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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경호 Aug 03. 2024

나의 하늘을 보자

오늘은 백두대간 3구간을 타는 날이다. 여원재를 들머리로 하여 고남산에 오르고, 사치재를 날머리로 하는 13.77킬로미터의 산행이다. 백두대간 690킬로미터를 35구간으로 나누어 진행하는 종주 산행을 고려하면 오늘 산행은 비교적 편안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5시간의 산행을 얕잡아서 그랬을까. 고된 삶에 괴로워하며 며칠 동안 음주하고, 어제 늦은 시간까지 여럿이 어울려 흐느적거렸다. 아무리 낮은 산이라도 그러면 안 된다는 가르침을 잊고 있었다. 어둠이 도시를 휘감고 있던 새벽 5시 10분, 안산을 떠나 8시에 함양휴게소 한쪽에 서서 누룽지 밥을 한 수저 뜨고 여원재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9시. 시산제를 지내는 모두가 경건했다.    

 

산악인의 선서

산악인은 무궁한 세계를 탐색한다.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정열과 협동으로 온갖 고난을 극복할 뿐 언제나 절망도 포기도 없다. 산악인은 대자연에 동화되어야 한다. 아무런 속임도 꾸밈도 없이 다만 자유와 평화 사랑의 참 세계를 향한 행진이 있을 따름이다. ‘언제나 절망도 포기도 없다!’라는 산악인의 선서가 산에 울려 퍼졌고, 내 머리는 파문을 일으켰다.     

미국의 금융위기로 인해 우리 실물 경제가 급격히 어려움을 겪고 있다. 기업체들은 조업을 단축하고, 노동자들은 거리로 내몰리고 있다. 10만 개의 일자리가 없어지고, 하루에 1만여 자영업소가 문을 닫고 있다고 한다. 내년에는 마이너스 경제 성장이 예상된다고 했다. 미국의 시장 경제 체제에 의한 신자유주의로 인해 양극화 현상은 더욱 심화하고, 삶이 피폐하고 팍팍해지며 절망한 사람들이 좌절하여 목숨을 버리고 있다.     

빈민 구제 활동을 하는 한비야는 에세이 『바람의 딸 우리 땅에 서다』에서 “좌절이란 꺾어 주저앉는다는 말인데, 누구에게 꺾인다는 말이며, 무엇이 나를 주저앉힌다는 말인가. 내 인생의 주인은 바로 나인데 말이다. 희망을 버리지 말자.”라고 이야기했다. 너도나도 힘들다고 한다. 그러나 절대로 삶을 포기하지 말고 이겨내야 한다. 한비야의 말이 귓가를 맴돈다. 힘들 때는 나의 하늘을 보자. 하늘이 파랗다.     

3구간을 시작하는 여원재는 소나무가 끝없이 펼쳐졌다. 며칠 동안 고단했던 심신을 추스르기로 했다. 2구간에 함께 걸었던 여성 총무의 애칭은 여왕벌이었다. 그녀는 나에게 말을 걸었다. “저는 소나무를 보면 기분이 좋아지고 마음이 푸근해져요.” 나는 건성으로 “예.”라고 말했다. 그녀는 내가 건성으로 대답하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는지 이야기를 이어갔다. “어릴 때는 솔잎을 긁어서 땔감으로 썼었는데.” 그랬다. 60~70년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삶을 살았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삶이 팍팍했을까?     

친정아버지께 안부 전화를 하는 여왕벌 님의 목소리가 숲처럼 맑았다. “아버지, 건강하시죠. 저, 지리산에 왔어요. 산의 정기 많이 받아서 건강하고 돈 많이 벌게요.” 누런 솔잎이 깔린 토종 소나무 숲 산행이라 그런지 모두 느긋하게 걷고 있었다. 저 멀리 고남산이 우뚝 서 있고, KT 송수신 탑도 보였다. 가끔 방심하지 말라는 듯 바위가 나타났다. 그러나 모두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훌쩍 뛰어넘어 산 정상으로 올라갔다.     

“저기가 우리 집이었어야.”라며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중년의 손가락 지시봉을 쫓아 또 다른 중년이 손부채를 하며 눈 렌즈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남원의 산자락을 살피고 있었다. 우리 일행 중 여성들은 짓궂게 그들을 훼방 놓았다. “아저씨, 웬 귤이 그렇게 많아요? 우리 배고픈데 귤 좀 주시면 안 되나요?” 옛날 고향 집을 찾던 이들은 귤 몇 개만을 덜고 백두대간을 종주 산행하는 우리에게 자루 채 넘겨주었다. 산에 오면 사람들의 인심이 넉넉해진다.     

장자가 말했던가. “산은 악하지도, 절대 선하지도 않다”라고. 그런데 우리는 말없이 묵묵히 있는 산을 찾아서 산에서 배우지 못하고, 산에서 내려갔다가 또 산에 오르기를 반복하고 있다. 드디어 해발 846.4미터의 고남산 정상에 올랐다. 봄 날씨다. 등산복을 벗었다. 땀이 등짝을 타고 흘렀다. 이제는 다시 산에서 내려갔다가 사치재로 오르내려야 한다.     

