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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망각했던 해돋이

by 파스

1874년 4월 일군의 신인 화가들이 첫 번째 전시회를 열었다. 그중에는 모네(Oscar-Claude Monet, 1840~1926)의 「인상, 해돋이」가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비평가 르로이(Louis Leroy)는 "그저 인상을 그린 것에 불과하다"며 가혹하게 평가했지만, 이 평가는 19세기 후반 예술사를 대표하는 하나의 사조를 탄생케 했다.


photo_2024-06-21_12-52-25.jpg 오르세미술관


photo_2024-06-21_12-51-13.jpg 인상주의 150주년 특별전


그로부터 150년 후, 오르세미술관에서 특별한 전시회가 열린다. 1874년 전시회에 출품된 작품을 비롯해 전 세계 주요 미술관에 흩어진 130여 점의 인상주의 작품을 한 곳에 모은 것이다. 전시회 이름은 '파리 1874: 인상주의의 발명'이다. 인상주의가 전에 없던 것을 새롭게 발명한 것이라면, 발명가라는 칭호에 가장 걸맞은 인물은 모네가 아닐까 싶다. 그는 우리에게 태양과 바람이 무엇인지, 그 진리와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해 주었다.


인생의 모든 단면을 보여주는 망원경을 소유하고 있는 천문학자가 사람들과 동떨어져 생활하며 자신의 방에서 고독하게 그 망원경을 들여다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애호가들은 각자의 방에 나름대로 그림이라는 이름의 마술거울을 소유하고 있다. 그 그림들은 우리가 조금 멀리서 바라보는 방법만 터득한다면 인생의 중요한 면들을 보여준다. 마술거울을 들여다보듯 우리는 모든 생각을 접고 각각의 색이 의미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하려 하는데, 이는 다채로운 색감의 건축물과 연관이 되어 과거의 특정한 인상의 기억 속에서 상상의 풍경을 만들어간다. 긴 수염을 기른 노인들이 바람이나 태양의 그을음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 거울이 태양과 바람이라는 재질의 진리를 발견할 때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마치 연극배우를 애인으로 둔 남자가 그녀가 존경하는 작가가 누구인지 알고 그 작가가 창조한 역할을 연기하는 그녀를 보며 즐거워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모네의 그림은 보는 이로 하여금 그 안에 표현된 풍경을 좋아하게 만든다. (...) 한 장소에서 진리와 아름다움을 끄집어내기 위해서는 일단 그곳에서 그런 미덕이 나올 수 있어야 하고, 그 토양은 신들로 가득하다고 믿어야 한다. - 프루스트, 「화가, 그림자, 모네」 중에서


인상주의 150주년 특별 전시의 표제작이기도 한 모네의 「인상, 해돋이」는 그가 르아브르 항구의 아침 풍경을 그린 작품이다. 모네가 그린 이 흐리멍덩한 해돋이가 진실된 작품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그것이 캔버스에 박제된 해돋이가 아니라 바로 눈앞에 펼쳐진 해돋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기억하는 해돋이'가 아니라 '망각했던 해돋이'다. 기억은 습관의 영향을 받고, 습관은 모든 것을 약화시킨다. 망각이야말로 우리에게 어떤 존재를 가장 잘 드러나게 한다. 우리는 망각 덕분에 잊혀진 존재를 다시 만날 수 있고, 잃어버린 과거까지 되찾을 수 있다.


Monet_-_Impression,_Sunrise.jpg 「인상, 해돋이」 (출처: 마르모탕 미술관)


화창한 날씨의 보기 드문 선명함이 물속에 비치는 그림자에 돌과 같은 단단함과 광채를 주어서인지, 아니면 아침 안개가 그림자와 마찬가지로 돌을 증발시켜서인지, 탑이 씌어 있는 성은 꼭대기에서 하나의 탑으로 연장되고 밑에서는 거꾸로 된 탑으로 연장되어 완전히 둥근 성처럼 보였다. 마찬가지로 바다 너무 숲이 늘어선 뒤로는 석양의 분홍빛에 물든 또 하나의 바다가 시작되었는데, 하늘이었다. 빛은 새로운 고체 모양을 만들고 그것으로 선체를 두들기면서 그들 속에 있는 또 다른 선체 뒤로 밀어 넣어 실제로는 평평하지만, 단지 조명에 부서진 듯 보이는 아침 바다 표면에 크리스털 계단을 설치했다. -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중에서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가상의 화가 엘스티르를 등장시키는데, 그가 현실의 마네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프루스트의 주인공 마르셀은 엘스티르의 작업실에서 사물과 자연을 바라보는 힘을 기른다. 신이 사물에 이름을 붙여 세상을 창조했다면, 예술가는 그 이름을 제거함으로써 세상을 다시 창조한다. 사물의 이름은 지성의 개념에 상응하며, 이런 개념과 관계없는 것들은 모두 우리의 인상에서 제거되도록 강요한다. 마르셀은, 시가 은유라는 방식으로 재현된 세상을 변형하듯이, 엘스티르의 작품이 세상의 시적 상태를 그리고 있다고 말한다.


