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족풍의 예술 양식은 자연스럽게 퇴조했지만, 여전히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고전적인 미학은 주류를 차지하고 있었다.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 Louis David, 1748~1825)로 대표되는 신고전주의가 그것이다. 그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영웅적인 주제를 주로 다루며 엄격하고 균형 잡힌 구도와 명확한 표현을 중요시했는데, 「호라티우스의 맹세」, 「마라의 죽음」, 「나폴레옹 대관식」등의 작품을 루브르에서 볼 수 있다.
이런 다비드의 제자가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Jean Auguste Dominique Ingres, 1780~1867)고, 그에 맞선 이가 바로 외젠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 1798~1863)다.
1824년 살롱전에서 앵그르는 「루이 13세의 맹세」를, 들라크루아는 「히오스섬의 학살」을 출품했다. 루이 13세가 자신의 통치권을 성모 마리아에게 맹세하는 앵그르의 작품은 프랑스혁명으로 무너진 왕정체제를 부활하고자 했던 샤를 10세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었던 반면, 들라크루아의 작품은 '회화의 학살'이라는 악평을 받았다. 하지만 새로운 시대의 예술은 들라크루아에게서 싹트고 있었다. 들라크루아는 샤를 10세를 몰아낸 1830년 7월 혁명을 그린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들라크루아에게 예술은 권력과 체제를 유지하는 힘이 아니라, 개인의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었다.
보들레르는 들라크루아를 낭만주의의 선두에 세웠다. 다비드와 앵그르가 눈에 보이는 세계를 정확하게 그려냈다면 들라크루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그렸다. 보들레르는 그것이 꿈이며 신경이며 영혼이라고 했다.
들라크루아는 모든 화가들 중 가장 암시적인 화기다. 그의 작품은 비로 이류나 졸작 중에서 골라잡아도, 우리로 하여금 잘 사유하게 이끌어 주고, 이미 경험했던, 그러나 과거의 어둠 속에 영원히 묻혀 버리고 만 것으로 믿었던 감정과 시적인 사고를 기억 속에서 가장 잘 되살아나게 해준다. (...) 들라크루아는 아무리 격렬한 인간의 몸짓도 단순히 색채만으로 표현할 수 있으며, 또 그것만으로 소위 인간 비극의 분위기라고 부를 수 있는 것과 인간 영혼의 상태를 표현할 수 있었다. - 보들레르, 「외젠 들라크루아의 생애와 작품」 중에서
들라크루아는 이렇게 말한다. "자연이란 사전에 불과하다." 사전 속에서 우리는 말의 의미와 형성, 기원을 찾아내고 문장을 지어낸다. 누구도 사전 그 자체를 창작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사전 속 말들이 문장이 되고 시가 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상상력이다. 들라크루아는 상상력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표현한다. 고전주의자들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고자 했다면, 그는 상상력으로 사물을 번역해 그 영혼을 표현하고자 했다.
눈에 보이는 우주 전체는, 상상력이 그에 관련된 합당한 자리를 부여할 이미지와 기호들로 이루어진 잡지에 불과하다. (...) 그것은 상상력이 소화해서 변형시켜야 할 일종의 먹이와 같다. 인간 영혼의 모든 기능들은 이 기능들을 동시에 요구하는 상상력에 따라야 한다. - 보들레르, 「외젠 들라크루아의 생애와 작품」 중에서
외부의 자연은 예술가에게 이 씨앗을 배양해야 할 끊임없이 반복되는 한 번의 기회를 제공해 줄 뿐이다. 자연은 예술가가 다시 배열하고 정돈해야 할 재료들의 분산된 더미에 불과하다. 그것은 잠든 기능에 대한 일종의 각성제이며 자명종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연 그 자체에는 색깔도 선도 없다. 색깔과 선을 창조해내는 것은 인간이다. - 보들레르, 「외젠 들라크루아의 생애와 작품」 중에서
1834년 살롱전, 들라크루아는 「알제의 여인들」을 출품한다. 그는 프랑스 외교사절단과 함께 모로코와 알제리를 방문할 기회를 얻었는데, 당시 스케치를 바탕으로 이 그림을 완성했다. 당시 살롱전에는 앵그르의 역작 「성 심포리아노의 순교」가 같이 출품되었는데, 10년 전 상황과는 정반대로 앵그르에게는 악평이, 들라크루아에게는 찬사가 쏟아진다.
보들레르는 그가 내밀함과 깊이로 가득 찬 예술가라며 마치 마술이나 최면술처럼 멀리서 자신의 생각을 투사하는 것 같다며 이는 기존의 형태와 선 중심이 아니라 움직임 중심의 색채 화가로서의 능력에서 비롯한다고 했다. 그는 색채화가들의 데생을 데생화가들의 데상과 구분하는데, 색채화가들(이를테면 루벤스)의 데생이야말로 데생화가들(이를테면 라페엘로)이 포착할 수 없는 자연의 떨림을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요소(움직임, 색채, 분위기)는 필연적으로 약간 분명치 않은 윤곽과 유동하는 듯한 가벼운 선과 대담한 터치를 요구한다. 오늘날 들라크루아만이 그 독창성을 직선 체계에 의해 침해당하지 않은 유일한 화가다.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항상 움직이는 듯하고, 옷자락은 펄럭이고 있다. 들라크루아의 관점에 의하면 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비록 그것이 잘 유지된 선이라 해도 짓궂은 기하학은 다른 수많은 선을 포함하기 위한, 상당히 두터워질 수밖에 없는 선을 반드시 가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연의 영원한 맥박을 그리고 싶어하는 색채화가에게 선이란 마치 무지개 같은 두 색채의 은밀한 융합일 뿐이다. - 보들레르, 「1846년 미술전」 중에서
그런 현상은 향기가 이념의 세계를 전달해 주는 색조의 완벽한 조화에서(화가의 머릿속에서 미리 짜인 조화), 또 색채와 주제 사이의 일치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이런 유의 색채는, 대단히 미묘한 생각을 표현함에 있어 마치 그 색깔이 옷을 입혀야 하는 대상에서 독립해 스스로 사고하는 듯하다. 그리고 이같은 색채의 훌륭한 일치는 흔히 멜로디나 조화를 생각게 해준다. - 보들레르, 「1855년 만국박람회」 중에서
자연과 이 세계는 생성의 원리에 따라 사라지고 나타나며 끊임없이 운동한다. 우리는 그것을 고정된 형태로 파악할 수 없다. 들라크루아가 이미지와 기호로 이루어진 우주 속에서 상상력으로 합당한 자리를 부여했듯이, 보들레르는 다만 정다운 눈길로 상징의 숲을 건너 지나갈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그 상징을 알 수 없고, 다만 감각할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자연은 향과 색과 음으로만 화답하기 때문이다.
자연은 하나의 신전, 그 살아 있는 기둥들은
간혹 혼란스러운 말을 흘려보내니,
인간은 정다운 눈길로 그를 지켜보는
상징의 숲을 건너 거길 지나간다.
밤처럼 날빛처럼 광막한,
어둡고 그윽한 통합 속에
멀리서 뒤섞이는 긴 메아리처럼,
향과 색과 음이 서로 화답한다.
어린이 살결처럼 신선한 향기, 오보에처럼
부드러운 향기, 초원처럼 푸른 향기들에
- 썩고, 풍성하고, 진동하는, 또다른 향기들이 있어,
용연향, 사향, 안식향, 훈향처럼,
무한한 것들의 확산력을 지니고,
정신과 감각의 앙양을 노래한다.
보들레르, 「만물조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