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흥왕과 성장이라는 코드의 접점
우리는 잠재력을 가늠할 때 출발점에 집중하는 치명적인 오류를 범한다. 타고난 재능에 집착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가장 전도유망한 이들은 첫눈에 두드러지는 사람들이라 넘겨짚는다. 작금의 현실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하지만 잠재력이란 출발점이 아니라 얼마나 멀리 가느냐에 달려있다. 신라의 변화가 바로 이것을 말해주고 있다.
신라는 내물왕때부터 소지왕때까지의 100년동안 고구려의 끊임없는 공격과 간섭에 시달려왔으나, 지증왕에 이르러서야 끝을 맺었다.
법흥왕은 불교를 공인했던 왕으로서 법흥왕은 불교용어인 '법(法)'을 자신의 묘호에 사용하였다. 지증왕이 신라에게 디딤돌을 놓은 왕이라면 법흥왕은 주춧돌을 놓았다고 할 수 있겠다.
법흥왕의 시대는 지증왕보다 왕권이 더 강화되었고, 국가적으로도 이전보다 더 성장했다고 볼 수 있는 것들이 몇 가지 감지 된다. 우선 지증왕시기에 ‘왕’이라는 호칭을 정식으로 사용하게 된 이후 최초로 칭제건원(稱帝建元)을 한 왕이 바로 법흥왕이며, 봉평비에서 ‘대왕’이라는 호칭으로 불렸던 왕 또한 법흥왕이다. 이로인해 신라 최초의 대왕은 법흥왕이라고 할 수있다.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지증왕 시기와 법흥왕 시기를 구분하였다. 일연은 불교가 국교로 공인된 법흥왕때부터 진덕여왕까지를 중고기(中古期)라고하였는데, 이 시기동안 왕들의 이름은 모두 ‘불교적’ 호칭으로 불리웠다는 공통점이 있다. 일연은 그만큼 신라에서 불교가 중앙집권과 사회문화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 했을 것이다. 그런면에서 볼 때 법흥왕은 불교가 신라에 정착되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고구려보다 150여년 늦었던 신라
신라의 법흥왕은 514년, 고구려의 소수림왕은 371년 즉위했다. 둘의 역할은 모두 중앙집권을 완성했다는 것과 더불어 후대에 전성기가 찾아왔다는 것이 공통점이라 할 수 있다. 즉, 전성기를 맞이할 준비를 마친 왕들이라는 것이다. 이 두 왕이 업적면에서 비슷하지만 비교해보면 법흥왕은 시기적으로 소수림왕에 비해 143년 늦는다. 신라가 143년은 더 늦은 시기에 귀족회의 수상, 그리고 관등 관복제와 율령 반포등의 구체적인 법제정이 이루어졌다. 6세기에 들어서서 비로소 국가체제가 완성되어갔던 신라는 늦었지만 법흥왕에 의해 서서히 고구려, 백제보다 강성해지는 것을 체감했던 시기라고 생각된다.
또한, 영토확장면에서도 법흥왕은 낙동강의 주도권을 가야로부터 확실히 신라로 갖고 온 왕이다.
법흥왕이 병부를 설치하다
신라의 지방행정구역을 지증왕이 획정시킨 것을 토대로 법흥왕은 각 지방사람들을 징발하여 군대를 모아 병부를 설치하였다. 법흥왕 다음 왕이 한강을 장악한 진흥왕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병부는 군사력과 군권을 활용하여 삼국쟁탈전에서 신라가 우위를 점하는데, 큰 힘이 된 법흥왕의 뛰어난 앞선 지략이라 볼 수있다. 병부의 장관은 병부령, 즉 령(令)이라 하고 1명이었다. 이것은 법흥왕 즉위 4년 4월만에 일이었다.
진흥왕 시기 544년에 병부령을 한 명 더 증원하였는데, 그만큼 병부라는 자리가 핵심이 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법흥왕에의해 신라에게도 '법'이 만들어지다
“법흥왕 7년, 봄 정월에 율령을 반포하고 처음으로 백관의 공복에 붉은색과 자주색으로 위계를 정하였다.”
관습법으로 나라가 운영되던 신라가 율령반포로 인해 '법'이 만들어져 국가로서의 면모를 제대로 갖추게 되었다. 율령이란, 율, 령, 격, 식을 포함하는데 율(律)은 형법, 령(令)은 행정법, 격(格)은 시행규칙이라 할 수 있다. 이제 법으로 정해서 규율로 정함에 따라 기준이 생김으로써 기강이 바로 서게 되었고 왕권이 강화됨과 동시에 중앙집권의 효과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관등은 17관등으로 나누었는데 관등의 고저는 6부의 지배층의 세력의 정도에 따라 차등적으로 위계를 나누어 상하로 고루 편제하였다고 한다. 이 17관등제에 따라 공복의 색을 다르게 함으로서 중앙집권 강화를 도모하였다. 태대각간부터 대아찬까지는 자색, 아찬부터 급찬까지는 비색, 대나마와 나마는 청색옷을, 대사부터 선저지까지는 황색옷을 입었다고 한다.
아찬은 절대 자색옷을 입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6두품인 아찬에서 대아찬으로 가기는 불가능하였다. 이는 골품제가 관등제와 함께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법흥왕 시기만 하더라도 신라의 고유한 복식의 관복으로 제정이 되었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이후 진평왕이 공복을 '중국화' 하기 이전까지는 법흥왕이 만든 신라 공복이 계속 유지되었다.
율령반포와 관복제 이 두 업적으로 인해 신라는 중앙집권이라는 신화를 완성할 수 있었다.
양나라의 양직공도로 보는 신라의 외교서열
이렇게 성장했음에도 중국에는 아직 지리적 한계로 인해 외교 초보였던 신라사신은 백제의 도움으로 양나라에 존재를 알리러 간다. 그러나 백제는 자신들이 이번에 고구려를 여러번 격파하고 다시 강국이 되었다는 것을 전하여 무령왕이 영동대장군이라는 높은 관직에 책봉되는 쾌거를 이루는데 정작 신라는 자신의 소국으로 소개하는 것이 특이점이었다. 이것은 아직 중국에 신라의 존재감이 미미함에 따라 백제가 존재감을 과시하기 위해 과장, 왜곡한 경향을 보여준다. 외교에는 동맹이어도 자국의 이익이 우선임을 이야기 해주는 대목인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