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루떡과 돼지머리를 가운데 놓고 양옆에서 촛불이 흔들렸다. 산자락에서 계곡으로 부는 바람이 양초를 쓰러뜨렸지만, 불은 꺼지지 않았다. 여러 사람이 절을 했다. 몇몇 부부도 무릎을 꿇었다. 경남 산청 중산리에서 백두대간 종주 안전 산행 고사를 끝냈지만, 사위는 어둠이 낮게 깔려 있었다. 앉을 곳이 마땅치 않아 서서 순두부와 밥 한 덩어리를 허겁지겁 먹고 국립공원 지리산으로 들어섰다.
1967년 국립공원 1호로 지정된 지리산은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도에 걸쳐 있으며 한반도 남쪽에서 백두대간을 시작하는 시발점이다. 지리산은 우리 민족의 애환을 지니며 민중들과 함께 숨 쉬어 왔다. 사람들은 지리산을 어머니 같은 산이라고 했다. 나에게도 그랬다. 삶이 피폐해질 때면 고향에 홀로 계신 어머니를 찾아뵙듯, 나는 네 번이나 지리산을 종주하며 삶의 힘든 시간을 이겨냈었다.
그러나 오늘은 백두대간 종주 산행을 시작하는 날이라 마음가짐이 다르다. 백두대간 종주에 참여한 서른여섯 명은 산에 들어서기 전에 각자의 심경을 나눴다. "며칠 잠을 설치고 어제저녁에는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어요." "한반도의 산줄기를 걷는다는 것이 얼마나 설레었는지 몰라요." 나 또한 조정래의 장편소설 『태백산맥』을 읽고 지리산을 종주하였으며, 백두대간 종주 산행을 앞두고 과연 내가 해낼 수 있을지 걱정했지만, 내 국토를 걷는 도전에 설렜다.
산에 오르기 전에 배낭 속을 점검했다. 가벼운 물품은 밑으로, 먼저 사용할 것은 위로, 열량을 보충하기 위해 자주 먹어야 하는 초콜릿은 주머니에 넣었다. 무박으로 지리산행을 준비한 배낭은 무거웠다. 산행을 위해 배낭을 꾸릴 때마다 나의 삶도 가지런히 정리된 여행 가방 같아야 한다고 생각하곤 한다. 이 세상 소풍을 끝낸 후 후대들과 나를 아는 이들에게 반듯한 사람으로 남고 싶다. 그래서 중년에 나를 찾아 떠나는 이번 여행은 의미가 크다.
새벽 4시, 지리산국립공원 중산리 분소 직원은 일출 2시간 전부터 입산할 수 있다며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산악회장이 실랑이하는 사이 몇몇이 어둠을 헤치고 산으로 들어갔다. 발걸음이 느린 내가 정식 입산 시간을 기다리면 오늘 산행이 무척 힘들 것 같았다.
나 역시 눈을 피해 어둠 속을 헤쳐 나갔다. 누군가가 나에게 삶은 무한 경쟁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나는 오늘 공정하고 정당하지 못한 경쟁을 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 편법을 행하고 있었다. 세상을 눈치 있게 살아야 한다는 여럿과 발걸음이 느린 여성들 몇몇이 어둠 속을 헤쳐 나갔다. 중산리 계곡에서 바람이 울부짖으며 휘몰아쳤고, 칠흑 같은 어둠이 몸을 움츠리게 했다.
오늘 산행은 천왕봉에서 시작하여 성삼재까지 25.9킬로미터 지리산 종주 구간이다. 중산리에서 천왕봉까지는 5.4킬로미터, 그러니까 오늘 산행 거리는 총 31.3킬로미터이다. 바위로 이어진 산길을 30여 분 오르니 땀이 머리에서 흘러 등줄기를 흥건히 적셨다. 2.4킬로미터를 오른 곳에 망 바위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산자락을 흘깃 보니 불빛 행렬이 반짝이며 이어졌다. 어둠이 발걸음을 붙잡아 앞서기를 꺼리게 했다. 뒷사람들은 내가 잘못 든 길로 갔다가 되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내 뒤를 따랐다. 희미한 보안등이 보였다. 불빛은 어둠 속에 갇혀 있던 나를 안도하게 했다.
