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산행은 성삼재에서 시작하여 만복대, 정령치, 고리봉을 지나 노치마을을 거쳐 수정봉에 오른 후 여원재에서 마무리하는 20.5킬로미터의 코스이다. 새벽 5시 10분에 안산을 출발하여 지리산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9시 30분이었다. 성삼재로 가는 861번 지방도로는 제설 작업이 되지 않은 빙판길이었고, 차량이 통제되어 만복대로 오르는 길까지 5킬로미터를 걸어야 했다.
백두대간 종주를 마치는 울주산악회 열두 명이 축하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지리산 천왕봉에서 북진하여 설악산 진부령을 마지막으로 하는 우리와 달리, 그들은 진부령에서 남진하여 오늘 지리산에서 마지막을 장식한다고 했다. 우리는 그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축하한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도계 쉼터가 을씨년스럽게 문을 닫고 있었고, '하늘 아래 첫 동네'라는 심원마을의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 산행은 8시간 이상이 걸릴 예정이었고, 해가 지기 전에 산행을 마쳐야 했기 때문에 발길을 서둘러야 했다.
1시간 이상 걸어 올라간 곳에는 만복대 표지판이 보였다. 하늘은 맑고, 초봄의 날씨로 인해 두터운 등산복이 필요 없을 정도였다. 저 멀리 노고단이 우뚝 서 있었다. 작은 고리봉에 올라가니 남원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시계가 선명하여 멀리 무등산도 보였다. 뒤따라 올라온 일행 중 한 명이 "우리 친정집이 보이네."라며 젖은 목소리를 냈다.
묘봉치로 가는 산길에서는 산죽(山竹)이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허리를 매만졌다. 1구간 산행 당시 내린 눈이 등산화를 덮었고, 아이젠을 착용하지 않은 이들은 종종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만복대로 오르는 5.3킬로미터는 길었다. 눈길이었으면 좋았겠지만, 햇볕이 내리쬐는 진흙 바닥이었다.
억새가 거센 바람을 이겨내며 하늘거리는 해발 1,438.4미터의 만복대에 도착했다. 만인에게 복을 주는 곳인지, 만 가지 복을 받는 곳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산은 우리 조상들의 애환을 간직하며 전라남도, 전라북도, 경상남도를 굽어보고 있었다. 지리산을 무대로 한 『태백산맥』 등 수많은 문학작품이 떠올랐다.
최명희의 장편소설 『혼불』이 조선말부터 일제강점기까지 한민족의 애환을 그렸다면, 박경리의 『토지』는 일제에 저항하며 목숨을 잇는 슬픔과 광복을 맞이하는 기쁨을 조명했다. 산은 그런 존재였다. 그래서 나도 힘들 때마다 산을 찾는 것 같다.
산은 수많은 봉우리와 재, 령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매년 한 해를 보내며 느끼고 각오를 다지는 일이지만, 나는 애년(艾年)을 앞둔 시기에 주어진 삶을 제대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해 본다. 정령치가 어디냐는 주위의 물음에 "저기 앞에 임도 보이죠, 바로 앞이 정령치예요."라고 사람들은 편하게 이야기했지만, 2킬로미터는 결코 짧은 거리가 아니었다. 정령치 휴게소로 내려가는 길은 눈으로 덮여 있었다.
식탁에 앉아 여럿이 도시락을 펼치고 라면을 끓였다. 이곳에는 식수가 없어 미리 챙기지 않았다면 뜨거운 국물을 먹지 못했을 것이다. 2주 전 눈보라로 눈을 뜨지 못하게 했던 천왕봉이 하얀 눈옷을 입고 저 멀리 서 있었다. 따뜻한 차를 마시고 급히 발길을 옮겼다. 백두대간 종주는 여유롭지 않았다.
해발 1,305미터의 고기봉까지는 계속 오르막이었다. 몇 해 전, 지리산을 종주했을 때 장터목에서 석양을 보며 언젠가 저 봉우리를 오르겠다고 마음먹었는데, 드디어 고기봉에 올랐다.
선두는 이미 고기리 삼거리에 도착해 있었다. 탈출을 원하는 후미 일행을 위해 정령치에서 버스가 기다린다고 했는데, 차량이 통제되어 고기리 삼거리에 정차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여성 일행이 아직도 만복대도 오르지 못했다고 한다. 고기리 삼거리로 내려가는 산길에도 발목까지 눈이 덮여 있었다. 이곳에는 지리산 종주 구간에서 자주 보았던 주목은 보이지 않고 굴참나무와 전나무,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다.
