눌지왕 집권 당시 고구려의 번영과 팽창 정책으로 인해 자주적인 행보를 이어 갈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더군다나 고구려에 볼모로 가 있는 복호와 왜에 있는 미사흔은 그의 형제였고, 동시에 외교적 문제에서 아킬레스건이 될 수도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눌지왕은 제위에 오르자마자 명신(名臣) 박제상으로 하여금 이역만리에 떨어져 있는 형제 복호와 미사흔을 송환하기 위해 외교적 노력을 시도했다.
눌지왕은 먼저 고구려에서 복호를 송환하려고 하였다. 박제상 열전에는 박제상이 장수왕 앞에서 "이웃 나라와 친교(親交)하는 도리는 정성과 신의뿐입니다. 왕자를 볼모로 교환하는 것은 오패(五霸)에도 미치지 못한 행위로서 참으로 말세(末世)의 일입니다. 지금 저희 임금의 사랑하는 아우가 이곳에 있은 지 거의 10년이 되었습니다. 저희 임금은 어려움에 처한 형제를 도와주려는 뜻을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생각하며 잊지 않고 있습니다. 만약 대왕께서 고맙게도 그를 돌려보내 주신다면, 마치 아홉 마리의 소에서 털 하나가 떨어지는 것처럼 아무런 손해가 없겠지만, 저희 임금이 대왕께 입은 은덕(恩德)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왕께서 이에 대해 유념해 주십시오."라고 말한 것이 나온다.
박제상의 말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돌려주시죠"라고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군주는 '임금'이라 하는 반면 장수왕은 '대왕'이라 칭하여 장수왕의 권위를 높임으로써 상대의 감정을 기분 좋게 자극하는 노련한 외교의 화술을 엿볼 수 있다. 그런 와중에 춘추5패와의 비교와 이웃 나라와 친교하는 도리는 '정성과 신의뿐'이라면서 적절히 볼모를 송환해 줄 것을 요청하며 자존심을 긁는 말이 들어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동시에 '아홉 마리 소에서 털 하나 떨어지는 것'이라는 비유로 돌려준다고 손해 볼 일이 없음을 강조한 것도 박제상의 재치를 느끼게 하는 부분이다. 그러면서도 '은덕'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을 보면 자신의 위치를 알고 장수왕의 심기를 최대한 거스르지 않으려 노력한 것이 돋보인다.
이러한 박제상의 빛나는 협상 능력으로 장수왕은 이에 응하여 복호를 돌려주기로 하였고, 박제상은 복호를 신라로 돌아오게 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때가 418년이었다.
이후 박제상은 왜(倭)에 있는 미사흔을 송환하려고 다시 길을 떠났다. 삼국사기 박제상 열전에 따르면 현재의 울산인 율포(栗浦)에서 아내와 헤어지며 "나는 장차 명을 받아 적국으로 들어갈 것이니 나를 기다리지 마시오"라며 비장하게 이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박제상의 아내는 남편이 돌아오길 계속 기다리다 돌이 되었다고 하는 전설이 있으며, 이것이 망부석(望夫石)의 유래이다.
왜나라로 간 박제상은 자신을 신라를 배반하여 왜에 투항하려는 사람인 것처럼 꾸며 왜에 접근했으나, 왜나라 사람들은 쉽게 믿지 않았다. 그러나 왜의 군대가 신라에서 고구려의 군대에게 격파당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왜나라에서는 미사흔과 박제상을 장군으로 보내자는 이야기가 오가기도 하였다.
이러한 왜나라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박제상은 물고기를 잡으며 시간을 소일하며 보내다가 미사흔에게 혼자 탈출하기를 권하였다. 같이 나가면 둘 다 무사하지 못할 것 같은 마음에 박제상은 본인이 희생하여 왕자인 미사흔을 탈출시키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박제상은 이 일로 인해 왜나라에서 분신당해 죽임을 당하고, 미사흔은 신라로 돌아오는 데 성공한다. 이 공을 인정받아 박제상은 대아찬에 추증된다.
이 사건은 왜와 고구려에게 정치적으로 족쇄 역할을 하고 있던 볼모 생활을 하고 있는 자신의 형제들을 모두 송환함으로써 정치적으로 한 걸음 더 자립할 수 있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는 더 이상 고구려에 귀속되지 않고 한 나라로서의 자립을 위한 눌지왕의 의지를 보여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일련의 볼모 송환 사건들은 눌지왕의 아버지인 내물왕의 부자상속 정책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훗날 자신의 장남 자비(慈悲)마립간, 손주 소지 마립간으로 이어지는 승계 수순을 보면 '김씨 왕위 세습'이 얼마나 강화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특징은 왕뿐 아니라 왕비까지 김씨가 독점했다는 점이다. '김씨 마립간 시대'의 독특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후 눌지왕은 정책 입안에 더 속도를 냈다. 그 첫 번째 수는 나제동맹이었다.