로터리 대피소에는 천왕봉에 오르려는 서넛이 버너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대피소 가까운 곳에 있는 범계사는 이 시간의 움직임을 모르고 있는 듯 고요했다. 초승달이 가끔 구름 사이로 황금빛을 비추다 숨기를 반복했다. 제석봉에서 천왕봉으로 향하는 길목에 통천문(通天門)이 있다면, 법계사에서 천왕봉에 오르는 길에는 개선문이 있었다. 바위와 바위 사이에는 녹지 않은 잔설이 빙판을 만들어 놓았다. 서둘러 아이젠을 착용하고 오른 곳에 천왕샘이 있었다. 암벽 밑에서 솟아오르는 샘은 경남의 식수인 남강의 발원지라고 했다. 목구멍을 타고 온몸을 적시는 샘물은 생명수였다.
이제 천왕봉까지는 0.6킬로미터,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지만, 자연은 닳고 닳은 이기심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듯 거세게 저항했다. 초승달이 자취를 감추고, 흩날리던 빗방울이 진눈깨비가 되어 바람을 몰아쳐 얼굴을 때렸다. 안경에 서리가 끼어 앞이 보이지 않아 발을 옮길 때마다 온몸이 긴장되었다.
오전 7시 15분, 드디어 해발 1,915미터의 지리산 천왕봉에 올랐다. 아직 어둠이 물러가지 않았다. 비록 진눈깨비가 휘몰아쳐 앞을 볼 수 없었지만, 우뚝 솟아 부챗살같이 펼쳐진 수많은 산을 굽어보고 있는 표지석에는 '한국인의 기상, 이곳에서 발원되다'라고 쓰여 있었다.
산의 가장 높은 곳에 서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며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한민족이여! 단군이시여! 용기와 힘을 주소서! 지혜를 주소서!" 울부짖는 목소리가 하늘을 갈랐다. 드디어 백두대간 종주 산행이 시작되었다.
백두대간은 백두산부터 지리산까지 1,625킬로미터로 이어진 한반도의 거대한 산줄기를 말한다. 그러나 이념과 외세로 인해 한반도가 두 동강이 나서 북쪽으로는 갈 수 없어 내가 걸을 수 있는 남쪽의 지리산 천왕봉부터 최북단 진부령까지 690킬로미터를 서른다섯 구간으로 나누었다. 삶의 시간을 쪼개어 3년 동안 접하게 될 백두대간, 나는 과연 왜, 무엇 때문에 대간을 종주하려는 것일까.
2003년, 땅끝 마을 해남에서부터 민족의 한이 서린 임진각까지 국토를 종단하면서 언젠가 시간이 허락되면 백두대간을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시간은 의외로 빨리 다가왔다. 나는 그 시간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숙명이고 나의 의지였다. 그 길은 분명 힘들 것이다. 그러나 고사를 지낼 때 초가 쓰러졌지만, 촛불이 꺼지지 않았던 것처럼 나는 이겨낼 것이다.
일출 시각에 맞추어 천왕봉으로 올라오는 사람들의 거친 숨소리가 내 가슴을 뜨겁게 했다. 그들의 숨소리는 살아 있었다. 천왕봉에서 장터목까지는 1.7킬로미터. 통천문을 지나 장터목 대피소로 내려가는 길은 어둠을 깨우고 있었다. 여명이 나를 침잠하게 한다.
산을 찾은 사람들은 진눈깨비 옷을 입은 바위들이 미끄러워 발을 뗄 때마다 쩔쩔매면서도 서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나눴다. "반갑습니다. 안전하게 산행하세요." 오르는 사람들을 위해 내려오는 사람들은 여유롭게 기다려 주었고, 그렇게 오른 사람들은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했다. 산은 사람들의 마음을 넉넉하게 했다.
