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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니 Oct 11. 2022

쌍둥이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10)

#10. 비서가 되었습니다

첫 회사를 다니다가 이직을 하게 되었다. 주 5일 근무인 회사에서 월화수목금 회식을 해댔으니 그 회사가 안 망할 리 없었다. 술만 들어가면 내 허리를 끌어안고 볼에 뽀뽀를 해대던 중년 여성이 사장으로 있는 회사였다. 물론 당연히 중년 남성보다 중년 여성의 입맞춤이 훨씬 나았지만 어디까지나 비교급의 일이다. 술에 약한 나로서는 참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회사를 바꾸면서 직종도 바꾸게 되었다. 새 회사에서 나는 비서가 되었다. 사회인으로 정식 출시될 때부터 쌍둥이 언니와 나의 직업은 같지 않았지만, 결국 정착하게 된 직업 역시 완전히 다르게 되었다. 쌍둥이 언니는 신제품을 만들고 그 제품에 콘셉트를 입히는 일을 했다.


비서. 늘 제멋대로인 데다가 쉽게 예민하고 피곤해지는 내가 비서가 되다니. 누구도 내가 비서가 되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비서였다. 성질 죽이고, 그저 주어진 일을 잘하면 되는 것이 비서이기 때문이다.


비서로 일하는 게 쉽지는 않더라. 기본적으로 처리해야 하는 루틴 위에 새로운 일들이 꽤 많이 주어졌다. 내 업무에 변주가 시작될 때는 여지없이 사장님의 개인적인 사항을 돕는 일이었다. 주어진 일을 처리하는 게 비서의 역할이지만, 그 주어진 일들이 범상치 않은 경우가 더러 있었다. 구글이 볼 지도 모르는 내 업무용 캘린더에는 그저 ‘Private Matters’라고 적어둘 수밖에 없는 일들. 매일 있었다.

아침 10시 20분에 50대 후반 남성의 수영복을 고르는 일, 드로즈와 트렁크 타입을 구별하는 일, 사장님이 (사모님이 아닌) 40대 여성과 함께 하기 좋은 뮤지컬을 골라드리는 일, 사장님의 결혼기념일 식사를 위한 호텔 레스토랑 예약하는 일, 사장님 강아지의 겨울옷을 고르는 일, 남성용 패딩 코트를 고르고 픽업하는 일, 벨기에행 비행기 비즈니스 좌석 중에서 어느 자리가 가장 좋은지 판별하여 예약하는 일, 사장님의 체형과 근육량에 맞춘 유니클로 니트와 히트텍을 골라 주문하는 일, 생선과 육류에 모두 어울리는 와인을 고르는 일, 압구정의 야경이 가장 잘 보이는 비스트로를 인스타그램으로 예약해드리는 일. 모두 쉬운 일들이었지만 나에겐 업무였다.


반복되는 일, 그 사이에 쉴 새 없이 끼어드는 다양한 부탁들을 잘 해결하는 게 내 일이었다. 사장님의 개인 일을 처리하는 와중에 메일과 메신저로 비서의 회신을 기다리는 부탁들이 쏟아졌다. 5분 자리를 비우면 5통의 전화가 와있는 날이 부지기수였다.


그런 날이면 퇴근길 이어폰에서는 어김없이 조용필 선생님의 ‘미지의 세계’, ‘창밖의 여인’, ‘추억 속의 재회’ 세 곡이 반복해 흘러나왔다. 조용필 선생님의 노래를 듣지 않고서는 배길 수가 없는 나날이었다. 물론 조용필 선생님 노래만 들었던 건 아니었지만, 조용필 선생님 곡은 반드시 들었다.

또 다른 가왕을 만나고 싶어질 때면 나는 퇴근길에 베이비페이스의 1997년 라이브 앨범을 중간부터 재생시키고 퇴근을 했다. 집에 도착할 때쯤이면 앨범 재생이 끝나 있었다.      



내 전임자는 비서였다. 나는 전임자로부터 물려받은 자리에 앉아 비서 일을 하고 있으니까. 내 전임자는 배우 전도연 씨를 닮은 82년생 여성이었다. 인수인계 당시 그녀는 7개월 차 임산부였다. 둥그렇게 차오른 배를 쓰다듬으며 나에게 수많은 업무 처리 방법들을 알려주었다. 낮에는 아기가 발길질을 심하게 했다. 여름 임부복을 뚫고 아기의 비트가 느껴졌다. 아기를 품은 여인을 그렇게 가까이에서 오래 마주하는 건 처음이었다. 신기해하는 나를 보며 내 전임자는 내 왼손을 끌어다 자신의 배 위에 살포시 올려놓고 나를 바라보았다.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에 어머니를 만들었다"라는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었다. 아기를 품은 여인의 눈빛은 어쩜 그리 달큰하던지 나도 그녀의 아기가 되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 전임자는 나와 눈을 맞추며 내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더니 천천히 자신의 윗배와 아랫배를 순환하듯 쓰다듬었다. 스물몇 해 동안 봐왔던 곡선들 중에 가장 유려한 곡선이었다. 둥그런 반원 위를 오가는 내 손바닥에 느껴지는 움직임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넌 참 굉장한 아이가 되겠구나.



