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누구냐?
서로의 얼굴과 이름, 나이 등을 모른 채 이성친구를 만난다는 것은 설레는 일이다. 사람은 예측하지 못하는 불확실한 상황에서 알 수 없는 긴장감을 느낀다. 이때 긴장감은 사실 두려움일 수도 있지만 사람은 이 긴장감을 설렘이라는 아름다운 감정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그런 솜사탕 같은 설렘은 실체를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극도로 동물적인 판단을 이끌어 낸다. '나는 이 사람을 좋아하는가? 아니면 이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가?. 이 고민은 단 몇 초면 해결된다. 고민의 결과는 99.9% '둘 다 아니다'라는 결론을 내린다.
우리 학교에 아주 이상한 놀이가 유행했다. 놀이의 규칙은 간단하다.
한 반에 모든 친구들이 각자 공책을 하나씩 준비한다. 그 공책에는 누구도 자신이 누군지 들어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공책에는 알 수 없는 누군가를 위한 질문을 몇 가지 적는다. 예를 들면 '당신의 별자리는 무엇인가요?', '당신이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취미와 특기는 무엇인가요?'라는 것들을 적는다.
그렇게 모든 반 친구들이 적은 공책은 반장이 걷어서 쉬는 시간에 다른 반 앞에 던져 놓는다. 그럼 다른 반 친구들은 아무 공책이나 집어 들고 그 질문에 답을 적는다. 그렇게 질문과 답변은 공책을 다 쓸 때까지 계속된다. 이 놀이를 누가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꽤 재미있는 놀이라고 생각했다.
그날도 예외 없이 나도 한 권의 공책을 집어 들었다. 열어 보니 어김없이 예상 가능한 질문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음... 나는 11월에 태어났고... 전갈자리에... 혈액형은 A형... 그리고...'
대충 답변을 적고 나는 뒷장에 내가 하고 싶은 질문들을 적어갔다.
'지금 좋아하는 사람이 있나요? 혹시 남자친구가 있나요? 친한 친구는 몇 명이나 있나요?'
이 놀이가 이상한 점은 별거 없어 보이지만 질문에 답변을 기다릴 때면 너무 긴장되고 설레는 기분이 들었다.
'누가 내 공책을 받았을까? 그 아이는 이쁠까? 혹시 남자친구가 있는 건 아닐까? 나 같은 사람도 좋아하려나? 혹시 사귀자고 하면 어떻게 하지? 무슨 선물을 준비할까?'
생각의 흐름은 점점 산으로 가고 있었다.
한 가지 내 공책에 특이한 점은 이 공책을 주고받았던 친구의 이상한 습관이었다. 항상 이 친구는 답변은 보라색 볼펜으로, 질문은 초록색 볼펜으로 적어줬다. 그래서 그런지 유독 내 공책만 알록달록했다. 나름 특이한 공책이었다.
'아 혹시 내가 질문을 놓치거나 헷갈릴 수 있으니까 그런가?'
나는 나름 그 친구가 나를 배려해서 이렇게 적었다는 생각을 했다.
또 한 가지 이 놀이의 부작용이자 특이한 점은 복도를 지날 때 나타났다. 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지나던 복도가 이제는 분위기가 바뀌었다.
'혹시 쟤가... 에이.. 아닐 거야... 그럼 혹시 쟤가 내 공책에 주인공인가? 에이... 저렇게 이쁜 얘가 날 좋아하지는 않겠지?'
이 놀이를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망상에 걸린 것 같았다.
놀이는 몇 주간 계속됐다. 이제 나를 미치도록 설레게 한 여자아이가 너무 궁금해서 못 참을 지경까지 왔다. 나를 포함한 모든 친구들은 마치 독립군 속에 몰래 들어온 친일파를 찾는 듯한 눈으로 한 명 한 명 자신들의 짝꿍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내 상상 속의 짝꿍을 찾는데 그리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효선이는 우리 반에서 가장 똑 부러지는 여자아이다. 생김새만 봐도 오밀조밀 귀엽게 생겨서 무엇이든 해낼 것 같은 친구였다. 조금 살이 통통한 것을 빼고는 나름 다른 반과 우리 반에서 인기가 있는 친구였다. 그렇다고 너무 기가 세지도 않았고, 특히 여자아이들 중 무슨 일이 생기면 모두가 효선이에게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 누군가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고 상대방을 항상 배려해 주는 멋진 친구였다.
물론 나도 그런 효선이가 좋았다. 물론 이성적으로 좋아하기보다는 항상 앞서서 무슨 일을 해결하고 친구들을 도와주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또, 당시에 나는 얼굴에 여드름이 올라오고 있었고 내 소심한 성격은 더 나아지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누군가를 좋아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고 고백한다면 나는 100% 차일 것 같았다.
사건은 어느 날 예상하지도 못하게 일어났다.
그날도 어김없이 내 상상 속 여자친구의 끊임없는 질문에 답변을 마친 나는 화장실에 가기 위해 일어났다. 화장실에 다녀온 나는 내가 적었던 공책이 사라진 것을 알았다.
' 아~ 반장이 걷어 갔구나?'
늘 우리 반 반장은 말도 안 하고 공책을 걷어가 버려서 그날도 난 반장이 공책을 가져갔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앉아서 교실 뒷문을 무심코 봤는데 거기에 효선이가 서있었고 잠심 나랑 눈이 마주쳤다.
'뭐지? 왜 나를 빤히 쳐다보지? 이상하네? 내가 또 뭘 잘못했나?'
내가 그렇게 생각하던 중 효선이는 미소를 보이며 교실 밖으로 나갔다. 10분 정도 지났을 때 효선이와 다른 친구들이 내 자리 뒤에 아무 말 없이 왔다. 전혀 생각도 못했다. 다른 친구들은 효선이를 내가 있는 곳으로 밀었고 효선이는 나한테 공책 한 권을 내밀었다. 내 상상 속의 여자친구는 효선이었다.
갑자기 주변에 모든 친구들이 환호성을 질렀고 효선이가 건네준 우리만의 추억이 담긴 공책을 나는 받았다. 나는 너무 부끄러웠다. 누군가로부터 이렇게 주목을 받아본 적도 별로 없었고, 더구나 마치 공식 커플이 되는 듯한 이 상황이 너무 싫었다.
부끄러움을 참기 힘들어 나는 효선이에게 받은 공책을 반으로 찢어버렸다. 도대체 내가 왜 그러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지만 나는 그렇게 했다. 결국 효선이는 울면서 교실을 뛰쳐나갔고 다른 친구들은 나를 벌레 보듯이 쳐다봤다. 그리고 난 책상에 엎드려 모두가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런 파렴치한 일이 일어난 후에도 효선이는 나를 많이 좋아해 줬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무슨 기쁜 날이 있으면 효선이는 항상 나에게 작은 선물을 주었고 나도 그런 효선이 게는 한없이 좋은 남자사람친구가 되었다. 우리 둘은 그렇게 국민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꽤 괜찮은 친구가 되었다.
가끔 나는 왜 신은 그냥 한 종류의 사람만 만들면 되지 꼭 남자와 여자로 나눠놨는지 궁금했다. 번식과 생존을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그렇기에는 너무 비효율적이다. 서로 전부를 이해할 수도 없고 때로는 싸우기도 하고, 때로는 서운해하기도 하는 그런 다른 존재. 하지만 내게 여자라는 사람도 좋은 기억으로 남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 효선이라는 친구 덕분에 남자와 여자가 있는 한 가지 이유를 찾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