“세 마리 용 모두 나와요!”라는 여왕벌 님의 말에 남성과 여성이 고남산 표석에서 포즈를 취했다. 용 세 마리는 동갑내기 용띠(생)를 말했다. 러시아에서 한국으로 귀화한 박노자 오슬로 대학교수는 『당신들의 대한민국』이라는 책에서 한국 사람들은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제일 먼저 묻는 것이 나이라고 했다. 그러고는 나보다 나이가 적으면 바로 말을 낮춘다고 했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스승으로 삼을 만한 사람들도 있을 터인데 우리는 외적으로 평가하고 너무 숫자에 연연해하는 것은 아닐까.     

고남산 능선을 타고 산에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솔잎으로 덮여있는 산은 부드러웠다. 백두대간 종주 산행을 하는 ‘안산 등산클럽’ 사람들의 이력은 다양하다. 산악 마라톤대회 입상자도 있고, 마라톤 풀코스 SUB-4 완주자도 여럿 있다. 애칭도 ‘여왕벌’, ‘풀잎’, ‘미소’, ‘바람따라’, ‘산두리’, ‘맨발’ 등 다양하다. 맨발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등산화를 신지 않고 수암봉을 오른다고 해서 ‘맨발’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지난 2월에 함께 산행하지 못했던 2구간 중 일부인 노치마을부터 수정봉까지 구간을 혼자 걷고 있다. 그런데 출발한 지 2시간이 채 되지 않았는데, 3시간 걸리는 여원재까지 왔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백두대간, 아무나 하나~ ♪♬” 하며 노래를 불렀다.     

걷기에 푹신한 솔잎을 한 꺼풀 벗겨내고 도시락을 꺼냈다. 계란말이가 나왔고, 버섯 무침 나물도 나왔다. 그동안 새벽 일찍 일어나 주섬주섬 밑반찬을 챙기는 남편을 아랑곳하지 않던 아내가 반찬을 챙겨준 도시락이었다. 현실에 힘겨워하는 남편을 안쓰럽게 생각해서였을까?     

앞서 있던 일행이 털썩 주저앉아 발목을 만지고 있었다. 솔잎이 덮어진 평평하지 않은 땅을 잘못 내디뎌 발목을 삔 것 같다고 했다. 산에서 급히 서두르다 보면 산을 보지도 느끼지도 못할뿐더러 상처를 입기 십상이다. 오래 가려거든 자기 속도로 가라고 했다.     

고남산에서 하산하니 시멘트로 포장된 인도가 산을 따라 길을 만들어 놓았다. 백두대간 길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인도를 따라 오르내리며 여러 산악회의 리본들이 길을 안내해 주었다. 산행 중 가끔 엉뚱한 길에 새고, 결국 제 길을 찾아내는 일도 있었다. 산꾼들은 잘못된 길로 가서 시간과 체력을 낭비하는 것을 ‘알바’라고 했다. 그러고는 서로 웃으면서 물어본다. “어이, 맨발 님, 오늘 알바했지?” 그러나 도전이 없었다면, 실패도 없었을 것으로 생각하니 알바했다는 것이 부끄럽거나 조롱하는 것은 아닌 듯싶다.     

발걸음이 느린 나에게는 백두대간 종주 산행이 여유가 없었다. 온종일 일행을 쫓아가며 길을 잃었고, 결국 일행과 합류할 수 있었다. 전북 남원시 운봉읍에 있는 매요마을은 농사철이 다가오고 있는 시점이었다. 한 농부가 텃밭에서 쪽파를 가꾸고 있었고, 이는 생명과 희망을 상징하는 장면이었다.     

교회와 보건소가 있는 조용한 매요마을에서 다시 산길을 찾아가니, 장수군이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이는 오늘의 종착지인 사치재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사치재에 도착하니 88고속도로가 펼쳐져 있었고, 사치재와 복성이재까지 안내하는 표지판이 있었다. 한옥이 아름답게 세워진 조용한 마을이었는데 정부의 융자로 지어진 부락이었다.     

명칭의 유래와는 달리 사치마을이라는 어감은 듣기에 거슬렸다. 이 마을은 옛 이름이 모른재였다고 하며, 그 이름은 왜놈들이 침입했을 때와 한국전쟁 중에도 숨어 있어서 주민들이 동네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여원재에서 출발한 일행보다 3시간 늦게 노치마을에서 출발한 맨발 님은 사치재에 도착한 후, 배낭에 메어놓았던 재킷이 떨어진 것을 모르고 걷다가 재킷을 찾으려고 4킬로미터를 더 걸었다고 투덜거렸다. 우리는 웃으면서 “그 따위로 하려거든 백두대간 탄다고 말하지 마소”라고 하면서도 수고 했다는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다음 산행은 사치재에서 새맥이재, 시리봉, 복성이재, 봉화산에 오르내리고 중재까지 이어지는 19.55킬로미터 산행이다.(3차, 여원재 - 고남산 - 사치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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