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프랑스는 혁명과 반혁명의 연속이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으로 루이 16세를 처형하고 공화국이 수립되었지만, 나폴레옹 실각 이후 부르봉 왕조가 부활하면서 다시 왕정체제로 복귀했다. 부르봉 왕조는 1830년 7월 혁명으로 샤를 10세가 오스트리아로 쫓겨나면서 막을 내렸고, 루이 필리프가 이른바 '시민왕'으로 추대되면서 입헌군주제가 도입되었다.
하지만 산업 혁명으로 새롭게 성장한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의 사회적, 경제적 요구를 충족시키기엔 '시민왕'도 한계가 분명했다. 1832년 6월, 식량부족과 물가 상승 등으로 다시 봉기가 일어났고 이는 빅토르 위고 『레미제라블』의 배경이 되었다.
결국 1848년 2월, 선거법 개혁과 생존권을 요구하는 거대한 민중봉기가 일어났고 그 결과 다시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1848년 혁명은 비단 프랑스만이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일어난 혁명이었으며, 그 결과 프랑스 대혁명 이후 반혁명의 구심이었던 빈체제는 완전히 몰락하게 된다. 특히 1848년 혁명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성장을 배경으로 한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에 떠돌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로 시작하는 『공산당선언』이 그해 출판되어 각국으로 전파되었다.
2월 혁명으로 공화국이 다시 수립되었지만, 그 운명은 오래가지 못했다. 1851년, 대통령으로 선출된 나폴레옹 3세가 쿠데타를 일으켜 황제에 즉위한 것이다. 이를 두고 마르크스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이렇게 말했다.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 나폴레옹 1세가 공화국을 무너뜨리고 황제가 된 것은 비극이지만, 그의 사촌이 쿠데타로 황제에 오른 것은 희극, 즉 코미디였다.
앞서 들라크루아가 일으킨 변화의 물결은 이 시기에 이르러 두 번째 물결로 이어진다. 나폴레옹 3세의 쿠데타로 정치적, 사회적 전망이 어두워지자 낭만주의는 자연스럽게 퇴조하였고, 새로운 사조인 사실주의가 등장하게 되는데, 장데지레 귀스타브 쿠르베(Jean-Désiré Gustave Courbet, 1819~1877)가 그 포문을 열었다.
쿠르베는 1855년 파리의 한 낡은 건물에서 개인전을 열고 '사실주의(Le Réalisme), G. 쿠베르 전'이라 불렀다. 그는 천사를 그려달라는 주문에 이렇게 답했다. "나에게 천사를 보여주면 천사를 그리겠다." 그는 그 대신 눈에 보이는 평범한 민중을 그렸다. 그는 이상(Idea)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연, 즉 진실을 원했던 것이다.
사실주의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그의 대표작 「오르낭의 매장」에는 시골 마을 누군가의 죽음이 6미터가 넘는 화폭에 담겨 있다. 그 속에는 신의 구원도, 영혼의 승천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누군가의 평범한 죽음을 슬퍼하는 마을 주민의 애도와 연대만이 그 큰 화폭을 채우고 있을 뿐이다.
또 다른 그림 「화가의 아뜰리에」 역시 6미터에 가까운 거대한 작품이다. '7년 간의 예술 생애를 요약하는 사실적 알레고리'라는 말이 제목에 덧붙여져 있는데, 33명의 인물이 등장해 그의 예술 생애를 드러내고 있다. 가운데 쿠르베를 기준으로 오른쪽에는 '생명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 왼쪽에는 '죽음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 그려져 있다. '생명을 먹고 사는 사람들'에는 사회주의자 푸르동, 소설가 샹플뢰리 등이 있고 맨 마지막에는 보들레르가 등장한다. '죽음을 먹고 사는 사람들'에는 부르주아와 랍비 등 인간 군상이 그려져 있다.
