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신라의 시작은 지금부터
사람은 이름대로 산다고 했던가? 지증왕의 이름은 김지대로이다. 웃음짓게 만드는 이름이다. 소지왕이 자손이 없어, 6촌 동생인 지증왕이 64세의 나이로 왕위에 즉위했다. 늦은 나이로만 보면 레이트 블루머인 셈이다.
지증왕 즉위 당시 6세기 초입시기는 고구려의 독보적인 1강 체제가 서서히 저물어 삼국의 힘겨르기가 이전과 달리 서로 견줄만해지고 있었다. 고구려는 장수왕이후 문자명왕시기에는 백제 무령왕에게 수세에 몰리기까지 할 정도로 국력이 쇠하여 졌다. 이런 때에 신라의 지증왕은 마립간으로서 즉위했다.
백제는 동성왕 501년에 눈여겨 볼만한 행보를 보이는데 433년에 신라 눌지왕과 비유왕의 나제동맹 체결 이후 소지왕시기까지 고구려로부터의 위협을 견디며 서로에게 든든한 동맹으로서 함께해온 신라와 백제였는데 백제 동성왕은 왜 501년 탄현(대전)에 목책을 쌓았을까? 이것은 나제 동맹에도 틈이 생기고 있다는 증거라고 볼 수있다. 백제의 이런 행보는 신라에겐 성장을 촉진하는 자극이 되었을것이다. 고구려는 문자명왕, 신라는 지증왕, 502년에는 백제 무령왕이 즉위하니 삼국 중 힘으로만 우위에 있을 나라가 당시로서는 보이지 않았다.
신라 지증왕은 이런 시기에 어떻게 슬기롭게 신라를 견고하게 만들어갔을까?
지증왕은 일단 악습인 순장을 폐지하고 우경을 보급하는 것을 시작으로 신라의 국명을 신라로 정했다. 지증왕 이전의 신라는 사라(斯羅),사로(斯盧),신라(新羅)등으로 불렸지만 혼용되어 불렸기 때문에 어느 것 하나로 통일 된 국명이라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덕업이 날로 새로워지고 사방을 망라한다(德業一新 網羅四方)”는 뜻을 담아 신라라고 나라이름을 지었다. 이 여덟자로 만들어진 신라라는 국명이 사방으로 영역을 확장해 나가겠다는 비전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계기로 신라는 지증왕을 통해 국가적 성장 마인드셋을 갖추기 시작했으며, 이는 신라가 이전보다 더 나은 국가로 발전되고 더 나아가 사방을 망라할 수 있는 나라가 될 것이라는 미래지향적인 선포이기도 하다. 이러한 것을 볼 때 국명을 바꾼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고 신라를 신라답게 만들어준 첫왕이 바로 지증왕이라고 볼 수있다.
국명과 더불어 중요한 변화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왕’이라는 호칭을 사용한 것이다. 이전에는 모두 신라방언으로 만들어진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마립간으로 이어지는 왕이지만 왕이라고 안하고 신라만의 성격을 보여주는 일종의 ‘칭호’를 사용해 왔는데 이 때부터 국격에 맞게 왕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부터 지증왕은 지증’마립간’이 아닌 진짜 지증’왕’이 되었다.
우경도 지증왕 시기부터 실시되었다. 우경은 알다시피 소머리에 멍에를 씌워 밭을 귀경하게 하는 농법이다. 우경을 하면 쟁기와 소 발굽이 땅을 고르게 하고 돌과 이물질을 제거하므로 토질이 더 좋아지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었고 이는 소출물의 증가로 자연히 이어졌다 이로 인해 세수도 확보되고 백성의 삶의 질도 나아지는 효과도 얻게 되니 이것이야 말로 민생안정 정책이라 할 수 있겠다. 모든 인심은 곡간에서 나는 법이니 말이다.
이 때 까지가 503년이다. 잠시 백제로 넘어가보자. 백제는 당시에 동성왕이 백가라는 귀족에게 살해당하고 가림성에서 난을 일으켰는데 무열왕이 즉위하고 나서 백가의 난을 진압하였다. 그리고 고구려 수곡성을 달솔 우영에게 기마 5000을 보내 공격하게 하였다(502)는 기록을 보아 이제 고구려를 백제가 수세로 몰아가는 모습이 나온다. 이 시간을 지증왕이 잘 활용하면 이전보다 약해진 고구려로 인해 더 강해질 수 있다는 계산을 하였을 것이다.
