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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니 Oct 11. 2022

쌍둥이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9)

#9. 아리아나 그란데 알아?

어쩔 수 없다. 나는 조용필 키즈다. 통의동 7평 원룸에서 나를 지켜줬던 건 조용필 선생님의 노래였다. '바람이 전하는 말', '나의 노래', '내 청춘의 빈 잔', '내 마음 당신 곁으로', '프리마돈나'.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겠지만 나 역시 여러 이별을 경험했다. 내 마음에 자리한 사람을 떠나보내는 경험. 아빠는 우리 곁을 떠나 혈혈단신이 되었고, 언니는 새 남자 친구를 만나기 시작했고, 쌍둥이 언니는 일과 사랑에 빠졌다. 엄마 역시 사업으로 바빴다. 함께 놀던 몇 안 되는 동기와 동네 친구들은 일터와 짝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나를 지켜주던 첫사랑도, 연인도 결국 모두 나를 떠났다.


그러므로 10대 소녀였던 내가 30대 청년이 되기까지 유일하게 변함없는 존재감으로 나를 지켜주며 나와 이별하지 않는 유일한 존재는 오직 조용필 선생님 단 한 분뿐이다,

라고 생각했다. 살다 보니 내 생각이 꼭 맞는 건 아니더라.


내 전공은 영어영문학이다. 점수 맞춰 간 대학이었지만 전공을 선택하니 전공이 주어졌다. 영어영문학과에서 어떤 커리큘럼으로 무엇을 배울지 모르는 상태에서 전공을 신청했기 때문에 용감할 수 있었다. 

가본 적 없는 미국 지도를 모두 외워야 했고 미국 각 주의 약자를 암기해야 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의 미국 문학 작품 정도는 당연히 알고 있어야 했다. K. 보네거트의 『슬로터 하우스』같은 작품을 낭독하는 시간도 가졌다. 햄릿의 대사들을 모두 외워야 하는 험난한 시기도 보냈다.

한국의 옛날 연극 대사 한 줄도 모르는데 몇 세기 전 셰익스피어가 쓴 대사들을 줄줄 외워야 한다는 것이 자못 억울했지만, 이미 내가 선택한 학과는 영어영문학과였다. 미국과 영국 문화와 친숙해질 수밖에 없었고 그러니 팝송에 대해서도 당연히 많이 알 수 있었다.


나는 머라이어 캐리를 위시하여 R&B 최강 보컬들을 골라 들었다. R&B에는 시대를 초월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베이비페이스, 보이즈 투 맨, 바비 브라운, 테빈 캠밸, 하모니 사우엘스 등을 족보 학습하듯이 열심히 듣고 따라 했다. 미국의 1990년대 가왕들을 학습하면서 2010년대 초반 팝 씬의 가왕들도 부지런히 팔로잉했다. 미국에서 신곡이 나온 뒤 얼마 되지 않아 한국 음원 사이트에도 반영이 되니 나는 멜론의 POP 코너를 통해 여러 최신 팝송을 습득했다. '마룬파이브가 점점 댄서블 록으로 기울기 시작하는데, 과연 이들의 음악이 록이 맞냐'는 논쟁 기사를 읽으며 마룬파이브의 앨범을 더욱 열정적으로 청취했다.


하지만 내가 어떤 팝송을 알고 있다고 해도 쌍둥이 언니는 항상 나에게 새로운 팝송을 들려주었다. 늘 신곡이었다. 대체 어디서 그렇게 잘 찾아내는 건지 여하튼 참 대단한 애였다.


2013년은 조용필 선생님께서 ‘Bounce’라는 신곡을 내신 해이다. 조용필 키즈로서 나는 음악 감상 사이트 멜론에 상주하며 늘 그 노래를 반복 재생했다. 곡이 정말 좋았다. 이 남성이 60대의 목소리라는 것도 믿기지가 않았다. 그 곡은 하나의 사운드이자 하나의 드라마로 다가왔다.