이 시기에 파리는 대대적인 변화를 겪는다. 1853년, 나폴레옹 3세는 오스만 남작을 파리 시장으로 임명하고 대대적인 도시 개조 사업을 진행했다. 좁고 구불한 골목을 넓고 곧은 도로로 만들어 교통 체증을 해소하고 바리케이드를 이용한 시위대를 신속하게 진압할 수 있게 했다. 또 오스만식 아파트를 4만 채 이상 지어 오늘날 파리의 모습을 탄생시켰다. 중세에서 근대 부르주아 도시로, 파리는 완전히 탈바꿈했다.
도시의 외관이 바뀐다는 것은 그곳의 주인이 바뀐다는 뜻이기도 했다. 도로가 넓어지고 멋진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좁은 골목과 낡은 집에 살던 빈민들은 자연스레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2만 명이 넘는 빈민들이 몽마르트르를 비롯한 외곽으로 밀려났고, 계급 불평등은 도시 불평등으로 이어졌다. 그로부터 20년 후, 파리 민중들의 자치 정부인 파리코뮌이 몽마르트르에서 발발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쿠르베의 「화가의 아뜰리에」에 '생명을 먹고 사는 사람들'과 '죽음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 화가의 양 옆으로 등장하는 것은, 그것이 이 시대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진실이기 때문이다.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이 부활하는 한편, 자본주의가 급속도로 발전하고 계급 분화가 가속되는 상황에서 민중은 '죽음을 먹고 사는 사람들'을 벗어나기 힘들었다. 쿠베르에 의해 '생명을 먹고 사는 사람들' 편에 서게 된 보들레르 역시 그날 그날 저녁의 빵을 벌기 위해 주 예수를 부르거나 대중의 환심을 사야만 했다.
그날 그날 저녁의 빵을 벌어야 하니,
성당의 복사 아이처럼, 향로를 흔들어대며,
별로 믿지도 않는 테 데움을 부르거나,
혹은, 굶주린 광대, 너의 매력이랑,
남모를 눈물에 젖은 너의 웃음을 진열하여
한인(閑人)들의 웃음보를 터뜨려야 하리.
- 보들레르, 「돈에 팔리는 시신(詩神)」
1869년 발표된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은 바로 이 시기, 나폴레옹 3세 치하의 파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막막한 잿빛 하늘 아래, 먼지로 뒤덮인 벌판에서 저마다의 커다란 시메르(chimère, 망상)를 짊어지고 체념 어린 표정으로 나아가는 사람들, 보들레르가 보기에 파리는 도시가 아니라 거대한 병원이었다. 결코 치료받지 못할 환자들로 가득 찬 병원. 그래서 그는 이 세상 밖으로의 이주를 꿈꿨다. 어쩌면 그에게 시란 이 세상 밖의 그 무엇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저들은 저마다 커다란 시메르를 한 마리씩 등에 짊어지고 있었으니, 무겁기가 밀가루나 석탄 부대, 또는 로마제국 보병의 군장 못지 않았다. 이 나그네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제 목에 매달리고 제 등에 엉겨붙어 있는 이 흉포한 짐승에 대해 분노하는 모습이 아니었으니, 이 짐승이 자기 자신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고 여기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 피곤하고 진지한 얼굴 하나하나에 아무런 절망의 낌새도 비치지 않았거니와, 하늘의 우울한 궁륭 아래, 그 하늘처럼 황량한 땅의 먼지 속에 발을 파묻으며, 그들은 끝없이 희망을 품도록 벌받은 자들이 지어 마땅한 그런 체념 어린 표정을 지으며 나아가고 있었다. - 보들레르, 『파리의 우울』 중에서
이 삶은 하나의 병원, 환자들은 저마다 침대를 바꾸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이 사람은 난로 옆에서 신임하는 편이 나을 것 같고, 저 사람은 창 옆으로 가면 치료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나로서는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아닌 저곳에 가면 언제나 편할 것 같기에, 이 이주의 문제는 내가 끊임없이 내 혼과 토론하는 사안 가운데 하나이다. - 보들레르, 『파리의 우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