7개월 된 아기를 뱃속에 품으면 말할 때마다 숨이 가빠온다는 것을 나는 그녀를 통해 알았다. 1분이 채 안 되는 짧은 통화에도 그녀는 숨을 골라야 했다. 태동이 심한 아기를 가지신 상태에서 회사를 떠나는 분이니, 전임자 퇴사 이후에는 더더욱 연락드리기가 조심스러울 것 같았다. 인수인계를 받을 때 하나부터 열까지 다 머릿속에 집어넣으며 조금이라도 애매한 건 바로 여쭤보곤 했다. 생각보다 비서가 할 일이 무척 많았다. 자잘한 업무, 작은 행동들이 중요했다. 내 전임자는 둥그런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일하다 보면 이것보다 업무가 더 많아질 수 있어요. 익숙해지면 괜찮겠지만 적응하는데 시간이 필요할 거예요. 내가 다 가르쳐주지 못한 것들도, 앞으로는 알아서 잘해야 해요.”


가르쳐주지 못한 것들도 앞으로는 ‘알아서’ 잘해야 한다니. 저는 아직 잘 알지 못하는데요. 덜컥 겁이나 여쭤보았다.


“혹시 만약에라도 제가 실수를 하면 어떡하나요?”


전임자는 짧게 말했다.


“안 됩니다.”


단호함에 기가 막혔다. 후임이기 이전에 대여섯 살 어린 아랫사람인데. 떠나는 마당에 동생 같은 사람에게 따뜻한 조언 하나 못 해주나 싶었다. 비서 일도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이고 사람이 하는 일인데 실수가 당연히 생기지 않겠는가. 그런 줄은 당연히 알지만 사람이니 실수도 할 수 있지 않겠냐고 웃으며 여쭈었다. 다시 돌아온 대답은 짧았다.


“절대 안 됩니다.”


배우 전도연 씨를 닮은 얼굴로 안 됩니다, 안 돼요 라는 말을 칼같이 말했다. 참 매서운 사람이구나 싶었다. 전임자 뱃속의 아기가 알까 봐 겁날 정도의 냉정함이었다.



전임자가 왜 그렇게까지 단호하게 말했는지 깨닫는데 많은 시간은 필요하지 않았다.

인천국제공항에서 중국 상하이까지 가는 데는 고작 2시간. 일반 성인 여성 기준으로 혜화역에서 이화여대까지 걸어가는 시간과 같다. 짧다면 짧은 비행시간. 하지만 중국이 참 멀다는 생각을 한다. 거래처 접대를 위해 중국으로 출국하시려는 사장님의 비행기 티켓은 잘 예약해두고, 정작 중국 비자 신청을 하지 않은 것이다. 사장님은 공항에 모인 거래처 사람들 앞에서 그 사실을 알게 되셨다. 보통 큰 망신이 아니었다.


예정대로였다면 비행기 안에서 느긋한 낮잠을 주무시고 계셨어야 할 사장님은 결국 사무실로 출근하셨다. 죄송함에 고개를 푹 숙이고 인사를 올리는 나에게 사장님은 딱 한 말씀만 하셨다.


“자네, 내 비서인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당신 최고의 인복’이라며 추켜세우던 제 비서가 실수를 했으니 얼마나 짜증이 나셨을까. 두어 달 동안은 얼굴을 못 들고 다녔던 걸로 기억한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께가 차가워져 나는 이 기억을 잘 떠올리지 않는다.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실수를 떠올린다면 단연 그 일이다. 나 같은 사람은 나도 싫은데, 상사라고 좋았을 리 없었을 것이다.


내 실수는 카카오톡을 통해 쌍둥이 언니에게도 실시간으로 보고되었다.


- 나 어떡하지. 대박 실수함ㅠㅠ


쌍둥이 언니는 혀를 끌끌 차면서 진심으로 안타까워했지만 이어 말했다.


- 괜찮아. 어쩔 수 없잖아. 한번 이렇게 실수했으니까 다음부터는 이 실수는 절대 안 하겠지.     


어떻게 나를 이렇게 침착하게 위로해줄 수 있는지. “다음부터는 ‘이 실수’는 절대 안 하겠지.” 비서로 일하며 겪게 될 수많은 실수와 민망함과 자책 중 하나일 뿐이라는 걸, 쌍둥이 언니는 그 한 문장으로 알려주었다.


    

그래도 상사 복이 없진 않았는지 1년 뒤 내 보스는 그 일은 잊으라고 말씀하셨다.


“역시 중국은 나랑 안 맞아. 그래서 괜찮아.”



실수가 허용되지 않는 곳에서 이런 상사를 모셨으니 실수를 하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이 생겼다. 하루 종일 내가 만든 틀 안에 잔뜩 조여지고 나면 퇴근길마다 나는 조용필 선생님의 곡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예전에는 순수하게 음악 감상을 위해 들었다면, 이제는 주술적 염원을 담아 노래를 듣게 되는 것이다. 가왕의 에너지를 흡수하며 ‘진취적이면서도 실수 없이 완벽한 이 곡처럼 일할 수 있게 해 주세요’라는 염원을 불태웠다.


