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직에 재직하던 시절, 나는 심한 업무 스트레스로 무력감에 빠져 삶의 의욕을 잃었다. 공직 생활을 그만두고 싶었지만, 아내와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을 책임져야 했기에 도망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그 힘든 시기를 견뎌내야만 했다. 정신뿐만 아니라 신체도 피폐해진 나는, 유일한 탈출구로 산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금서였던 장편소설 『태백산맥』을 읽게 되었다. 소설의 배경인 지리산에 오르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내면 깊숙이 억눌려 있던 영혼과의 만남이었다. 산행에 익숙하지 않았던 나는, 먼저 낮은 산부터 오르며 건강을 회복해야 했다. 업무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잦은 음주를 했고 운동을 소홀히 했던 탓에, 허약해진 몸으로 지리산을 오르겠다고 생각했지만, 무리였다. 그래서 계획적이고 체계적으로 산행을 준비했다. 친한 동료들과 함께 낮은 산부터 오르기 시작했고, 점차 높은 산을 오를 정도로 건강을 되찾았다.
2000년, 몇몇 동료와 2박 3일 일정으로 지리산을 종주하던 중, 장터목 대피소에서 바라본 거대한 산줄기가 백두대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백두대간은 백두산부터 지리산까지 이어지는 1,625킬로미터의 산줄기로, 산악인들은 이를 한반도의 등뼈라고 불렀다. 남과 북이 갈라진 한반도에서 내가 걸을 수 있는 구간은 남쪽의 설악산 진부령부터 지리산 천왕봉까지 690킬로미터였다.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것은 단지 체력을 보강하고 자연을 느끼는 것만이 아니었다. 2005년 평화통일 포럼을 알게 되면서 한반도 등뼈를 직접 밟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백두대간 종주 산행은 나의 버킷리스트로 자리 잡았다.
직장 동료들과 산을 오르다 보니,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종주하는 방법은 다양했다. 지역에서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끼리 클럽을 만들어 종주하거나, 전문 여행사에서 회원을 모집하기도 했다. 서너 명이 야간에 산행하거나 비바크하면서 종주하기도 했다. 직장인으로서 백두대간 종주 산행은 쉽지 않았다. 종주 방향도 지리산 천왕봉에서 설악산 진부령으로 북진하기도 하고 설악산에서 지리산으로 남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2008년 어느 날, 3년 동안 한 달에 한 번씩 주말을 이용해 지리산 천왕봉에서 시작하여 백두대간을 종주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가 사는 지역에서 클럽을 만든다는데 지금 시작하지 않으면 영원히 못 할 것 같았다. 등산에 초보자였던 나에게 백두대간 종주 산행은 도전이었다. 산다는 것이 백두대간 종주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나무에 긁히고, 급경사를 오르내리며 암벽 앞에서는 밧줄에 매달리기도 할 것이다. 기온이 적당한 봄과 가을도 있지만, 무더위와 갈증, 추위에 얼은 몸을 이끌며 한 걸음씩 내딛어야만 종주를 완수할 수 있는 일이었다.
시작은 언제나 처음이다. 처음에는 두려움과 서투름이 있지만, 동시에 설렘이 있다. 낯설고 어색하면서도 놀라운 힘을 지닌다. 서투름과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면 항상 제자리지만, 그 너머에는 보람과 감동이 기다리고 있다.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이유는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이는 잘 찾지 않는 산의 매력 때문이지만, 나는 백두대간이 한반도, 한민족의 등뼈라고 생각하며 삶을 느끼기 위해 종주한다. 백두대간 종주 산행이 단지 버킷리스트가 아니라 내 삶의 역사가 되기를 희망했다. 그렇게 2008년 12월, 나의 버킷리스트이자 삶의 역사가 될 백두대간 종주 산행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