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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라는 여행

by 파스

여행의 미덕은 잠시나마 습관을 벗을 수 있다는 것 아닐까. 습관을 뜻하는 라틴어 아비투스(habitus)는 고대 수도승들이 입는 의복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정해진 시간, 정해진 장소에서 입어야 하는 옷이 바로 습관이다. 현재라는 시간 속에서 우리가 입고 있는 습관이라는 옷은 사회적, 경제적 환경에 따라 직조된다. 마치 상업화된 유행에 따라 생산된 옷을 모두가 똑같이 입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상식 혹은 공통감(common sence)이라 불리는 공장에서 대량생산으로 찍어내는 획일화된 습관을 걸치고 있다.


한 시간에 삼천육백 번, 초는
속삭인다: 잊지 말라! - 그 벌레 같은 목소리로,
재빨리, 현재는 말한다: 나는 과거다,
내 더러운 대롱으로 네 목숨을 빨아올렸다!
- 보들레르, <시계> 중에서


보들레르는 그의 시 <시계>에서 "현재는 말한다. 나는 과거다."라고 했다. 왜 그런가. 현재라는 시간은 단 한 번도 현재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현재는, 현재라고 말하는 순간 과거가 되어버린다. 현재를 지나 과거가 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가 곧 과거인 것이다. 현재(present)는 과거의 재현(representation)에 불과하다. 그래서 보들레르는 말한다. "내 더러운 대롱으로 네 목숨을 빨아올렸다!"라고.


어제와 다르지 않은 오늘을 살고 있다면, 그것은 기억 때문이다. 현재는 습관 속에 있고 과거는 기억 속에 있다. 습관은 기억을 머금고 늘 그것을 상기(presentment)한다. 우리는 의지를 갖고 자유롭고 능동적으로 삶을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실상 그 의지는 어떤 구속 상태에 불과하다. 우리는 기껏해야 기억을 상기하고 재현할 자유만 가질 뿐이다.


나로 말하자면, 몸을 굽혀 아리따운 펠린(고양이)을, 이름도 잘 지어진 그녀를, 저와 동성의 명예인 동시에 내 마음의 자랑이며 매 정신의 향기인 그녀를 들여다보면, 밤이건 낮이건, 가득한 빛 속에서건, 어둠침침한 그늘 속에서건, 사랑스러운 그 눈 깊은 곳에서, 나는 언제나 또렷하게 시간을, 언제나 똑같은 시간을, 분과 초의 구분이 없이, 허공처럼 드넓고 장엄하고 거대한 시간 하나를 - 시계 위에 표시되지 않는, 그러나 한숨처럼 가볍고, 눈 한 번 깜빡이듯 재빠른 부동의 시간을 본다. - 보들레르, 『파리의 우울』 중에서


그래서 보들레르는 시계가 아니라 고양이 눈에서 시간을 읽는다. 고양이 눈에는 시침과 분침, 초침이 없다. 시간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로 분할되지 않는다. 그는 고양이 눈에서 언제나 똑같은 시간, 순간이자 영원의 시간을 본다. 그것은 '한숨처럼 가볍고, 눈 한 번 깜빡이듯 재빠른 부동의 시간'이다.


오르세미술관 5층 시계탑


그런 내가 기억해 낼 수 있는 것은 단지 의지적인 기억, 지성의 기억에 의해 주어지는 것으로, 이런 기억이 과거에 대해 주는 지식은 과거의 그 어떤 것도 보존하지 않으므로 (...) 과거는 우리 지성의 영역 밖에, 그 힘이 미치지 않은 곳에, 우리가 전혀 생각도 해 보지 못한 어떤 물질적 대상 (또는 그 대상이 우리에게 주는 감각 안에) 숨어 있다. 이러한 대상을 우리가 죽기 전에 만나거나 만나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우연에 달렸다. -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중에서


프루스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의지라는 구속 상태 속에서 이루어지는 기억의 단순한 재현은 과거의 그 어떤 것도 보존하지 않았다. 그에게 진짜 과거는 오히려 의지와 지성을 넘어선 영역에서 비롯했다. 뜻밖의 우연 속에, 어떤 물질적 대상 혹은 그 대상이 주는 감각 속에, 진짜 과거는 숨어 있다. 이를테면 마들렌 말이다.


어머니는 사람을 시켜 생자크라는 조가비 모양의, 가느다란 홈이 팬 틀에 넣어 만든 '프티트 마들렌'이라는 짧고 통통한 과자를 사 오게 하셨다. 침울했던 하루와 서글픈 내일에 대한 전망으로 마음이 울적해진 나는 마들렌 조각이 녹아든 홍차 한 숟가락을 기계적으로 입술로 가져갔다. 그런데 과자 조각이 섞인 홍차 한 모금이 내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깜짝 놀라 내 몸속에서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떤 감미로운 기쁨이 나를 사로잡으며 고립시켰다. 이 기쁨은 마치 사랑이 그러하듯 귀중한 본질로 나를 채우면서 삶의 변전에 무관심하게 만들었고, 삶의 재난을 무해한 것으로, 그 짧음을 착각으로 여기게 했다. 아니, 그 본질은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었다.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이 초라하고 우연적이고 죽어야만 하는 존재라고 느끼지 않게 되었다. -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중에서


프루스트의 주인공 마르셀은 어머니가 주신 마들렌 조각이 섞인 홍차 한 모금에서 잃어버린 시간이었던 어린 시절 콩브레를 발견한다. 그 작은 찻잔 속에서 정원의 꽃들과 냇가의 수련, 선량한 마을사람들, 집들과 성당, 온 콩브레와 근방이 형태와 견고함을 갖추며 솟아 나왔다. 프루스트에게 과거는 기억이 아니라 망각 속에 존재했다. 우리에게 어떤 힘이 있다면, 그것은 기억이 아니라 망각에서 비롯한다. 힘으로서의 망각은 어제와 다른 오늘, 그리고 오늘과 다른 내일을 이루는 원천이다.


KakaoTalk_20240515_140643771_09.jpg 몽마르트르에서 센강까지, 에펠탑에서 바라본 파리 시내


그런데 왜 하필 마들렌이었을까. 마들렌은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Maria Magdalena)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마지막까지 지켰고, 부활한 예수를 처음 만나 그 소식을 전한 이가 바로 마리아 막달레나였다. 그 마들렌이 '복종하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인 주름(plié)을 가진 조가비 모양이고, 그 이름이 생 자크(Saint Jacques, 성 야코보)인 것은 간단한 우연이 아니리라.


우리는 어떤 대상을 바라볼 때 그것을 시간과 장소의 관계 속에서 실존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하지만 프루스트는 그렇게 대상을 보지 않았다. 대상은, 켈트족의 신앙처럼, 어떤 영혼이 그 속에 갇혀 있고, 우리가 우연히 그 곁을 지날 때 영혼은 전율하며 우리를 부른다. 대상은 영혼을 포함하고 펼치며, 그것을 표현한다. 전체성을 구성하지 않은 채 나와 대상 사이에 수립되는 유대가 종교라면, 우리의 신앙은 대상이 표현하고 있는 숨겨진 진실을 발견하고 그것에 복종하는 것이 아닐까.


고양이 눈으로 순간과 영원을 보고 마들렌 맛으로 진실을 찾는 것, 습관이나 기억이 아니라 우연과 망각의 힘을 빌리는 것, 이것이 여행 속에 숨겨져 있고 또 여행이 펼치고 있는, 의미라는 여행이다.


KakaoTalk_20240515_140521477_06.jpg 생 제르맹 데 프레 수도원, 햇살이 십자가에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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