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브르 박물관은 육만 제곱미터 넓이에 기원전 사천 년부터 세계 각국에 걸친 미술작품 약 삼십 팔만 점 이상을 보유하고 있다. 하루에 만 오천 명 이상이 이곳을 방문하는데, 단연 인기가 있는 작품은 「밀로의 비너스」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다. 「모나리자」 앞에는 어마한 인파가 모여드는데, 정작 「모나리자」 그림 보다 그 앞의 인파가 더 장관이란 생각이 든다.
루브르미술관에서 그림을 감상할 때 비록 이류로 평가될지라도 매우 흥미로운 작품들을 만날 수가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심지어 예술가들조차도 이들 작품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빠르게 지나쳐 간다. 그러나 판화의 형태로 일반 대중들에게 가장 인기 있었던 티치아노나 라파엘로의 작품들 앞에서는 우뚝 서서 꿈을 꾸듯 감상을 한다. 그리고는 아주 만족한 모습으로 미술관을 나와서는 "나는 미술관을 잘 알고 있지"하고 중얼거린다. - 보들레르, 『현대 생활의 화가』 중에서
보들레르는 아름다움이란 비록 그것이 빚어내는 인상은 하나일지라도 반드시 이중적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영원하고 불변적인 요소와 상대적이고 상황적인 요소가 그것인데, 이 상대적이고 상황적인 요소를 시대의 유행이나 윤리라고 봤다. 그래서 그가 루브르에서 애착을 가진 작품은 현재의 풍속을 그린 그림들이었다. 인간이 자신을 위하여 창조하는 아름다움에 대한 생각은 그의 모든 몸가짐에 새겨지고, 그의 옷을 구기거나 뻣뻣하게 펴기도 하며, 그의 동작을 부드럽게 하거나 경직시키며, 결국에는 얼굴 표정에까지도 미묘하게 스며들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현대성(modernité)라고 불렀다.
그에게 현대성이란, 유행으로부터 역사적인 것 안에서 유행이 포함할 수 있는 시적인 것을 꺼내는 일, 일시적인 것으로부터 영원한 것을 끌어내는 일이다. (...) 현대성이란 일시적인 것, 순간적인 것, 우연한 것으로 예술의 반을 이루고, 나머지 반은 영원한 것, 불변의 것이다. (...) 너무나 자주 변화하는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요소를 경시하거나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 요소를 없애 버린다면, 여러분은 원죄 이전의 최초의 여성 이브의 아름다움처럼, 추상적이며 정의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라는 심연 속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 (...) 한마디로 말해서, 모든 현대성이 고전성을 획득할 수 있으려면, 인간의 생활이 무의식적으로 거기에 불어넣는 신비로운 미가 추출되어야만 한다. - 보들레르, 『현대 생활의 화가』 중에서
하지만, 그의 현대성은 숙명처럼 패배와 맞닿는다. 왜 아니겠는가. 일시적인 것으로부터 영원한 것을 끌어내는 일이, 유한한 인간이 무한의 체험을 경험하는 일이 어떻게 성공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래서일까. 보들레르는 가장 열등한 존재인 광대에게서 자신을 본다. 광대는 가장 못나고, 가장 외롭고, 가장 불완전한 존재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역시 불멸의 미를 이해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광대는 아름다움 앞에서 상처 입고 나날을 소진할 뿐이지만, 영원한 광채를 지닌 커다란 눈을 포기할 수 없다.
나는 인간 중에서 가장 못나고, 가장 외로운 놈, 사랑도 받지 못하고 우정도 얻지 못한 놈이며, 그 점에선 가장 불완전한 동물보다도 훨씬 열등한 놈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 역시 불멸의 미를 이해하고 느끼기 위해 만들어졌지요! 아! 여신이여! 제 슬픔과 착란을 가엾게 여기소서! - 보들레르, 『파리의 우울』 중에서
나는 아름답다, 돌의 꿈처럼, 오 덧없는 인간들아!
너희들이 저마다 차례차례 상처를 입는 내 젖가슴은
질료처럼 영원하고 말없는 사랑을
시인에게 하나씩 불어넣도록 만들어진 것
나는 저 알지 못할 스핑크스처럼 창공에 군림하여,
백설의 마음을 백조의 순백에 결합하고,
선을 흐트러뜨리는 격동을 싫어하니,
결코 울지 않고, 결코 웃지 않는다.
