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2시에 한계령 휴게소에 도착했을 때, 도시와는 다른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오늘은 절기 칠석이고, 모레는 입추다. 절기는 속일 수 없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다. 어제까지 더웠는데 입추를 앞두고 선선한 바람이 불고 하늘에는 별이 가득했다.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정취였다.
오늘은 무박 산행이다. 1구간인 지리산을 종주했을 때 무박으로 산행했으니, 2년 8개월 되었다. 무박 산행은 어둠 속에서 산에 오르니, 하늘에 떠 있는 별을 헤아리는 즐거움이 있었다. 한계령을 들머리로 하여 조침령을 날머리로 하는 23.9킬로미터 산행에 나선 서른한 명은 몇 번 길을 헤매다가 제 길을 찾아 기슭으로 들어섰다. 한계령 바위를 오르는 십이당 계곡 갈림길에서 또다시 길을 잃었다.
한계령 대피소에서 중청봉에 오르는 길과는 달리 이곳 백두대간의 한계령 구간은 바위로 이어져 있었다. 오늘은 선두 그룹에서 걷고 있는데 어둠이 앞에 깔려서 길 찾기가 힘겹다. 조금 앞서가다 보면 후미에서 “선두 천천히!”라고 외쳤다. 나는 늘 후미에 있었으니, 오늘 후미에서 걷는 산 벗들의 심정을 알 수 있었다.
선두들은 제 길을 잡기 위해 길을 기웃거렸다. 어둠 속에서는 선두에 서고 싶은 생각이 없다. 가끔 갈림길이나 어둠 속에서 바위에 오를 때는 그런 생각이 저절로 든다. 내 잘못된 판단으로 어둠 속에서 전원이 잘못된 길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앞서 있던 김정녕 회장이 잘못 들어선 길에 서 있다가 우리에게로 빠른 걸음으로 달려왔다.
어느 조직이나 단체에서 리더는 중요하다. 리더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소통이 원활하게 되거나 그렇지 않을 수 있으며, 그 조직이 역동적인지 아닌지도 결정된다. 김홍신 작가는 『내 인생의 사용 설명서 두 번째 이야기』에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실패한 지도자나 참모에게는 반대파와 비판자를 포용하지 못했다는 공통된 특징이 있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한 “성공한 사람은 정열적이고 좋은 습관을 지녔으며, 목표 의식이 뚜렷한 사람이다.”라고 설명했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내가 쓴 백두대간 산행기를 읽은 사람들은 나에게 왜 힘들고 어렵게 사느냐고 묻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 삶이니까.” 하면서 가슴을 내밀었다. 내 삶에서 겁나고 두려운 시기가 없었다면, 목적의식이 지금처럼 단단하게 여물지는 못했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1시간 30여 분을 오르내리며 차츰 날이 밝아지자 길이 보였다. 산죽이 허벅지를 채찍질했다. 하늘로 머리채를 산발한 산죽 때문에 땅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발을 헛디디면 넘어지고 자칫하면 발목을 상할 수 있어 조심해야 한다.
올해는 유난히 비가 잦은 것 같다. 농사를 망친 농민들의 근심이 하늘을 덮었다. 재해를 당한 사람들의 한숨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일본 시인 시바타 도요가 쓴 <약해지지 마!>가 떠올랐다. 어렵더라도 삶을 포기하거나 희망을 잃지 말자.
동쪽에서 붉은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이름 모를 산새들이 살아가는 숨소리를 내었다. 녹음이 짙어진 나뭇잎이 기지개를 켰다. 모두 발걸음을 서두르자고 했다. 산의 정상에서 일출을 맞이하고 싶어서였다. 산의 머리는 바위로 둘러싸여 있었다.
해발 1,236미터의 망대암산에 오른 시간은 5시 30분이었다. 어둠 속을 뚫고 한계령에서 망대암산까지 5.65킬로미터를 2시간 50분 만에 올랐다. 황금 복숭아 씨앗이 구름 사이를 비집고 하늘에서 커지고 있었다. 모두 "와!"하는 감탄사를 자아냈다. 장관이다.