Claude_Monet_Le_Havre_Fishing_Boat_leaving_the_port_Bâteaux_de_Peche_Sortant.jpg 「르아브르 항구」 (출처: 위키백과)


엘스티르가 얼마 전에 끝냈으며, 내가 그날 오랫동안 바라보았던 카르케튀르 항구를 그린 그림에서 그가 도시를 그리기 위해서는 바다의 요소만을, 바다를 그리기 위해서는 도시의 요소만을 사용하면서 관람자의 정신에 예고한 것은 바로 이런 종류의 은유였다. 집들이 항구의 일부를 가리는지, 선박 수리를 하는 도크를 가리는지, 아니면 발베크 지방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육지에서 만으로 움푹 들어간 바다 자체를 가리는지 잘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도시가 세워진 앞쪽으로 돌출된 곶의 다른 편엔, 지붕들 위로 돛대가 비죽 솟아 나와 있었고, 돛대는 그것이 속한 선체를 뭔가 도시적이며 땅 위에 세워진 건축물 같은 걸로 보이게 했으며, 더욱 인상적인 것은 두부에 길게 늘어선 배들이 어찌나 빽빽이 열을 짓고 있던지, 사람들이 이 배에서 저 배로 이야기를 나누어도 배의 경계나 물의 틈새가 보이지 않았으며, 그리하여 이 어선 무리는 오히려 크리크베크 성당들보다 덜 바다에 속한 듯 보였다. 도시의 모습이 가린 채 멀리서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태양과 파도 먼지 속에 보이는 크리크베크 성당들이 마치 설화석고나 물거품으로 부풀어 올라 물에서 빠져나온 듯 보였고, 또 다채로운 빛깔의 무지개 띠 안에 갇혀 비현실적이고 신비로운 화폭을 구성하는 듯했기 때문이다. -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중에서


모네는 연작으로 유명하다. 빛이 주는 다채로운 변화를 포착하기 위해 그는 그리고 또 그렸다. 오랑주리 미술관에서 상설 전시되고 있는 「수련」 연작은 30여 년에 걸쳐 그려진 작품들이다. 「수련」과 더불어 또 다른 연작인 「루앙 대성당」은 완전히 새로운 성당 그림이었다. 모네가 루앙 대성당에서 찾은 것은 화려한 고딕 양식도, 찬란한 스테인드글라스도 아니었다. 그는 단지 빛과 그것이 주는 인상만으로 대성당을 재창조했다. 그리고 그 성당은 프루스트의 주인공 마르셀이 만난 성당이기도 했다.


photo_2024-06-26_14-12-13.jpg 오랑주리 미술관, 「루앙 대성당」


우리는 마르쿠빌-오르괴유즈를 지나고 있었다. 그 마을에 있는 성당은 반이 새롭게 지은 것이며 나머지 반은 보수된 흔적이 보였는데, 저물어가는 해는 오랜 세월이 만들어내는 고색창연함만큼이나 아름다운 느낌으로 그 성당을 덮고 있었다. 석양을 받은 성당의 보조들은 빛을 머금은 액체로 채워져 당장이라도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성모 마리아, 성 엘리자베스, 성 요아캄의 조각상들은 수면 위에서, 혹은 태양 근처의 보이지 않는 소용돌이 속에서 헤엄치고 있었고 따뜻한 먼지들에 뒤덮인 많은 현대적인 동상들이 황금빛기둥의 반 정도를 장식하고 있었다. 성당 앞의 거대한 사이프러스 한 그루는 마치 축성된 울타리 안에 서 있는 것 같았다. -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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