가장 오만한 기념물에서 빌린 듯한
내 당당한 자태 앞에서 시인들은
준엄한 연찬으로 그들의 나날을 소진하리라!
이 고분고분한 애인들을 홀리기 위해 내 지닌 것은
만물을 더욱 아름답게 보여주는 맑은 거울,
내 두 눈, 영원한 광채를 지닌 내 커다란 눈이기에!
- 보들레르,「아름다움」
영원한 광채를 지닌 눈을 포기할 수 없는 광대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보들레르는 그것이 예술적 도취라고 말한다. 거대한 몽상 속에서 모든 것들이 자신을 통해 솟아오르고, 또 그것들을 통해 내가 솟아오르는, 자아가 소멸하는 강력한 경험이 바로 도취의 순간이다. 이 순간 모든 이성은 마비되고 시간은 분할되지 않으며 망각의 저편에서 환희가 솟아오른다.
팡시울은 그날 저녁, 완벽한 이상의 구현이어서, 그 이상화가 살아 있다고, 가능하다고, 현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불가능했다. 이 어릿광대가 오고, 가고, 웃고, 울고, 경련을 일으킬 때, 그의 머리에는 깨뜨릴 수 없는 후광이,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으나 나에게는 보이는, 예술의 광채와 순교의 영광이 기묘한 아말감을 이루고 어우러진 후광이 감돌았다. 팡시울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특별한 은총으로, 가장 기괴한 광대놀음에까지 신령한 것과 초자연적인 것을 끌어들였다. 나는 잊을 수 없는 이날 저녁의 일을 여러분에게 묘사하려고 애쓰고 있는 동안에도, 펜이 떨리고, 가실 줄 모르는 감동의 눈물이 두 눈에 솟아오른다. 파시울은 나에게 단호하게, 논박할 수 없게, 예술의 도취는 다른 어떤 도취보다도 더 심연의 공포를 가리기에 알맞다는 것을, 그리고 천재는 무덤가에서도, 무덤을 보지 못하게 막는 환희에 싸여, 그가 그렇듯이 무덤과 파멸의 관념을 말끔히 지워버리는 어떤 천국에 빠져, 희극을 연희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던 것이다.
- 보들레르, 『파리의 우울』 중에서
그는 바람과 놀고, 구름과 말하고,
십자가의 길을 노래하며 도취한다.
그리하여 순례길에 그를 따르는 정령은
숲의 새처럼 명랑한 그를 보고 눈물짓는다.
그가 사랑하려는 자들은 모두 두려운 마음으로
그를 감시하고, 혹은 그의 조용함에 담이 커져,
그의 비명을 자아내려고 앞을 다투며,
저들의 잔학함을 그에게 시험한다.
- 보들레르, 「축복」 중에서
보들레르는 현대미술을 말하는 자는 동시에 낭만주의를 말한다고 했다. 그것은 모든 예술이 가지는 모든 방법에 의해 표현된 내면성, 정신성, 무한에의 갈망을 말하는 것이다. 낭만은 모순점들을 배제시키거나 반명제(유한과 무한, 전체와 일부, 삶과 죽음)를 해소시키지 않고 그것들을 공존하게 만든다. 그러니까 진흙탕 같은 땅속에서도 하늘의 별을 볼 수 있다면, 그것이 낭만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비참한 존재이지만, 낭만을 알기에 고귀한 존재이기도 하다. 자신의 비참을 모르고 낭만을 추구하는 것은 오만이지만, 낭만을 모르고 자신의 비참만 느끼는 것은 절망이다. 그렇다면 낭만은, 죽음 앞에서 삶을 살아가는 필멸의 존재인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일종의 특권이 아니겠는가.
죽음이 우리를 위로하고, 슬프다, 살게 하니,
그것은 인생의 목적이요, 유일한 희망
선약처럼 우리를 들어올리고 우리를 취하게 하고,
우리에게 저녁까지 걸어갈 용기를 준다.
- 보들레르, 「가난뱅이의 죽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