늘 선두에 서 있는 박도성 산 벗과 몇몇이 나에게 오늘 대체 웬일이냐고 묻는다. 매번 후미에 있던 내가 선두와 함께 산의 정상을 올랐으니 말이다. 나는 선두의 기를 받아 오른 것 같다며 웃었다.
앞에 다른 산이 우뚝 서 있었다. 점봉산이었다. 이곳은 비법정 산행로이다. 우리는 이곳을 오르기 위해 새벽부터 서두른 것이다. 산에서 산으로 오르는 1.4킬로미터 숲은 편안했다. 해발 1,424미터에 올랐다. 2000년 제1회 아름다운 숲으로 선정된 점봉산은 편안했다. 백두대간 산행을 하면서 정상에서 단체로 처음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앞에는 설악산이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서 있었다. 우뚝 서 있는 대청봉이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것 같았다. 다른 한쪽은 구름바다였다. 이제는 오전 8시 전에 4.5킬로미터 떨어진 단목령에 도착해야 한다. 통제구역이기 때문이다. 날이 밝아지자, 선두들의 발걸음은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내달렸다.
나는 얼마 전에 백두산을 등반했던 김정녕 회장에게 물었다. "비 맞으며 백두산 등정하느라고 힘들었죠?" 그는 웃으며 "좋았어요. 그런데 일주일에 두세 번씩 백두산 길을 안내하는 조선족이 따라오지 못하고 주저앉으며 뭐 이런 사람들이 다 있냐고 혀를 내둘렀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다른 팀들은 9시간 걸리는 코스를 5시간에 내달렸으니, 보지 않아도 그 모습이 눈에 선했다.
산길은 멧돼지가 파놓아서 너저분했다. 녀석들이 인기척을 듣고 급히 도망쳤는지 물기 묻은 땅이 뽀송했다. 먹을 것이 없어서 나무뿌리까지 파헤친 것이다. 나는 대간 길을 걸으면서 산토끼만을 보았는데 지난 7월 김래홍 대장이 구룡령 구간을 선두로 걷다가 멧돼지와 맞닥뜨렸다고 했다. 그는 겁에 질렸었다며 이제는 혼자 산을 내달리지 않겠다고 한다.
정상에서 해발 856미터의 단목령까지 내려오는 길은 막힘이 없었다. 전나무가 하늘로 쭉쭉 뻗어 있었다. 숲의 냄새가 상큼했다. 공기가 맑았다. 콧노래가 저절로 나왔다. 매미 울음이 요란했다. 녀석들은 7년 이상 땅속에 갇혀 있다가 보름 정도 세상에 살다가는 생을 아낌없이 다 쓰고 가겠다고 울어 대는 것 같았다. 매미 울음을 들으면서 내 삶을 아낌없이 불살라야겠다고 생각해 본다.
오전 8시 전에 단목령에 도착한 우리는 여유를 부리며 대피소 앞에서 호기를 부렸다. 백두 대장군과 여장군 장승이 인간들의 행동을 못 본 체하려는 듯이 비켜서 있었다. 시장기가 몰려왔다. 급히 시간 내에 도착만을 생각하며 잊었는데 어느새 아침 먹을 시간이었다. 계곡에서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먼저 내려온 산 벗들이 희희낙락했다. 오리고기가 나왔고, 풋고추도 나왔다.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쉬는 동안, 선두 그룹은 3.1킬로미터 떨어진 북암령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여전히 후미였다. 그러나 십여 명이 함께 걷는 것이니 괜찮다. 조침령까지는 아직도 7.25킬로미터를 더 걸어야 했다. 오르고 내리는 길이 이어졌다. 땀이 등짝에서 끈적거렸다. 다행히 가끔 능선으로 바람이 불어와서 쉴 수 있었다. 늦어도 12시 이전에는 조침령에 도착할 것으로 생각하니 산행은 여유롭다.
해발 770미터의 조침령에 도착한 시간은 11시 50분이었다. 조침령에는 구룡령에서 온 길과 맞닿은 길이 보였다. 모처럼 햇빛이 날카롭다. 산에서 내려온 물이 계곡에 가득 넘쳐흘렀다. 등줄기에 눌어붙었던 땀이 벗겨지면서 한 소리한다. "어이, 시원하다!" (32차, 한계령 - 점봉산 - 조침령)
삶은 자기 가치를 깨달아가는 과정이다. 우리는 각자의 존재와 능력을 알아가며 그 속에서 의미를 찾는다. 나는 이러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 미시령에서 한계령에 이르는 긴 여정을 떠난다. 백두대간 종주 서른세 번째 산행이었다.
