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aemyungdan Nov 14. 2023

다가오고 있다니 다가가고 싶었다

가을의 흔적



곧 초저녁 연기가 피어오를 것만 같은 흐린 날씨. 안개처럼 자욱한 초미세먼지까지 시야는 우중충하고 을씨년스럽다




남편과 나는 강릉으로 향했다

이맘때가 설악산 단풍이 절정이라는 뉴스를 2주 전에 우연히 귀에 담게 되었다 단풍이라는 기별이 있으니 오랜만에 먼 발치에서라도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일년에 두어 번 가는 곳이 강릉이지만 근처의 설악산이 궁금하지는 않았다 단풍으로 손짓하기 전 그 명산은 고유명사가 아닌 보통명사가 돼 버린다 구체성도 유정성도 잊은 가장자리였다

그러나 지금의 마음을 놓치고 싶지는 않다

시간이라는 것이 가을을, 단풍을 순식간에 홱 낚아채 갈 것을 아니까 말이다




시틋한 일상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은 항상 이긴다

이름 없는 날들의 어느 하루 이름표를 달아주고 싶은 마음이다. 사용할 연차가 많아 남편과 시간을 맞췄다. 설악산 단풍도 단풍이지만 나는 강릉의 노정을 더 기웃거릴 것이다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한참을 달렸는데도 나무는 푸른기가 훨씬 많았다. 우주의 신호가 아직 약한지 발색이 어지중간하다. 빨간 핀을 꽂은 듯한 잠깐 잠깐의 단풍도 날씨 탓에 윤기를 잃어 낮은 명도와 채도를 보였다

오히려 산이나 가로수보다는 높다란 방음벽을 타고 올라간 담쟁이덩굴 잎이 오히려 내가 기대했던 단풍색과 닮아 있었다

감고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습을 서서히 채우며 기어올라가 희망과 조화를 노래한 담쟁이덩굴.

그 모습 어디에도 악착같은 독기는 없다

독립적으로 종자를 생산하는 담쟁이덩굴의 천부적 자산이 생명력 있게 이 도시를 피복했고 이 가을을 아름답게 수놓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걸 걷어갈 가을의 건조함에 담쟁이도 어쩔 수 없다

큰 트럭이 지나갈 때마다 들썩거리며

떠들렸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담쟁이는 이 가을과 작별하고 있었다




장미산장이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장미산장으로 가자

풍광 좋은 산자락에 오롯하게 세워진 곳

그 이름이 장미산장이라면

우거진 장미넝쿨처럼 열정을 불태우며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겠지

맑고 또렷한 새소리에 영혼의 숲이 깨어나고

올가미는 뚝뚝 끊어져

자유를 위한 절규는 멈추겠지

욕망이 마르고 영육의 포만감을 노래하는

그 곳이 가장 자유롭고 풍요로운 쉼터리라




장미산장은 별장도 힐링펜션도 아니다

가장 자유롭고 풍성한 쉼터, 흔치 않은 가치의 태기산 밑 한식집이다. 우연히 만난 이 곳 때문에 강릉행 나들이는 언제라도 즐겁다. 전국에서 찾아오는 맛집이다. 음식에 대한 열정과 자부심이 없다면 이런 음식을 내놓을 수 없다. 하물며 일관되게 기본에서 친절하다

곤드레밥이 유명하고 손수 만든 밑반찬은 다 맛있다. 무엇보다 짜지 않아 금방 말끔히 비워진다

가격이 착해 가성비 최고다. 도시에서 먹으면 2만원이 훌쩍 넘을 가짓수며 맛이다

고향의 맛, 집밥 같은 정성의 음식을 먹다 보면 사회의 온갖 굴레는 잠시 잊게 되고 몸과 마음이 행복해져 내 영혼에선 맑은 새소리가 들릴 것처럼 평화롭다




횡성 작은 시골 마을 어느 집앞 좁은 길에 먼지가 일까 천천히 들어서면 곧바로 파란색 기와집 한 채가 막다른 곳에 있다

목금토 3일간만 문을 열어 근처 분들도 겨우 가 볼 수 있다는 베이커리카페 이가본때,

화덕이 있는 건물 굴뚝에서 연기가 흩어지지도 휘지도 않고 천천히 곧게 올라가고 있다

흐리지만 비는 오지 않을 모양이다

그 옆에는 파종한지 얼마 되지 않은 파릇파릇 호밀밭이 펼쳐져 있다. 거둬들이는 이 가을 시작하는 생명도 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순환하는 이 자연은 무엇이 앞이고 무엇이 뒤인지 알 수 없다. 앞뒤가 있는 것일까? 조금 살아보니 우리네 인생도 그랬다. 앞서는 것이 반드시 앞이 아니었고 뒤에 있는 것이 언제나 뒤는 아니었다

이 여린잎이 강원도의 추운 겨울을 난다니 호밀은 이미 그 안에 봄을 숨기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 카페의 맛있는 통밀차, 밀라떼의 재료가 되는 호밀의 약진을 응원한다




미닫이 나무문을 열고 들어서면 갈색 종이 냄새 연필 냄새 나는 젊은 부부가 손님을 맞는다

주인장의 고상하고 담백한 친절이 여전하다

2년만에 찾았더니 빵종류가 늘었다. 그래도 빵은 많지 않다. 시골빵이란 이름처럼 화덕에서 구운 순박한 기본빵 몇 종류가 다다. 삶속으로 들어온 빵의 시작도 이렇지 않았을까? 한끼의 양식을 앞에 놓고 손으로 뜯어 꼭꼭 씹어 먹는 빵은 감사였을 것이다. 이곳의 빵도 내돈내산이 아니라 투박한 오리지널 집빵이 느껴지는 푸근함과 좋은 시간을 만들어 주는 고마움이 있다. 화덕 카스테라가 눈에 들어온다




크레마라고 하는 황금색 커피 거품이 원두 본연의 풍미를 살리고 있다. 쓴맛이 있지만 어떤 사람들에겐 그것이 커피맛의 기준이 되기도 한다  커피가 맛있다는 얘기는 꼭 나온다.