멀리 세걸산이 보인다. 이제는 아스팔트 도로를 1킬로미터 걸어 노치마을을 가로질러 수정봉에 오르고 여원재로 내려가야 한다. 배낭에서 무거운 물품을 도로 옆 대기하는 버스에 비우니 어깨가 가벼워졌다. 삶도 그러하겠지만, 우리는 살면서 무거운 것을 비워내지 못한다. 양말을 갈아 신으니 한결 몸이 가벼워졌다.
애칭(닉네임)이 ‘바람따라 님’은 앞선 일행을 따라잡으려면 달리자고 한다. 여성 총무는 등산화를 신고 배낭을 짊어졌는데도 잘 달렸다. 바람따라 님은 나와 그녀가 마라톤을 즐기는 마스터스라는 것을 알고 나서 “내가 미쳤지” 하며 달리기를 포기해 우리를 웃게 했다.
노치마을 표지판이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었다. 백두대간 종주 산행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백두대간 지도가 마을회관 옆에 세워져 있었다. 노치샘물은 생명수처럼 느껴졌다. 한 그릇 떠서 마시니 살 것 같았다. 여원재까지는 6.7킬로미터. 오후 6시 30분쯤 산행을 마무리하려면 서둘러야 했다.
수정봉으로 오르는 기슭에는 족히 200년은 된 소나무가 서 있었다. 그곳에는 제단이 있었다. 수많은 사람이 이곳에서 빌고 빌었을 것이다. 아들이 아이를 갖게 해달라고 비는 노모의 모습과 아들의 병을 고쳐 달라고 눈물 흘리는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니 가슴이 저민다. 소나무는 노치마을의 당산나무다.
산으로 오르는 곳 묘지 한쪽에 담요와 비닐로 몸을 두르고 앉아 있는 사람이 보였다. 옛날 조상들은 부모가 세상을 뜨면 묘지 옆에 움막을 짓고 그곳에서 3년 동안 지내는 풍습이 있었다. 움막이 없는 것을 보니 시묘살이는 아닌 것 같았다. 가까이 갈 수 있는 처지가 아니라서 그를 잘 볼 수는 없었지만, 그의 모습이 마음에 남는다. 송 총무는 이를 그리움이라 했다.
뒷동산 정도로 생각한 수정봉은 급경사는 아니었지만, 계속된 오르막이라 땀이 비 오듯 했다. 여성 총무와 함께 산행과 마라톤, 신변잡기를 이야기하며 걷는 시간은 여유로웠다. 먼저 출발했던 일행을 능선에서 만났다. 지난 1구간 때 내 뒤에서 밥을 먹지 못하고 쫓아왔던 이들이다. 뉘엿뉘엿 해가 산 아래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장관이다. 붉은 기운이 남원 시내를 물들이고 있었다.
해발 804.7미터의 수정봉에 올랐다. "단군이시여! 한민족이여! 백두대간 산신령이시여! 힘과 용기와 지혜를 주소서" 내 목소리가 산자락을 휘돌아 메아리쳐 왔다. 어둠은 산에 빨리 찾아들었다. 앞에 번쩍이는 불빛을 보니 선두 대장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도 후미였지만, 포기하지 않았기에 그 자체로 기쁨이었다.
초승달이 산하를 밝히고 별빛이 빛나는 여원재에 동학혁명 유적지 백두대간 표지석이 서 있었다. 1894년 갑오년에 이곳 백두대간을 경계로 농민군과 수성군이 대치하며 전투를 벌였다고 한다. 표지석에는 모두가 나라와 겨레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사건으로 그 정신을 계승하고 영원한 평화와 상생을 다짐하자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각자의 성격을 구분 짓고 있지만, 엄밀히 이야기하면 갑오농민전쟁이 맞을 것이다. 농민전쟁은 조선 후기 이래 정치적, 제도적 개혁 부재와 계속된 정쟁으로 민생 문제가 소홀해졌고, 만연한 부정부패가 시발점이 되었을 것이다. 강화도 조약 이후 열강들의 침략에 대해 계속된 집권층의 타협과 굴복, 외세에 의존적인 형태는 반봉건, 반외세의 성격으로 나타나 결국 농민전쟁이 일어났던 것은 아닐까 한다.
짱뚱어 국물이 맛있다며 하산 주를 따라 주는 여성 총무의 손길이 따뜻하다. 전날부터 잠을 자지 못하고 43,000보를 걸어 발목과 무릎이 시큰거리며 피곤했지만, 노치마을 뒷산 묘지에서 보았던 모습이 창밖 어둠 속에 아른거려 잠이 오지 않는다. 송 총무 말대로 그리움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애틋함일 것이다.
(2차, 성삼재 - 여원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