가평휴게소를 지나 설악휴게소에 도착했을 때, 별이 반짝이던 가평과 달리 설악휴게소의 하늘은 구름으로 덮여 있었다. 새벽 2시 40분, 해발 767미터의 미시령에 도착했을 때, 속초 시가지의 야경이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어둠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미시령의 기슭은 이방인의 발걸음을 경계하듯 가파르게 우리를 맞이했다. 준비되지 않은 몸은 금세 거친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헤드랜턴 불빛에 놀란 풀벌레와 나방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오늘은 백두대간 종주 중 세 번째 무박 산행으로 미시령을 시작으로 황철봉, 저항령, 마등령을 지나 공룡능선을 타고 희운각 대피소로 내려선 후, 다시 소청봉, 중청봉, 끝청봉을 거쳐 한계령에 이르는 23.73킬로미터의 여정이다.
설악산은 한반도 남쪽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 중 하나다. 주봉인 대청봉은 해발 1,708미터로, 음력 8월 한가위에 내린 눈이 하지에 이르러서야 녹는다고 한다. 1970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산은 속초시, 인제군, 양양군에 걸쳐 있다. 그동안 나는 가을 단풍이 물드는 천불동계곡에서 대청봉에 오르거나, 오색과 한계령에서 대청봉에 올라 백담사로 내려오곤 했다.
작년에 한계령에서 시작해 공룡능선을 타면서 미시령 구간이 통제되어 마등령에서 아쉬워하며 신흥사로 내려왔던 구간을 드디어 산행하게 되었다. 설악산에는 오르내리는 길이 많지만, 백두대간 구간 중 가장 난코스인 이곳은 법정로가 아니므로 산을 타는 사람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지리산 종주 산행 이후 가장 많은 마흔두 명으로 다른 클럽에서 백두대간을 종주하다가 이곳을 산행하지 못한 사람들도 함께했다.
30분쯤 올랐을 때 너덜지대가 이어졌다. 어둠이 짙어 길을 알 수 없고, 바위 사이로 발이 빠지면 몸이 상할 수 있으므로 모두 긴장했다. 안산 백두대간 클럽 이외에도 대전에서 온 클럽과 삼삼오라는 또 다른 클럽이 뒤섞여 있었다. 그들은 마등령에 오른 후 신흥사가 있는 소공원으로 내려가는 계획이었는데, 한계령으로 내려가는 우리를 특공대라고 불렀다. 우리는 그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너덜지대에서는 두 손과 두 발을 바위에 붙여 기어갔다.
문득 두 팔과 두 다리가 없이 태어난 세르비아 태생의 오스트레일리아인 닉 부이치치가 떠올랐다. 그는 두 팔이 없어도 수영하고 윈드서핑을 즐기며, 두 다리가 없어도 스노보드를 타는 장애인이었다. 그의 자서전 『한계를 껴안다, 닉 부이치치의 허그』 표지에 밝게 웃고 있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팔다리가 없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하는 상상을 해 보았다.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이 떠올랐다. 닉 부이치치도 유아기에서 성장기로, 청소년기로 접어들면서 자살을 생각했다고 한다. 그는 같은 또래들로부터 외면과 놀림을 받았다. 지금은 부모가 돌봐주고 있지만, 부모가 세상을 떠나면 어떻게 옷을 입고 세수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고 한다.
정상적인 신체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걱정거리가 아닌 삶의 소소한 부분도 닉에게는 절망이었다. 그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가치를 깨닫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는 넘어졌을 때 스스로 일어나는 법을 배웠고, 스스로 옷을 입고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방법을 익혔다. 두 팔 없이 스마트폰을 귀에 대고 이야기하는 것은 상상조차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닉은 얼굴과 어깨에 멍이 들도록 시도하여 방법을 터득했다.
