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을 뜻하는 단어 살롱(Salon)은, 프랑스 왕립아카데미가 주최한 미술 전시회가 루브르궁 '살롱 카레(Salon Carr)'에서 열린 이래, 국가가 개최하는 미술 전시회의 공식 명칭이 되었다. 처음에는 아카데미 회원에게만 출품 자격이 있었지만 프랑스 대혁명 이후 모든 작가에게 개방되었고, 관람객 수도 연간 100만 명이 넘어 젊은 화가들의 화려한 등용문이 되었다.
왕립아카데미가 주최하는 '관전(官展)'인 만큼, 살롱전은 기존의 예술적 규범들을 보존하고 계승하려는 목적이 분명했다. 역사적 혹은 종교적 내용으로 지배 계급의 욕구를 충족해야 했고, 이상적인 고전미를 추구해야 했다. 하지만,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예술가들의 도전을 과거의 규범 속에 가둘 수는 없었다. 살롱전은 어느 순간 낡은 캔버스와 새로운 캔버스의 각축장으로 변하고 있었다. 보들레르는 이러한 새로운 종류의 예술가를 플라뇌르(flâneur, 산보자)라고, 댄디(dandy)라고 불렀다.
관찰자이건 산보자(flâneur)이건 철학자이건, 여러분은 그를 원하는 대로 부르라. 하지만 분명히 여러분은 이런 종류의 예술가를 특징짓기 위해서 어떤 단어들을 사용하건 간에, 영원한 아니 영원하지는 않아도 적어도 훨씬 영속적인 사물들, 영웅적이거나 종교적인 주제의 화가에 적용할 수 없는 형용사를 부여하게 될 것이다. 이따금 그는 시인이다. 더 자주 그는 소설가나 모럴리스트에 가까워진다. 그는 우연성의 화가이며, 우연성이 함축하고 있는 영원성을 암시하는 모든 것의 화가이다. - 보들레르, 『현대 생활의 화가』 중에서
댄디즘은 특히 민주주의가 아직 큰 힘을 갖지 못하고 귀족주의는 뒤흔들리면서 추락하기 시작하는 그 격동의 시대에 나타난다. (...) 댄디즘은 데카당스 시대에 나타나는 영웅주의의 최후의 폭발이다. - 보들레르, 『현대 생활의 화가』 중에서
1863년은 새로운 예술가들의 도전에 분기점이 되는 해였다. 당시 살롱전 심사가 편파적이었다는 여론에 따라 나폴레옹 3세가 낙선작들의 전시를 허락했는데, 이름하여 낙선전(Salon des refusés)이다. 이 전시회는 국가의 심사가 없는 최초의 살롱으로 오늘날 앙데팡당(indépendant, 독립/자립)의 시초가 되었다. 바로 이 낙선전에서 유래 없이 큰 스캔들을 일으킨 작품이 바로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1832~1883)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다.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가 보여주는 '옷을 걸친 남자들과 그렇지 않은 여인' 테마는 조르조네(Giorgione)의 「전원의 합주」를 모티브로 하고, 그 구도는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Marcantonio Raimonde)가 판화로 새긴 라파엘로의 「파리스의 심판」에서 가져온 것으로 알려졌다. 「풀밭 위의 점심 식사」의 기초가 된 두 작품은 내용과 형식 면에서 똑같이 선정적이지만, 아무런 스캔들로 일으키지 못했다. 앞선 두 작품이 신화적 세계를 그리고 있는 반면, 마네는 눈앞에 펼쳐진 세계, 바로 우리의 일상을 그려냈기 때문이다. 평상복을 걸친 남성과 도발적인 나체의 여성은 그 자체로 과거의 규범과 관습을 무너뜨리는 전복이었다.
「풀밭 위의 점심 식사」에서 한 걸음 더 나간 작품이 「올랭피아」다. 「올랭피아」 역시 티치아노(Tiziano Vecellio)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모티브로 한다. 둘 다 나체의 여성을 그리고 있지만, 그 의미는 전혀 달랐다. 티치아노가 신화 속 비너스를 그렸다면, 마네는 현실 속 성매매 여성을 그렸다. 비너스에서 성매매 여성으로의 변화는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의 이행을,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을 의미했다.
이 이행에 신스틸러는 고양이다. 티치아노의 작품 속 강아지가 마네의 작품에는 고양이로 둔갑한 것이다. 「올랭피아」의 원제목도 「고양이와 함께 한 비너스」였다. 작품 속의 검은 고양이는 꼬리를 한껏 치켜세우고 정면을 응시한다. 마치 그림 속 여성의 분신인 양 길들여지지 않은 도발적인 자세로 유혹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모두가 부정하겠지만, 이 고양이야말로 부르주아의 세속적 욕망을 폭로하고 있다. 이 그림으로 벌거벗겨진 사람은 성매매 여성이 아니라 위선과 탐욕에 찌든 부르주아 남성이었다. 그들에게 여성은, 겉으로는 ‘성모’ 마리아지만, 속으로는 ‘창녀’ 마리아였기 때문이다.
오너라, 내 아름다운 고양이, 사랑하는 이 가슴 위로, 네 발의 발톱은 접어두고, 금속과 마노가 섞인 그 아름다운 두 눈에 나를 잠기게 하여다오.
네 머리와 그 탄력 있는 등을 내 손가락이 바쁠 것 없이 쓰다듬고, 내 손이 쾌락에 빠져들며 전기를 품은 네 몸을 더듬을 때,
나는 마음속에 내 아내를 본다. 아내의 눈은, 사랑스러운 짐승 너의 눈처럼, 그윽하고 싸늘하여, 투창처럼 베고 가르며,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어떤 미묘한 바람, 어떤 위태로운 향기가 그 갈색 몸을 감고 떠돈다.
- 보들레르, 「고양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