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1년 '피의 일주일'이라 불리는 시가전으로 파리코뮌은 패배했다. 그리고 벨 에포크(belle époque), 이른바 '좋은 시대'가 왔다. 물론 여전히 빈곤과 착취에 시달려야 했던 노동자들이 있었고, 제국주의의 각축전에 고통받는 식민지 국가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세계의 젊은 예술가들은 파리를 동경했다. 마네, 모네, 르누아르, 세잔, 고갱 등 셀 수 없는 예술가들이 꽃을 피웠고, 네덜란드에서 고흐가, 스페인에서 피카소가, 러시아에서 샤갈이, 네덜란드에서 몬드리안이 파리를 찾았다. 1875년 건축된 오페라 가르니에(Opéra Garnier)의 화려함과 1889년 만국박람회를 위해 탄생한 에펠탑(Tour Eiffel)의 높이는 벨 에포크 시대의 상징과도 같다.
과연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그토록 파리를 동경하게 했을까. 아마도 그들에게 파리는 시간의 빗장이 풀린 공간이지 않았을까. 시간의 빗장이 풀린 햄릿에게 선왕의 유령이 찾아왔듯이, 이들 예술가들은 시간의 빗장이 풀린 파리에서 영원으로의 고양과 도취를 만끽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이들은 삶 위로 날며, 말없는 것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을 길어 올렸을 것이다.
시간의 범주에서 벗어난 순간이 그 순간을 느끼게 하기 위해 우린 안에 시간의 범주로부터 벗어난 인간을 재창조한다. 그리하여 그 인간은, 비록 마들렌의 단순한 맛이 논리적으로 그 기쁨의 원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그 기쁨을 믿으며, 또 '죽음'이라는 단어가 그에게 무의미하다는 것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시간 밖에 위치하는 인간이 미래에 대해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중에서
「상승」, 보들레르
못을 넘어, 골짜기를 넘어,
산을, 숲을, 구름을, 바다를 넘어,
태양을 지나, 에테르를 지나,
별 박힌 천구의 경계를 지나,
내 정신아, 너는 날렵하게 움직여,
물결 속에서 넋을 잃는 수영선수처럼,
형언할 수 없고 씩씩한 기쁨에 겨워
그윽한 무한대를 쾌활하게 누빈다.
이 병든 장기에서 멀리 날아가,
드높은 대기 속에서 너를 맑게 씻고,
청명한 공간을 가득 채운 저 밝은 불을
순결하고 신성한 술처럼 마셔라.
안개 낀 삶을 무겁게 짓누르는
권태와 망망한 근심 걱정에 등돌리고,
복되도다, 빛나고 청명한 벌판을 향해
힘찬 날개로 날아갈 수 있는 자,
생각이 종달새처럼, 하늘을 향해
아침마다 자유 비상을 하는 자,
삶 위로 날며, 꽃들과 말없는 것들의 말을
애쓰지 않고 알아듣는 자 복되도다!
시간의 밖에서, 말없는 것들의 말을 알아듣기 위해 필요한 것은 지성의 빛이 아니었다. 프루스트는 감각과 마주치게 된 우연한 방식이야말로 감각이 소생시킨 진실, 감각이 벗겨낸 이미지들의 진실을 확인할 수 있게 한다고 했다. 그리고 어떤 상형 문자와 같은 방식으로 그 기호들이 번역하는 사유를 포착해내는 것이 작가로서 그의 소명이었다.
순수 지성이 만들어 낸 관념들은 논리적 진리, 가능한 진리밖에 가지지 못한다. 이 관념들은 임의적으로 선택된 것이다. '우리 지성에 의해 씌어진 문자가 아니라' 사물의 형상이라는 문자로 된 책이 우리의 유일한 책이다. -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중에서
그런데 이런 식의 진리는 내가 능동적으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자신의 고유한 상태 그대로 나에게 주어질 뿐이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대상 속에 숨겨지고, 또 펼쳐진 진리를 포착할 수 있을까. 어떻게 시간 밖으로 물러나 대상에 직접 가닿을 수 있을까.
나에게서 벗어나는 도취의 순간, 탈중심화(décentré)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해 보인다. 어떤 황홀경, 즉 지복(béatitude, 至福)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사랑이 어떨까. 사랑에 빠지는 순간만큼 수동적이고 알 수 없는 신비로운 경험은 없지 않나. 더욱이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이 그 자신이 아니라 사랑받는 사람에게 속하게 되는 기적같은 비밀을 품고 있으니! 사랑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완전히 벗어나 시간의 빗장을 풀고 대상에 직접 접촉해 그것이 표현하고 있는 기호를 감각해낼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사랑하는 만큼 이해하고, 이해하는 만큼 존재한다. 그런데 사랑은 늘 닿을 수 없는 것, 알 수 없는 것을 대상으로 한다. 우리는 미지의 어떤 것에 이끌리기 마련이고, 그것이 사랑의 바탕을 이룬다. 욕망이 하나의 대상에서 또 다른 대상으로 끊임없이 이동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랑 역시 불가능한 대상을 향해 끝없이 부유한다. 닿는 순간 사랑은 끝나기 마련이다. 진정한 삶은 다른 곳에 있다는 랭보의 고백처럼, 진정한 사랑 역시 다른 곳에 있다. 사랑은 끝없이 미끄러지고 유예된다. 그래서 사랑은 늘 아프다. 사랑은 실패한 사진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볼 때의 저 탐색하고 불안해하며 요구가 많은 태도, 다음날 만남에 대한 희망을 줄지 혹은 빼앗아 갈지 모르는 말에 대한 기다림, 그 말이 말해질 때까지 동시에 또는 번갈아 나타나는 기쁨과 절망의 상상, 이 모든 것은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우리 주의를 지나치게 동요하게 만들어 그 사람에 대한 어떤 선명한 이미지도 포착할 수 없게 한다. 어쩌면 또한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이 모든 감각 활동들이 우리 시선만으로 감각 너머에 존재하는 걸 알려고 애쓰면서 수많은 형태나 온갖 맛, 그 살아있는 사람의 움직임에는 너무도 무관심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랑하지 않을 때라야 우리는 그 사람의 움직임을 고정할 수 있다. 이와 반대로 사랑하는 사람은 항상 움직인다. 따라서 우리에겐 언제나 실패한 사진만이 있다. -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중에서
미끄러지고 유예되어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이, 그래서 실패한 사진과도 같은 것이 사랑이지만, 그것이 사랑이기에 우리는 포기할 수 없다. 이 실패도 있고, 저 실패도 있지만, 이 모든 실패들이 실패 그 자체는 아니기에, 사랑의 고귀함은 그것을 포기하지 않는 데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사랑을 포기하지 않고 지속할 수 있을까. 그 답은 믿음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