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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보너부리 Jun 05. 2023

사랑을 담아, '똥꾸멍 탐정!'

김 여사가 딸을 울렸다. 


우리 가족 중 제일 바쁘신, 원칙적으로 추석 당일과 설 당일에만 쉬는 초울트라 슈퍼 파워 여전히 워킹맘(?)인 60대 중반의 김여사 님과 시간을 보내는 것은 굉장히 어렵다. 


그래도 아이들이 태어나고서는 계절 별로 함께 여행을 가거나,  세 시간 걸리는 우리 집에 아이들을 보러 큰 걸음을 하신다. 오셔서도 아이들 먹일 반찬을 만들거나 맘에 안 드는 우리 집 살림을 본인 마음대로 바꾸시느라 일분 아니 일초를 쉬지 않으시지만. 


일 년에 몇 번 만나지 못하지만, 아이들은 다행히 할머니를 좋아하는 편이다. 나는 엄마라는 단어를 들으면, 마을 앞을 지키는 장승이 떠오른다. 다른 사람에게는 자신을 전혀 내색하지 않으시다가 '어디선가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우리 앞을 가로막고, 모든 걸 다 막아내는 사람.  


본인에게는 한 푼도 쓰지 않으면서 모아둔 큰돈을 아이들 옷을 사라고 내놓는다. 딸아이의 서랍장이나 옷방에 닫아 놓은 이불 가방 사이에 숨겨 놓고 집에 내려가는 길에 전화를 하셔서 통보하신다. 숨바꼭질이 따로 없다. 연애 시절 남편은 내가 전하는 엄마의 일상을 믿을 수 없어, 내가 허언증이 있다고 생각했단다. 일곱 가지 반찬을 한 번에 하고, 여름에 내려온 손자들이 덥다는 소리에 몇 달 전 예약해야 하는, 에어컨 설치를 당일에 가능케 하는 사람. 


하지만 아이들에게는 그냥 뽀글이 할머니이다. 얼마 전 밤 산책을 나간 둘째가 쉼터에 앉아 계신 어르신들을 보며, "우와, 시골 할머니가 많네."라고 말했다. 엄마의 헤어스타일을 설명하니 크게 웃고 넘어가 주셨다.

할머니인 엄마는 아이들과 비슷하다. 여섯 살짜리 딸과 학습지 문제를 풀며, 딸을 추켜 세우고, 두 살짜리 아들과 함께 쭈그려 앉아 몇 십분 동안 개미를 관찰하며 태어나 개미를 처음 본 것처럼 놀라워하신다. 


유일하게 따라잡지 못하는 세계는 미디어의 세계이다. 태어나 영화관을 딱 한 번 가봤다는 엄마는 드라마, 건강 프로그램, 트로트 프로그램만 보신다. 둘리도 강아지라고 부르시는 분이니 딸이 좋아하는 캐릭터의 이름을 알리가 없다. 


7살이던 딸이 가장 좋아하던 프로그램은 엉덩이 탐정이었다. 믿거나 말거나. 아이큐 1104의 천재 탐정이자 고구마를 좋아하는 탐정. 오랜만에 만난 손녀가 예뻐 장난감을 사주고 싶으셨나 보다. 


" 갖고 싶은 거 없냐? 그거 사줄까? 네가 좋아하는 그 , 그 똥꾸멍 탐정!" 


" 엄마! 나 이제 할머니랑 안 놀아! 엉덩이 탐정 보고, 똥구멍 탐정이래!."


딸은 진심으로 화가 났는데, 엄마는 전혀 아무렇지 않다. 아... 엄마!..... 




"할머니가 네가 좋아하는 탐정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정말 대단한 거야. 할머니는 엄마가 좋아하는 가수, 작가, 책.. 이런 거 하나도 몰라. 근데 네가 엉덩이 탐정을 좋아한다는 걸 기억하잖아." 


딸을 위로하려고 한 말인데. 내가 위로받아야 할 것 같다. 


 엄마는 내가 무얼 좋아하는지 잘 모르신다. 딸에게는 '네가 제일 중요하다. 네가 좋아하는 일, 네가 상처받지 않도록 늘 고민하고 선택해야 한다.'라고 잔소리하면서. 그리고 꼭 엄마와 대화하자고 덧붙이면서.



이틀에 한 번은 통화를 했는데, 그동안 무슨 이야기를 한 거지? 


엄마한테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마지막으로 이야기한 게 언제였더라? 스무 살? 


  엄마가 좋아하는 일, 엄마의 취향을 스치듯 물은 적은 많다. 어버이날 선물을 사기 위한 질문이었을 뿐이다.  진심으로 알고 싶어 한 적이..... 없나 보다. 



네 살짜리 아들의 어린이집 생활은 궁금해하면서, 나의 평생 동안 가장 오래 안 지인일 텐데.. 엄마가 인간관계에서 받은 상처를 궁금해한 적도, 그 상처의 극복이 힘들 수도 있다는 것을 걱정해 본 적이 없다. 꿈에 나타나 복권 번호도 안 알려 준다고. 아빠를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책망할 때마다 엄마가 말하던 '망할 놈의 딸년.' 그게 진짜 나였다. 


나도 언젠가는 아이들에게 사랑을 담아 '똥구멍 탐정'을 외치는 날이 올 것이다

(깜박하는 걸 봐서는, 머지않았다). 김여사에게는 심수봉(!) 말고는 외칠 것이 없다. 

안 되겠다. '망할 놈의 딸년.'에게서 벗어나야지.

결국 틀리더라도 나는 엄마의 '똥꾸멍 탐정'을 찾아야겠다. 사! 랑! 을 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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