퇴근길 엘리베이터에 오르자마자 나는 멜론 플레이리스트 중 ‘필사운드’를 꾸욱 눌렀다. 부드럽게 재생되는 내 인생의 사운드트랙 <바람의 노래>.


“살면서 듣게 될까. 언젠가는 바람의 노래를.

세월 가면 그때는 알게 될까. 꽃이 지는 이유를.”


역시 우리 조용필 선생님이시다. 나의 가왕은 확실히 다르시다. 가사로 내 마음을 후벼 파시다가도 이내 끝음을 흐느끼시며 나를 어루만지신다.


“나의 작은 지혜로는 알 수가 없네.

내가 아는 건 살아가는 방법뿐이야.

보다 많은 실패와 고뇌의 시간이

비켜갈 수 없다는 걸 우린 깨달았네.

이제 그 해답이 사랑이라면

나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하겠네.”     



가왕의 목소리를 들을 때면 나는 생각한다. 나는 역시 조용필 키즈라고. 자랑스럽기도 하다. 이렇게 꽁기하고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허탈감이 밀려올 때쯤이면, 조기교육과 반복학습으로 체득한 조용필 선생님의 노래를 곁에 두고 마음을 달랠 수 있으니. 조용필 씨가 없었다면 나는 20대와 30대, 계절 바뀔 때마다 찾아왔던 수많은 울렁임을 쉬이 건너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퇴근길에서 가왕의 목소리를 접할 때면 나는 늘 기도했다. 오늘의 내가 힘들고 어려웠어도 집으로 돌아가 만나게 될 쌍둥이 언니의 하루는 제발 나와 달랐기를. 내가 이렇게 힘든 하루를 보냈으니 어쩌면 쌍둥이 언니의 하루 흐름이 나와 비슷할지도 모르지만, 아무리 쌍둥이여도 오늘 내가 겪은 괴로움만큼은 닮지 않기를.     


실수하고 싶지 않아 악착같이 노력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덕분에 해를 거듭할수록 상사의 사랑을 듬뿍 받게 되었다. 비서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은 아쉽지만, 적응했고 괜찮았다. 직업 만족도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내가 앉은자리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수행 비서가 아니다. 상사의 전략을 함께 고민하고 수정해나가는 일을 하는 비서다. 사장님 앞으로 들어오는 모든 서류와 메일은 반드시 내가 먼저 보게 되어 있다. 대외비로 사장님 단독으로 보시는 카톡 메시지 역시 사후에라도 내가 반드시 확인하게 되어있다. 사장님 앞으로 통하는 모든 서류는 어떤 식으로든지 내가 쥐게 된다. 내가 원하지 않아도, 그렇게 되게끔 모든 것이 세팅되어 있다. 수많은 서류와 중압감 속에서 나는 부지런히 유영해왔다. 자리가 나를 만들었다.


상사가 나를 믿고 의지하는 날들이 조금씩 늘어갔다. 모든 직장인의 끝은 퇴사라지만, 그래도 상사가 건네 오는 “최고야” 한마디는 언제나 좋은 법이다. 그런 말이라도 곱씹지 않았다면 나는 일에 허덕이다 조용히 침잠해버렸을지도 모른다.     


보스가 건네 오는 칭찬을 아침에 받으면 하루가 설렜고, 오후에 들으면 저녁 내내 쌍둥이 언니에게 자랑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 그때는 남자 친구도 있었고 친구도 여럿이었지만, 내 보스에게서 받은 칭찬만큼은 쌍둥이 언니에게 가장 먼저 그리고 많이 하고 싶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와 잔뜩 때꾼한 쌍둥이 언니 얼굴 위로 비치는 흐뭇해하는 웃음을 볼 때면 나도 밥값 하는 사람이 된 것 같아 순식간에 행복해졌다. 당신의 공로 덕에 제가 이만큼 사회인이 되었답니다. 안심시켜주고 싶은 마음. 다행히 내 바람은 그녀에게 잘 전달된 것 같았다.



우리는 똑같은 손가락을 말랑거리고 꾹꾹 눌러보기도 하면서 부드러운 살결과 체온을 나누었다. 그렇게 하루의 피로를 씻어내며 사회 초년생 시기를 버텼다. 그럴 때면 마치 엄마 뱃속에 있을 때의 우리도 이렇게 놀았겠구나, 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내 전임자가 가쁘게 숨을 내쉬며 품었던 그 둥그런 반원. 우리 엄마는 더 큰 반원을 안고 버텼겠구나. 엄마는 철의 여인이니까. 그 속에 무려 두 명이나 들어가 웅크리고 유영하며 숨을 쉬었겠구나.


다정한 목소리, 따뜻한 손 끝, 보드라운 감촉. 쌍둥이 언니의 손을 잡고 등을 쓸어내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우리가 쌍둥이이기 때문에 가능한 힐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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