그는 전문 강사가 되어 살아온 과정을 전 세계를 돌며 마음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전달하며 굳은 의지를 가지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확고한 목표를 세우고 소망과 믿음, 자존감, 긍정적인 마음가짐, 용기, 다시 일어서는 의지, 적응력, 그리고 좋은 관계까지 잘 챙겨 두었다면 가만히 앉아서 좋은 일이 생기길 기다릴 필요가 없다. 실 한 가닥 한 가닥을 다 긁어모았다면 타고 올라갈 밧줄을 만들면 된다. 남은 일은 큰 용기와 단호한 결심으로 무장하고 위로 올라가는 것뿐이다.”
나는 그가 말하는 모든 것에 고개를 끄덕였다. 닉 부이치치가 절망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긍정적인 마음과 믿음, 소망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황철봉을 오르면서 내 삶을 되돌아보며 그가 전하는 메시지를 되새겼다.
산행 중의 힘든 순간들 속에서도 이러한 깨달음을 얻으며, 자기 가치를 깨닫고 인생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깊이 느끼게 되었다. 오늘의 산행은 그 과정의 중요한 한 걸음이었으며, 앞으로의 삶에서도 그 가치를 잊지 않고 살아가려고 한다.
이곳이 황철봉이다, 아니다 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해발 1,381미터의 황철봉에는 삼각점이 땅에 박혀 있었다. 저항령으로 내려가는 길을 찾던 산 벗들이 다시 돌아오며 길이 없다고 했다. 다른 쪽으로 갔던 사람들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황철봉에서 저항령으로 가는 길은 사방이 어두운 가운데 고난을 상징하는 듯했다. 어둠 속에서 길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야광 표지와 노끈 줄이 희미한 길을 안내해 주었다.
법정로가 아닌 이 길은 국립공원 측의 안전사고 방지를 위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찾는 곳이었다. 안전을 위해 설정된 경로를 무시하고 위험을 감수하며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태도는 불편하지만, 국립공원이 신경 쓰는 안전 문제의 중요성도 느낄 수 있었다.
저항령으로 내려가는 길은 오른 만큼 내려서야 한다는 말을 실감케 하는 구간이었다. 내리막이 지나면 다시 오르막이 나타나고, 너덜지대와 바람, 안개가 계속해서 도전 과제를 제시했다. 여성들은 강한 바람에 “몸이 날아갈 것 같아요”라며 어려움을 호소했지만, 우리는 이러한 난관을 극복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저항령에서 구절초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동시에 우리의 역경을 상기시켰다. 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8,000미터 이상 14좌를 등반한 엄홍길 대장은 “사람은 최선을 다해 산을 오르고 신이 잠시 허락해 주면, 그때 정상을 밟는다”라고 말했다. 나는 저항령에서 백두대간 신령님과 설악산 신령님께 힘과 용기, 지혜를 달라고 기원했다. 이러한 기도는 나의 의지를 북돋우는 중요한 과정이었다.
다시 너덜지대가 나타났다. 돌 부스러기를 쌓아 놓은 무더기였다. 마등령은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비가 흩날리더니 빗방울이 굵어졌다. 산 아래에서 바람이 구름을 밀어 올리자, 능선은 구름바다로 뒤덮였다
5시간을 걸어 마침내 해발 1,327미터에 있는 마등령에 도착했다. 함께한 산 벗들은 아침밥을 먹기 위해 작은 나무 밑에 자리를 폈지만, 나무가 너무 작아 비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빗물이 도시락에 떨어지기도 했지만, 5시간 동안 쉬지 못한 터라 좁은 자리라도 마련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여겼다. 뒤따라오던 사람들은 계속해서 내 앞을 지나 5.1킬로미터 앞에 있는 희운각 대피소로 향했다.
공룡능선은 그 모습이 마치 공룡의 등처럼 생겼다고들 한다. 그러나 안개가 짙게 끼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바위를 오르내려야 했기 때문에 밧줄이 많이 설치되어 있었고, 비는 끊임없이 내렸다. 그야말로 우중 산행이었다. 백두대간 종주 첫날 지리산 종주와 우등령에서도 비를 맞은 경험이 있었다. 비가 오는 날에는 우의를 입어야 하고, 안경을 쓴 사람들은 시야가 가려져 불편하다. 하지만 비 덕분에 생각할 시간이 많아지는 것은 좋은 점이다.