제석봉에는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는 주목이 초록빛을 띤 채 서 있었고, 이에 맞서 허옇게 옷을 벗은 채로 서 있는 주목도 보였다. 저 주목은 무슨 원한으로 반세기가 훌쩍 넘었는데도 눈을 부릅뜨고 있는 것일까. 60여 년 전, 쫓고 쫓기는 사람들은 구례, 남원, 하동, 함양 벌판에서 산의 기슭으로, 그리고 산의 최고봉 막다른 곳인 이곳에서 마지막 생명을 묻었을 것이다.
백무동과 중산리 사람들이 서로 필요한 물품을 한 짐씩 지고 와서 교환하던 장터목은 천왕봉에 오르려는 사람들과 내려오는 사람들로 시끌벅적했다. 산에 오르기 전에 먹은 순두부는 4시간 이상의 산행으로 소화되었지만, 준비한 도시락을 이곳에서 먹으면 오후에는 굶어야 하므로 고사를 지낸 후 챙겨둔 시루떡을 베어 물었다. 무겁다며 다른 일행이 놔둔 식수도 챙겼다. 장거리 산행, 특히 겨울철 산행에서는 무엇보다 먹을 것을 잘 챙겨야 한다. 배가 고프면 힘을 낼 수 없고, 몸에 열기가 떨어지면 힘든 산행이 될 수밖에 없다.
영신봉과 촛대봉으로 오가는 사람들은 없었다. 산길은 한적하고 고즈넉했으나 진눈깨비가 앞을 가렸고, 세찬 바람이 몸을 움츠리게 했다. 사람들은 산행하면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본다. 돌이켜보면 산은 나에게 많은 변화를 불러왔다. 건강을 찾게 했고, 사색하게 했다. 이번 백두대간 종주는 그런 일상 외에 한반도의 등줄기를 걸으며 민족을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될 것이다. 남쪽의 따뜻한 바람이 북쪽으로 옮겨가듯이.
장터목에서 세석 대피소까지 3.4킬로미터를 걷는 동안, 진눈깨비가 가랑비로 변했다. 눈길을 걷기 위해 아이젠과 스틱을 사용했다. 이 장비들이 미끄럼 방지 장치가 되어 움직임에 속도를 더할 수 있었다. 세석 대피소에 먼저 도착한 일행들이 라면을 끓이며 소주를 따라 주었다. 추위를 이기기 위해 마신 소주는 몸을 달아오르게 했다. 각자 준비한 반찬을 펼쳐 놓으니 산해진미, 진수성찬이 따로 없었다. 대피소 안으로 들이치는 비는 쉽게 그치지 않을 것 같았다.
낙숫물이 대피소 처마 밑을 타고 가을비처럼 떨어졌다. 함께 온 일행이 비 오는 날 산행하는 것은 무리라며 이곳에서 하산하자고 제안했다. 백두대간 종주가 첫날로 끝나는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나 이 길은 내가 가야 할 길이다. 힘들어도 포기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세석평전에서 벽소령 대피소까지는 6.3킬로미터. 2시간 이상 걸릴 것을 예상하며 물품을 챙겼다. 우의를 꺼내 입고, 바지가 젖는 것을 최소화하기 위해 스패츠를 착용했다. 비가 내려서 질척해진 눈길에서 미끄러지지 않으려면 조심해야 했다.
부부가 함께 산행하는 팀들이 부럽다. 지금쯤 아내는 음식점에서 점심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무척 바쁘게 손과 발을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취업과 대학 진학으로 지친 아이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착잡했다. 삶이 고되다. 그러나 삶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계속 내리는 가랑비가 몸을 지치게 했다. 장갑이 축축하게 젖었다. 배낭 무게를 생각해서 여분을 챙기지 못한 것이 후회되었지만, 어쩔 수 없다. 벽소령 대피소에 먼저 도착한 산악회장과 몇몇 일행이 건네준 라면 국물을 마셨더니 몸이 한결 따뜻해졌다.