눌지왕의 신의 한 수 나제동맹(羅濟同盟)
신라는 433년 백제 비유왕과 화친을 맺고, 454~455년 군사적 합동 작전도 함께 했다는 기록이 있는것을 보아 나제동맹의 서막이 눌지왕을 통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만일 나제동맹이 없었다면 강국 고구려가 통일을 이뤘을것이나 고구려가 통일을 못한 실질적 이유는 북중국 정권과 접경지역에 주둔해야 할 군사 이외의 군대로만 나제동맹을 깨뜨리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로인해 고구려는 제한적 위협속에 백제와 신라의 상생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450년 신라 하슬라(현재 강릉) 주 성주가 고구려 변경의 장수를 죽여 외교적 마찰을 빚은 사건은 신라가 강국고구려에 대등하게 겨룰수 있는 힘이 움트고 있음을 보여주는 서막이었다.
5년 후 백제 개로왕 원년인 455년에 고구려가 백제를 침입하자 신라가 백제를 구원하기 위해 원병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부터 20년 후 백제 개로왕이 죽고 백제는 한성이 함락되지만, 웅진에서 다시 일어날 시간을 벌 수있었던것은 나제동맹 덕이라고 할 수 있다.
눌지왕의 나제동맹은 자주독립의 일환으로 시도된 정책이었다. 나제동맹이라는 이 한 수가 삼국 경쟁 구도를 바꿔놓았다. 실질적으로 고구려가 전성기였던 상황에서 약체인 백제와 신라가 동맹을 체결한다는 것은 고구려의 침략을 감내해야 할 위험부담이 항상 존재하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백제비유왕과 함께 나제동맹을 체결하였다는 것은 눌지왕의 혜안과 담력이 빛났다고 할 수 있다.
신라는 든든한 동맹국을 하나 만듦으로써 고구려의 막강한 공격을 견뎌낼 면역력을 얻었다. 이는 모두 공수 동맹이라는 변수를 만들어 고구려의 통일을 막은 것이었다. 각자 도생의 길을 걸었다면 신라는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신라의 발자취를 돌이켜 볼때 레이트블루머의 성장은 타고난 기질적 본성에 자신을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처한 환경을 명확히 분석하고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거대한 삶의 문제들을 주위 사람들을 잘 활용하여 힘을 얻을수있는 지혜와 환경을 재설정하는 것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남들보다 부족한 자원과 때가 늦었다면 남들이 가지 않은 길과 방법을 찾아가는 지혜가 레이트블루머가 살아남는 방법이라는 것을 신라를 통해 다시 배운다 .
고구려 승려 묵호자로 인한 불교의 전래
신라에 불교가 전파된 것도 눌지왕때라는 것을 아는가? 삼국사기 법흥왕 본기에 따르면 528년 불교 공인의 배경에는 눌지왕 시기 457년에 고구려에서 묵호자라는 승려가 신라로 불교를 전래시켰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것은 법흥왕이 불교를 국교화 시키기 약 70년 전으로 써 법흥왕 이전에 이미 불교가 신라에 유입되었다는 것을 볼 수있다. 불교라는 외래종교가 유입되었을때 눌지왕은 과감히 불교를 받아들여 국교로 만들 기틀을 마련했고, 법흥왕 때 비로서 국교로 까지 발전할 수 있는 큰 전환점을 맞게 된다.
주권회복의 상징 눌지왕
이런 풍전등화 같은 상황에서 신라의 발전에 토대를 닦은 눌지왕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 수 있을까? 레이트블루머 신라를 마라톤 출발라인 선에 설 수 있게 만든 눌지왕은 환경 재설정과 현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함으로써 고구려라는 거대한 세력에 맞서서 생존할 수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느껴야 할까?
주권회복의 상징인 눌지왕은 어쩌면 신라의 고구려간섭기를 벗어나려는 처절한 싸움과 자주적인 행보를 이어갔던 신라의 첫 왕이었다. 반 고구려 정책과 신라의 내적 동기부여를 주었고 신라의 북진정책의 기반이 되었다는 것이 큰 의미로 다가온다. 지증왕, 법흥왕, 진흥왕으로 이어지는 6세기의 명군들의 비전은 모두 눌지왕의 토대 위에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어느때나 종속관계는 있기 마련이었다. 신라는 고구려의 반 예속 관계였다. 신라 내 고구려 잔당들을 모두 없애고 독립하려 했던 눌지왕의 용기있는 실행력은 통일신라로 이어지지 않았는가. ‘자립’이라는 것은 쉬운게 아니다. 우리도 경제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누군가에게 종속되지 않고 당당하게 홀로 선다는 것이 얼마나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인지를 눌지왕을 보며 위로를 얻는다. 신라가 완전한 자주국으로서의 도약하는데에는 눌지왕의 상속방식 수정과 볼모송환작업, 그리고 나제동맹이라는 군사동맹을 체결한 것이 이후 고구려의 통일이 어려워지는 배경이 되었다. 유동적으로 군사원조가 가능한 동맹이 없었다면 아마도 고구려가 삼국통일을 수월하게 이뤄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