조용필 선생님은 ‘Bounce’ 한 곡으로 그 해 가요계를 평정하셨다. 그 해 가을은 풍요로웠다. 나는 당시 가왕들의 노래를 돌려가며 들었다. 60대 가왕도 있었고 10대 가왕도 있었다. 조용필 선생님의 ‘Bounce’, 엑소의 ‘으르렁’, 아이유의 ‘분홍신’. 모두 걸작들이라 생각하며 분주하게 청취를 했다. 물론 내 평생의 쌀밥과도 같은 미국 가왕들— 베이비페이스, 테빈 캠밸, 보이즈 투 멘, 바비 브라운— 앨범과 함께(이들은 언제나 내 플레이리스트에 기본 세팅이 되어있다. 베이비페이스의 라이브 앨범은 요즘도 매일 듣는다).




그렇게 당대 한국 가왕들과 1990년대 미국 가왕들 노래를 바쁘게 영접하던 그 해 늦가을 즈음이었다. 어느 주말 저녁, 쌍둥이 언니와 함께 먹을 찌개를 끓이고 있는데 쌍둥이 언니가 주방으로 나오며 핸드폰으로 음악을 크게 틀었다. 자기가 멋진 곡을 찾아냈으니 함께 듣자는 무언의 제안이었다.


처음 듣는 팝송이었지만 잊을 수 없는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핸드폰 속에서 흘러나오는 여성의 쭉 뻗어가는 고음이 대단했다. 목소리는 달콤하면서도 청량했다. 곡의 짜임새와 트랙 구성에서 시대를 장악하겠다는 영민함을 느낄 수 있었다. 듣자마자 ‘좋다’라는 감상을 갖게 하려면 창작자는 대체 얼마나 많은 공을 들여야 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게 하는 노래들이었다.


찌개가 끓고 반찬이 완성되었다. 밥을 먹는 내내 앨범은 천천히 재생되었다. 좋다고 생각한 곡이 끝나면 그다음 트랙에서는 더 좋은 노래가 흘러나왔다. 무슨 곡인지는 당연히 몰랐다. 노래만 듣고도 어떤 가수가 부른 건지 맞추는 모습을 선보이고 싶었지만 그럴 능력은 내게 없었다. 조금도 있지 않았다.


“와, 노래 진짜 좋다. 이거 누구 앨범이야?”


힐끗 바라본 쌍둥이 언니의 핸드폰 안에는 한 어린 여성이 눈을 감고 무언가를 음미하는 모습이 흑백 사진으로 담겨있었다. 앨범 재킷이었다. <Yours Truly>라는 문구가 씌어있었다.


“아리아나 그란데라는 신인 가수야. 한국에서는 아직 인기 별로 없는데. 야. 이거 노래 좋지 않냐?”

“그러게. 와 얘 노래 진짜 잘 부른다. 고음 대박이다 어떻게 이렇게 깔끔하게 잘 불러?”

“내 말이. 얘 곧 인기 많아질 것 같아. 너도 챙겨 들어. 너 영문과 나왔잖아. 팝송 많이 알아야지. 노래 들어보니까 좋네. 얘 뜰 것 같지 않냐?”     



2013년 늦가을의 대화였다. 시대를 씹어먹겠다는 포부로 데뷔한 소녀 아리아나 그란데는 긴 시간 내내 기복 없이 내 플레이리스트를 지켜주는 든든한 여인이 되었다. 말하자면 아리아나 그란데는 미국의 젊고 어린 조용필인 셈이다. 나보다 어린 사람에게서 이렇게 대단한 업적을 얻을 수 있다니. 들으면 들을수록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매일 듣는 아리아나 그란데의 목소리에서 나는 하루를 살아갈 에너지와 사랑에 대한 솔직함과 담대함을 배운다. 나보다 어린 사람에게서 이렇게 귀한 걸 배울 수 있다면 나는 유치원도 다시 들어갈 수 있다. 그런 사람이 바로 나다. 그런 의미에서 아리아나 그란데를 내게 알려준 쌍둥이 언니는 인생의 은인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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