벽소령에서 연하천 대피소까지는 3.6킬로미터. 두 개의 큰 바위가 우뚝 버티고 있는 형제봉을 일별하면서 '나의 사과나무'를 생각했다. 삶이 힘들 때 나를 서 있게 하는 나의 사과나무는 '산'이었고, '마라톤'이 더해졌다. 산은 피폐해진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고, 마라톤은 삶에서 꼼수를 부리거나 꾀를 피우지 않도록 나를 채찍질하는 촉매제였다.
다행히 비는 그쳤지만, 발가락이 쓰렸다. 볕이 들어오는 언덕에 앉아 등산화를 벗어보니 둘째 발가락에 손톱만 한 물집이 잡혀 있었다. 양말을 갈아 신으니, 발이 훨씬 편했다. 뒤따라오는 부부는 점심도 못 먹고 허겁지겁 따라오고 있었다. 점심을 먹은 내가 엄살을 부릴 때가 아니다. 힘을 내자.
연하천 대피소가 눈앞에 보였다. 앞서가던 부부 세 팀이 노고단까지 10.4킬로미터 남았다는 안내 표지판을 보며 웅성거리고 있었다. 국립공원 산악 구조대장이 지금 출발하면 성삼재까지 규정 시간 내에 도착하지 못해 벌금 50만 원을 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모두 망설이고 있었다. 안전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야간 산행이 금지된 것이다. 우리는 뒤에 처진 일행과 산악회장에게 연락하여 함양군 마천면으로 산행 계획을 변경했다.
연하천에서 벽소령 대피소 방향으로 되돌아가던 중, 백두대간 종주 길에서 700미터를 되돌아가니 명선봉 근처에 음정으로 가는 표지판이 서 있었다. 오랫동안 종주 등산로만 걸어온 나에게 이 길은 처음이었다.
음정으로 내려가는 2.5킬로미터의 급경사 길은 낯설었다. 혹시 길을 잘못 든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산 밑에서 세 명이 올라오면서 삼정리까지는 2시간 이상 내려가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하산할 때쯤이면 어둠이 깔릴 것이라고 했다. 크고 작은 바위와 나무들이 걸음을 잡았다. 내려가는 것이 오르는 것보다 힘들었다.
삶도 그런 것 같다. 사람들은 안간힘을 다해 옆을 쳐다볼 새 없이 오르기만 한다. 오르는 삶만 중시하고, 내려가는 연습은 하지 않는다. 세상을 더 살아봐야 내려가는 것을 중하게 여기게 되는 것일까? 하산 길은 겸손을 생각하게 한다.
저 멀리 산자락에서 안개와 어둠이 밀려왔다. 산에서는 어둠이 일찍 찾아왔다. 땀이 등에 착 달라붙었지만, 조금도 지체할 수 없었다. 그렇게 1시간 이상 비탈길을 내려왔을까. 음정 마을까지는 아직도 4.1킬로미터 남았다. 십여 명의 발걸음이 어둠 속에서 투덜거리면서도 연하천 대피소로 향한 사람은 몇 명인지, 우리 뒤에는 몇 명이 내려오는지 걱정하고 있었다.
지리산 자락에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방인들의 발소리에 개가 놀랐는지 컹컹 짖었다. 두부와 막걸리를 앞에 놓고 화톳불에 몸을 녹이며 헤아리고 또 헤아려도 스물한 명. 저녁 9시가 되어 뱀사골 옆 음식점에 서른여섯 명이 모두 모였다. 백두대간 종주 신고식을 제대로 치렀다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우리는 다음 구간을 이야기하며 한바탕 웃었다.
지리산의 품에서 여정을 시작한 첫 번째 백두대간 종주 구간은 나에게 많은 깨달음을 주었다. 끝없는 오르막과 내리막, 그리고 험난한 길들은 삶의 여정을 상징했다. 그 여정에서 중요한 것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격려하며 함께하는 것이었다. 하산 후 나누는 대화와 웃음 속에서 나는 이 길의 의미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수많은 구간을 함께할 산 벗들과의 여정이 기대되었다.
(1차 중산리, 천왕봉 -연하천, 음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