산을 오르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설악산에서, 공룡능선에서 나는 여전히 나 자신과 내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걸었다. 이 여정이 나에게 더 깊은 깨달음을 주리라 믿는다.
공룡능선의 기암괴석이 내 발길을 멈추게 했다. 안개 때문에 멀리 있는 풍경은 보이지 않았지만, 가까이 있는 기암괴석의 자태는 훤히 볼 수 있었다.
바위로 이어진 길은 빗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앞서가던 산 벗들은 보이지 않았고, 뒤따라오던 이들도 따라오지 않았다. 비가 쏟아지는 데도 많은 사람이 희운각에서 공룡능선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수고하십니다", "안산 하세요" 같은 인사말로 서로를 격려했다.
너덜지대를 지나오다가 접질린 오른쪽 발목이 시큰거렸다. 마등령에서 출발한 지 2시간 30여 분 만에 희운각에 도착했다. 먼저 도착한 이판사판 님이 사과를 먹으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나는 사과를 한입 베어 물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몸은 파김치가 된 상태였다.
앞으로 10킬로미터를 더 가야 하는데 발목이 시큰거리고 졸음이 몰려왔다. 이곳에서 소공원으로 내려가는 비선대까지는 3.5킬로미터였다. 소공원으로 내려갈지를 고민했다. 계곡은 계속 나를 유혹했다. 너무 힘들어서 이대로 포기해야 하나 싶었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희운각 대피소에서 소청봉까지의 1.3킬로미터는 철 난간과 나무 계단으로 이어진 가파른 길이었다. 비는 더욱 세차게 내렸다. 나는 멈추지 않고 소청봉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가끔 비가 그치고 잠시 햇빛이 비치더니, 또다시 비가 흩날리곤 했다. 산을 오르는 동안 내 다리는 더욱 강해졌다. 2002년 달리기를 시작했을 때, 나는 평지에서는 느렸지만, 오르막에서는 늘 앞서 달리던 사람들을 따라잡곤 했다.
우리는 바위와 돌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 과정에서 우리의 의지와 신념이 끊임없이 시험받는 듯했다. 이런 산행은 마치 삶의 여정과도 같았다. 각자가 자신의 길을 걸으며 자신의 가치를 발견해 가는 과정은 삶의 중요한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산행을 통해 나는 자기 가치를 깨달아 가는 여정이 곧 삶 그 자체임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희운각 대피소에서 50여 분 동안 올라서니 소청봉이 보였다. 비와 땀에 젖은 몸이 끈적거렸다. 대청봉으로 향하는 안내판이 보였지만, 먼저 도착한 선두들을 오래 기다리게 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었다. 어느새 내 발은 대청봉 오르는 길목을 지나 끝청봉을 향하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지리산에서 이곳 설악산까지 오면서 줄곧 후미에 있었다. 선두들의 따뜻한 격려와 이판사판 님과 이장신 선생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지 못했을 것이다.
중청봉에서 한계령까지 7.7킬로미터는 서북 능선이다. 줄기차게 내리던 비가 잠시 주춤거렸다. 그동안 한계령에서 끝청봉에 오른 것은 두 번 있었다. 모두 무박 산행으로 왔었다. 끝청에는 산이 깨어나던 시간에 왔었고, 점차 내려가며 만나는 한계령은 어둠 속에서 올랐던 터라 오늘 산의 모습이 낯설었다. 다행히 비는 그쳤지만, 바위는 여전히 이어져 있었다. 온종일 바위를 밟아서인지 무릎이 아팠다.
12시간 동안 걸은 몸이 안쓰러웠는지, 한계령을 1시간 정도 앞두고 산신령께서 기암괴석들을 보여주었다. 안개가 빠른 속도로 이동하면서 하나의 장관이 펼쳐졌다. 우리는 오후 4시 20분, 한계령에 도착하여 "와!"하는 감탄사로 피로를 날려버렸다.
이번 여정은 특별했다. 지난 3년간의 산행을 되돌아보며, 내가 걸어온 길과 앞으로 걸어갈 길을 생각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나는 내 가치를 더욱 깊이 깨달았다. 삶의 의미는 이러한 여정 속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닐지 생각해 본다. (33차, 미시령 - 한계령 - 설악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