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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보너부리 Jun 29. 2023

미워하는 일에도 연습이 필요하다

  연신 죄송하다고 되풀이하는 자신의 엄마를 바라보던 아이,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면서도, 한 발자국도 떼지 못하고 엄마의 손을 잡고 버티던, 몇 살은 나보다 어른 그 아이를 보면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용서’에 대해 생각했다.   

   

만약 TV에 나오는 전형적인 나쁜 사람들처럼 보였다면, 거액의 합의금을 던져 주며 아빠의 죽음을 위로라도 했더라면, 드라마 속 주인공들처럼 복수를 꿈꿨을지도 모르겠다. 평생을 미워하기에는 아빠를 죽인 남자의 가족은 작고, 너무도 초라했다. 엄마의 손을 붙잡고 있던 아이도 나처럼 결국 아빠를 잃었다. 꼭 붙잡고 있던 그 손을 미워하기만 할 수는 없었다.     


‘걷고 있는 아빠를 술에 취한 운전자가 차로 치였다.’는 사건에도, 닿아 있고 얽혀 있는, 참 많은 인생들이 존재한다. 흑과 백의 논리만으로는 문제에서 멀리 벗어날 수조차 없다는 진실을 너무 일찍 깨달았다.  그 후로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이 어려웠다.


견고한 편견을 가진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다. 옳다고 생각한 방향으로 일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결국 맞설 수밖에 없는 사람들. 고성이 오가는 상황이었더라도 이상하게 다음날이면 상대를 똑같이 대할 수 있었다.      


연애가 시작되기도 전에 우리 가족의 가난을 지적하며 결혼은 어렵지 않겠냐고 묻던 사람도, 좋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작은 균열이 일어날 때마다, 그럴 수 있다며, 너의 뜻을 존중한다는 핑계로, 많은 인연을 그냥 흘려보냈다. 아빠를 죽인 사람도 미워하기를 포기한 나였다. 타인이 주었던 숱한 상처들은, 그에 비하면 미워할 가치도 없는 하찮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미움받는 일도 그다지 어려워하지 않는 어른으로 자랐다. 사랑하는 사람을 상처 주는 선택을 참 쉽게 했다. 지리해질 것이 예상되는 장애물 앞에서 회피는 가장 쉬운 선택이다. 상대를 향한 존중이라는 가식을 방패 삼아, 용서를 해야 할 상황도, 용서를 구할 상황도 충분히 피하며 살아왔다.      


결국 용서는 아니었다. 미움을 감당하기에 너무 벅차 스스로 사람들에 대한 기대감을 끊어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빠의 죽음은 일종의 배신이었다. 나를 지켜야 할 대상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 내가 용서하지 못한 사람은 꽤 오랫동안 아빠였나 보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용서하는 일에도 연습이 필요한 걸까? 너무 아파서,  미워하는 연습을 시작할 기회도 놓쳤다. 

    

내가 누군가를 미워할 수 있게 된 것은, 결혼을 한 후이다.  벗은 옷을 빨래통에 넣지 않거나, 아침에 일어났을 때 설거지 안 한 냄비가 싱크대에 들어 있을 때, 연락 없이 늦는 남편에게 순간적으로, 유치한 감정이 치밀어 오를 때가 있다. 몇 분, 길어도 만 하루가 가지 않는 미움이지만, 벗어 놓은 양말 한 짝에 사랑하는 사람이 그 순간에는 역적모의라도 한 것처럼 느껴지는 내 마음이 낯설면서도 오히려 웃음이 난다.      


남편에게는 미안하지만, 이 가벼운 미움이 좋다. 때로는 남편에게 화를 내고, 또 사과하면서 나도 자란다. 이제야 내 마음 안 미움을 인정할 수 있는 용기, 그리고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매일 양말 한 짝과 음식물 쓰레기 사이에서 옳게 미워하고, 화해하는 방법을 연습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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