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대표적인 미술관인 루브르박물관, 오르세미술관, 퐁피두센터는 시기를 나누어 그 작품을 구분할 수 있다. 1848년부터 1914년까지 인상주의를 중심으로 한 근대 미술은 오르세미술관에서 볼 수 있고, 그 이전 고전/신고전 미술은 루브르박물관에서, 그 이후 현대 미술은 퐁피두센터에서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앞서 들라크루아와 쿠르베의 작품은 루브르박물관에서, 마네와 모네의 작품은 오르세미술관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세잔(Paul Cézanne, 1839~1906)의 작품은 오르세미술관에서도, 풍피두센터에서도 만날 수 있다. 인상주의 시기에 같이 활동했던 세잔의 작품을 현대미술관에서 만날 수 있는 까닭은, 그가 인상주의 동료들과 견해를 같이 하면서도 그것을 뛰어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기존의 고전주의 기법과 다르게 새로운 발견으로 세상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분명하지만, 세잔이 보기에 인상주의 역시 충분하지 않았다. 그는 자연을 대했을 때 받게 되는 인상이 어떻게 견고하면서도 완전한 어떤 것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그리하여 얻어진 결론이 감각(sensation)이다. 감각이란 우리가 객관적 세계와 우리 자신에게서 벗어나 오로지 풍경 그 자체에 도달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의식의 장막을 걷어낼 수 있다면, 우리는 세계와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세계와 더불어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 밤은 윤곽선이 없다. 밤은 그 자체로 나와 접촉하는 것이다.
풍경에 도달하려면, 우리는 가능한 모든 시간적 공간적 대상적 규정을 버려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포기는 단지 대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정도로 우리 자신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풍경 안에서, 우리는 더 이상 역사적 존재, 즉 그 자체로 객관화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풍경을 위한 기억을 갖고 있지 않으며, 풍경 안에 있는 우리를 위한 기억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는 한낮에 눈을 뜬 채 꿈을 꾼다. 우리는 객관적 세계와 우리 자신에게서 벗어난다. 그것이 바로 감각이다. - 세잔
세잔의 감각은 직접적으로 전이되는 것이다. 우리가 곧장 풍경에 도달할 때, 대상은 형상(eidos)으로 해방된다. 이를 위해서는 대상에 대한 주체의 임의적인 인식을 떨쳐버려야 한다. 대상에 대해 임의적인 인식을 가지는 것은 재현(representation)의 방식이자, 구상(figuration)의 길이다. 세잔은 그 길을 버리고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섰다. 그에게 회화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드러내는 일이었다.
오르세미술관에 전시된「생트 빅투아르산(Montagne Sainte-Victoire)」은 세잔이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방 빅투아르산을 그린 작품이다. 이 산은 거대한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바위산인데, 실제 모습은 세잔의 작품과는 전혀 딴판이라고 한다. 페터 한트케(Peter Handke)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사물 안으로 꿈꾸기는 오랫동안 글쓰기의 원칙이었다. 눈앞의 당연한 사물을 마치 꿈에서 보는 것처럼 상상해내기, 거기서 비로소 사물의 본질이 나타난다고 확신하면서. 그러면 사물은 글 쓰는 자 주변으로 작은 숲을 형성했다. - 페터 한트케,『세잔의 산, 생트빅투아르의 가르침』중에서
세잔은 말했다. "흘러가는 세상의 한 순간일지라도 우리가 그 순간 자체가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보존할 수 없을 것이다." 세잔은 빅투아르산 그 자체가 되기 위해 수없이 산을 오르내리며 그리고 또 그렸다. 그리하여 그는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릴 수 있었다. 대기의 순환과 빛의 흔들림, 빅투아르산의 힘을, 꿈꾸는 것처럼 상상해냈다.
퐁피두센터에서 전시 중인 「사과와 오렌지(Pommes et oranges)」는 세잔의 유명한 사과 연작 중 하나이다. 그런데 그림을 가만히 보고 있자면, 뭔가 이상한 점을 느끼게 된다. 공간이 틀어진 것 같고 대상이 공중에 떠 있는 듯 부자연스럽다. D. H. 로렌스(David Herbert Lawrence)는 세잔이 평생 추구했던 목표가 클리셰(cliché)를 배제하고 '사과성(Appleness)'을 얻는 것이라고 했다.
화가는 임무는 비어 있는 캔버스를 채우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의 작업을 결정하는 모든 주어진 것들(givens/Données), 구상적인 전제들로 가득 찬 캔버스를 먼저 비워내야 한다. 그들은 작업을 시작하기도 전에 우리의 의식을 사로잡고 있는 지식과 기억으로 일종의 클리셰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로 이미 캔버스를 채우기 일쑤다. 세잔의 사과는 인간의 관념에 포착된 사과가 아니라, 사과 본연의 사과인 셈이다.
세잔의 사과는 사과의 진실이 무엇이고 그것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보여준다. 세잔이 실재 사과 A를 보고 자신의 사과 B를 그렸는데, 그림 속 사과 B에 사과의 진실이 나타났다는 말이다. 이것은 실재(기의 Signifié)보다 그림(기표 Signifiant)을 강조한 것으로, 기의에서 기표가 비롯한다는 기존의 관념을 깨트리는 논리이기도 하다. 요컨대, 대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따라 그 대상의 진실이 드러나기도, 그렇지 않기도 한다는 말이다. 진실은 다만 어둠에 숨어 있을 뿐, 오직 감각만이 그 진실을 드러내 준다.
왜냐하면 작가에게서 문체란 화가에게 색채와 마찬가지로 기법의 문제가 아닌 비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문체는 의식적이고 직접적인 방법을 통해서는 불가능한, 세계가 우리에게 나타나는 방식에서의 질적 차이를 드러남이며, 예술이 없다면 우리 각자에게 영원히 비밀로 남아 있을 그런 차이이다. 우리는 오로지 예술을 통해서만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며, 우리의 우주와는 다른 우주, 달에서 보는 풍경만큼이나 우리에게는 낯선 우주에 대해 타자가 보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술 덕분에 우리는 단 하나의 세계, 우리만의 세계를 보는 대신 세계가 증식되는 걸 보면서, 독창적인 예술가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 많은 세계를, 각각의 세계가 무한 속으로 굴러가는 것보다 더 상이한 세계를 우리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으며, 그리하여 그 세계는 몇 세기가 지난 후 렘브란트 또는 페르메이르라고 불리는 광원이 꺼진 후에도 여전히 그들의 특별한 빛을 보내온다. -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