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일주일간 파리를 여행했다. 여행의 인도자는 보들레르(Charles Pierre Baudelaire, 1821~1867)와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1922). 그들과 함께 샤르댕(Jean Siméon Chardin)을 시작으로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 쿠르베(Jean-Désiré Gustave Courbet), 마네(Édouard Manet), 모네(Oscar-Claude Monet)를 거쳐 세잔(Paul Cézanne)까지 이르렀다.
보들레르와 프루스트는 각각 시인이고 소설가이지만, 예술에 대한 관심과 조예도 깊었다. 보들레르는 『악의 꽃』(난다), 『파리의 우울』(문학동네) 외에 「1845년 살롱전」, 「1846년 살롱전」, 「현대 생활의 화가」등의 글을 썼다. 프루스트 역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민음사) 외에 「샤르댕과 렘브란트」, 「화가, 그림자, 모네」 등의 글을 남겼다.
두 명의 인도자를 통해 단테의 여행을 오마주하고 싶었다. 이탈리아 시인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 1265~1321)는 고대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와 첫사랑 베아트리체의 인도로 지옥과 연옥, 천국을 여행했다. 그는 천국에서 베드로를 만나 믿음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이렇게 답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며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이것을 저는 믿음의 본질로 생각합니다.
- 단테, 『신곡』 천국편 24곡 64~66
단테에게 믿음은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었다. 심오한 것들은 세상의 사람들 눈에는 감추어져 있기 마련인데, 그것들은 단지 믿음 안에서 존재한다. 그래서 믿음은 실체다. 믿음은 욕망, 상상력과 더불어 인간의 내면세계를 이루는 기관이다. 욕망은 어떤 것을 꿈꾸게 하고, 상상력은 그것을 눈앞에 그려낸다. 그러면 마지막에 믿음이 그 어떤 것에 실체성을 부여한다. 이 믿음 덕분에 '어떤 것'은 '있는 것'만이 아니라 '있지 않는 것'으로도 존재할 수 있다. '있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이 아니다. 단지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잡히지 않을 뿐이다.
'있지 않는 것'에 실체를 부여하는 것이 믿음이라면, 과연 이 믿음은 대체 무엇일까. 믿음은 단순한 복종이 아니다. 히브리어로 믿음을 뜻하는 단어 에무나(אמונה)는 '지속하다'는 뜻을 지닌 아만(אמן)에서 왔다. 성경에서 모세는 아말렉과의 싸움에서 해가 지도록 손이 내려오지 않게 버텼는데, 이것이 바로 에무나(אמונה)다. 끝까지 버티는 것, 믿음은 그런 것이다.
우리가 기도의 끝에 붙이는 아멘(אָמֵן, 확고하다) 역시 아만(אמן)에서 왔다. 진리를 뜻하는 단어 에메트(אמת)도 그렇다. 그러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보이지 않는 것에 실체를 부여하는 믿음은 우직하게 버티는 것이며, 그것으로 우리는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럼에도, 믿음은 오랫동안 어떤 구금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구금자는 합리성으로 무장한 이성(rationalité)이었다. 이 구금의 역사는 플라톤에서 연유하는데, 그는 믿음과 상상을 억견(doxa)이라는 이름으로 가두고 참된 지식의 하위 범주에 두었다. 근대 이후 믿음의 구금상태는 더욱 굳건해졌지만, 파리의 예술가들은 믿음과 상상을 이성으로부터 탈출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프루스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성에 의해 추상화되고 일반화된 대상에 개별성과 특수성에 부여해 주는 것이 바로 믿음이었다. 그래서 어떤 사물이 영혼을 갖고 그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낼 수 있다면, 그것은 그 사물이 차제적으로 가지고 있는 어떤 성질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 사물에 믿음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믿음은, 지각할 수는 없지만 나를 둘러싸고 있는 공기와 같다. 우리 주위를 빈틈없이 공기가 채우고 있듯이, 내가 외부 대상에 가닿을 수 있고 그 대상을 감각할 수 있다면 그것은 나와 그 대상 사이에 빈틈없는 믿음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의 믿음으로 당신이 존재하고, 그것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사물에 그 자체의 삶이 있다는 믿음과 더불어 오로지 우리만이 우리가 보는 몇몇 사물에 영혼을 불어넣을 수 있으며, 그런 후에는 사물이 영혼을 보존하고 우리 마음속에서 이 영혼을 키워 나가기 때문이다. -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중에서
우리 감각 세계의 건물을 떠받치는 것은 언제나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이며, 믿음이 없으면 건물은 흔들린다. 우리는 바로 이 믿음이 사람들의 가치와 무용성을 결정하며 또 그들을 만날 때면 느끼는 열광이나 권태의 감정을 결정하는 걸 보아 왔다. -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중에서
파리에서 나는 '있지 않는 것'을 보고 싶었다. 새로운 풍경을 향해 가는 여행이 아니라, 다른 눈을 갖고 다른 우주를 보는 여행이길 바랐다. 샤르댕, 들라크루아, 쿠르베, 마네, 모네, 그리고 세잔과 더불어 이 별에서 저 별로 날아다니고 싶었다. 그래서 사물들을, 존재들을 믿기로 했다. 그 믿음이 내 정신적 토양의 깊은 지층이 되어 영원한 기쁨을 줄 것이다. 그로써 나에게도 주어진 소명을 찾아갈 것이다. 프루스트의 주인공 마르셀이 그랬듯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동일한 감각을 간직한 채로 화성이나 금성에 간다면, 그 감각은 우리가 볼 수 있는 온갖 것에 지구와 동일한 양상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단 하나의 진정한 여행, 단 하나의 ‘청춘‘의 샘은 새로운 풍경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눈을 갖고, 타자의 눈을 통해 다른 수백명의 눈을 통해 우주를 보며, 그들 각각이 보고 그들 각각이 존재하는 수백 개의 우주를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을 우리는 한 사람의 엘스티르, 한 사람의 뱅티유, 그들의 동류인 예술가들과 더불어 할 수 있으며, 정말로 이 별에서 저 별로 날아다닌다. -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중에서
콩브레 주변에서 산책을 하려면 '길'이 두 개 있었는데, 이 두 '길'은 아주 반대 방향에 있어서 우리가 집을 나갈 때면 결코 같은 문으로 나가지 않았다. (...) 습관의 활동이 유보되고, 사물에 대한 추상적 개념이 배제되는 자연 한가운데서 몽상할 때면 흔히 일어나는 일이지만, 우리는 깊은 신앙심으로 우리가 있는 장소의 독창성이나 개별적인 삶을 믿게 된다. (...) 나는 메제들리즈 쪽과 게르망트 쪽을, 내 정신적인 토양의 깊은 지층으로, 아직도 내가 기대고 있는 견고한 땅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때 나는 사물들을, 존재들을 믿었다. 내가 이 두 길을 돌아다니며 알게 된 사물들이나 존재들만이 아직도 내가 진지하게 생각하고, 아직도 내게 기쁨을 주는 유일한 것이다. -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