, 나는 오늘도 수많은 봉우리를 오르내렸다. (31차, 진고개 - 구룡령 - 동대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