504년부터 지증왕은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역부를 동원해 파리성(삼척),미실성(포항),진덕성, 골화성(영천)을 포함해 12개성을 쌓았다고 한다. 이는 이전에 침범 당했던 영일만쪽의 미질부쪽을 보수하는것과 삼척에 파리성 증축을 보면 동해안 방어에도 신경을 쓰는 것을 알수있다.
505년에는 신라의 6촌을 행정적 6부로 개편하며 지방 행정구역을 정비하였다. 주, 군, 현으로 나누어서 지방관을 파견했는데 첫 파견자는 실직주의 군주로 간 이사부였다. 이때부터 신라의 지방관의 이름이 군주라 불렸다. 지방행정구역이 개편된 것은 언제나 큰 의미를 갖는다. 왕권이 강화되고 지방세력이 약화되었다는 것, 특히 고대국가는 부족적 성격의 지방을 행정적으로 그 성격을 바뀌었다는것에 의의가 있다. 이전부터 일부지역에는 도사(道使)라고 하는 지방관이 파견 되었었는데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지방관이 전국에 파견된 것으로 이해된다.
신라의 숨겨진 잠재력이 깨워지는 순간이며 이제 신라의 부족국가적 모습이 점점 탈피해 나가면서 중앙집권 국가로 변모해 나가는 모습이 지증왕때부터 변화가 확실히 잡히면서 신라의 전성기의 밑바탕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이전보다 더 대외관계도 안정적이어서 신라의 그 성장속도는 이전보다 더 가속도가 붙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같은 해 11월 선박에 관한 법을 제정해 바다로 진출하려는 준비를 하였으며 동해 진출에 대한 준비를 착실히 진행했음을 알 수 있다.
4년 후에는 서울(수도)에 동시(東市)를 설치하였다고 한다. 동쪽에 시장을 만들어서 경제 활성화를 도모한 것으로 보인다. 서울이란 것 보니 왕경(王京) 근처인듯하다. 이 전 해에 날이 가물어 구휼해준 일이 있었다. 그러나 정부지출이 많아지면 정부 재정의 악화가 걱정이니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시장경제를 활성화를 도모 하려는게 아닌가 생각한다.
앞서 본 소지왕이전의 모습과 비교했을 때 지증왕의 시기는 굉장히 진전된 모습이다. 지증왕 치세 기간에는 신라가 나라답게 체계가 잡혀가고 있었고 이전의 부족국가적 느낌을 완전히 지워버렸으며 새로운 신라로 태어났기에 그야말로 ‘덕업일신(德業日新)’해 가는 시간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512년 지증왕이 이사부로 하여금 우산국을 정벌하게 하는데 이것을 하려고 얼마나 많은 시간을 지증왕이 심혈을 기울여서 준비했는지 앞선 일들을 보면 퍼즐이 맞춰진다. 실직주에 이사부를 군주로 보낸것과 선박에 관한 법을 제정하는 것은 모두 우산국 정벌을 염두하고 만든 포석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우산국을 정벌할 때 삼국유사에서 나오듯이 항복하지 않으면 사자를 풀겠다고 하여 이에 항복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왜 지증왕은 우산국 정벌이라는 수를 두었을까? 이것은 고구려와 왜의 교섭을 차단할 수 있는 요지일 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동해안 진출을 막을 수 있는 교두보이기 때문이다. 독도와 울릉도는 지금도 우리나라에 동해에 있어서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로 여겨지고 있는 만큼 지증왕도 동해진출에 관심을 기울인 모양새다. 신라의 우산국 정벌은 현시점에서 일본이 독도를 자신의 땅이라 우기는 것을 보면 정말 지증왕은 몇수를 앞서본건지 헤아릴 수가 없다.
신라가 이토록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내물왕부터 소지왕까지 이어지는 100년간의 시절을 인내하며 생존했기에 신라에게도 기회가 찾아오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때는 아무리 애써도 풀리지않지만 풀리기 시작할 때는 생각지도 못하게 진전이 있을 때가 있다. 역사가 증명하는 이 큰 흐름은 우리의 인생에도 그대로 적용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지증왕은 비록 15년만 왕위에 있었지만 신라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던 왕이다. 자신의 한수를 허수로 두지 않았으며 소명을 다 완수해 냈다. 이렇게 신라의 초석을 잘 다지고 법흥왕이 또 한번 반석위에 얹으니 신라는 거센 풍파에도 무너지지 않는 집과 같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