화덕 카스테라는 씹으면 사라지는 카스테라는 아니다. 적당히 달고 적당히 씹을 것이 있다.

생색내지 않는 맛에 물리지 않는다

입을 벌리고 박수 칠 맛은 아니지만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맛이다. 먹는다가 아니라 주거니 받거니 커피와의 케미를 음미하게 된다. 무엇이 특별하게 받아들여진다면 그날은 행복한 날일 것이다. 오물오물 씹다 보니 한판이 금세 사라졌다




실내는 6인용 긴 나무 탁자 하나, 4인용 탁자 하나가 있다. 협소하다. 그러나 카페는 넓다. 문을 열고 나가면 운치 있는 공간이 여기저기 마련돼 있다. 10월의 밖은 아직 괜찮다

젊은 커플은 새끼 들고양이를 따라다니며 웃기도 하고 장난도 친다. 그리고는 호밀밭과 멀리 국도변을 바라볼 수 있는 실외 긴 탁자에 앉아 커피를 마신다. 그렇게  앉았다 일어섰다를 반복하다 카페문을 열고 들어와 고한다. 고양이가 그만 도랑에 빠져 못 나오고 있다고.

이 카페에선 쫓길 일도 허둥댈 일도 없다. 그냥 마음 흐르는 대로, 즐겁게 나라는 주어가 된다




카페는 창이다. 큰 통창이 있다

창 앞에선 스스로가 되거나 무아가 된다

맥락 따위는 필요 없다

기계처럼이 아니라 자연처럼이 된다. 그냥 있다. 창밖 저편만 있다. 창을 앞에 두고 이편이 사라진다

나지막한 클래식 선율이 통창밖의 나뭇잎을 살랑살랑 흔들고 있다. 저 멀리 국도변 너른 밭에는 흰 부대들이 줄지어 서 있고 그동안 공들인 그들의 결실을 부지런히 채운다

고양이는 작은 혀로 큰 대야에 파문을 일으키며 물을 핥는다

가을에 잠긴다




문득 이쪽,

사람 세계의 창이 보인다

사람의 창은 그들의 말이다. 대화다

살짝 열린 창은 없다. 그들의 창이 활짝 열려 있다. 춥지 않다. 따뜻하고도 다정하다. 각자의 매력이 풍긴다. 맛있는 커피가, 맛있는 디저트가, 이완과 휴식을 주는 소중한 인연이 그들의 창을 활짝 열게 한다

사람과 사람이 얼굴을 맞대니 흥이나 푸념이다. 희로애락이다

별것 아닌 말에 흥이 오르고 서로의 감정을 북돋우며 웃음이 터진다. 풍요로움이 부다. 그들은 해외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듯했다

복작이고 부글부글했던 추석 전쟁

자식, 며느리에게  뼈를 갈아넣었다는 저쪽 여사님들의 대화가 손으로 턱을 괴게 하며 세상 공부를 하게 한다. 하나 둘씩 풀려나온 뻣뻣한 감정들이 맞장구로 소화된다. 서로를 보살피는 그들의 감정이입이 곰삭았다. 서로의 마음을 비비는 그들의 풍경이 울긋불긋하다. 툭 터놓는 대화가, 감정의 정화가 다시 만남을 부를 것이다. 이 카페처럼, 이 가을처럼





소실점이 느껴지는 긴 터널을 지나 다시 강릉으로 향했다

태기산 터널 속사터널 대관령을 넘었다. 자연 앞에 만전을 기할 순 없다. 한낱 인간이..

비가 뿌리기 시작했다. 봉평에서 산 메밀전병과 남편의 백팩이 고개를 넘는 동안 오른쪽으로 미끄러졌다 왼쪽으로 미끄러졌다를 반복했다. 단풍도 이리저리 가을 바람에 흔들리며 산행을 하리라. 그러나 순식간에 결단하리라.

청군과 홍군이 팽팽하게 경기를 벌이고 있지만 단풍경기의 치어리더들이 경기를 완승으로 이끌어 갈 태세다. 단풍이 금세 파도타기의 세레모니를 할 것 같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거문고 리듬이 점점 빨라지는 꽹과리 가락의 변화가 단풍의 기세를 응원하고 있는 듯하다




자연은 결코 서두르거나 늑장부리는 일이 없다

설악산의 단풍은 역시 선구적이었다

대한민국 단풍의 신호탄이 분명했다

미시령 옛길을 따라가다 만난 설악산 울산바위는 굽이치는 단풍을 거느리며 남다른 위용을 과시했다. 소문난 잔치에 몰려든 추객들은 행복해질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한 곳을 바라보며 연신 셔터를 눌러댔다. 흥분과 충만함의 성취에 일상의 찌꺼기는 활활 연소됐다. 공감으로 함께였지만 스스로의 감정으로 자기다워지기도 했다. 즐거운 비명도 심오한 고통도 있으리라. 겸손한 빈자로 무엇을 채우리라




가을에 다가갔다

선명하게 응시했다. 설악산이 응답했다

나무와 사람들은 단풍으로 자신의 생을 연주했다

강요도 방해도 없는 자연의 솜씨였다

하이든 첼로 협주곡 2번  

알레그로 모데라토 선율이 짙어지는 가을의 손을 이끈다




매거진의 이전글 지금 모습이 너의 진짜 힘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