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는 아직 대외적으로 존재감이 미약하였으나 신라만의 속도로 성장을 지속해 나갔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불교수용이다. 신라 불교는 눌지왕 시기에 이미 묵호자가 유입시킨지가 70여년이 넘는 긴 시간이 흐른 상태였다. 그동안 불교는 교세가 점점 커져갔지만 귀족들의 반대로 불교공인이 미루어져 온 상황이었다.
백제는 불교수용에서 고구려, 신라와 달리 특이점이 발견된다. 고구려의 소수림왕과, 신라의 법흥왕이 불교수용후 각 국가의 전성기가 시작되었다면, 백제는 중앙집권의 기틀을 가장 빨리 갖춘 얼리블루머였음에도 가장 전성기였던 근초고왕 이후에 불교를 수용했다는 특이점이 있다.
불교가 수용되는 것은 국가적 차원에서 비단 왕권강화에만 있어서 중요했던 것은 아니었다. 충(忠)이 강조되는 유학으로 신하들을 교육시킨 반면, 불교는 일심(一心)해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로 극락왕생할 수 있다는 종교적 희망으로 고통스러운 현세의 삶을 백성들이 참아낼 수있도록 한 종교로서도 큰 의미가 있었다. 또한 왕이 곧 부처라는 왕즉불(王卽佛)사상은 서양의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적인 성격으로 다가왔다. 왕을 통치자 이상으로 백성들이 추앙할수 있도록 정치적이념으로 세우기에도 불교의 수용은 좋은 수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진흥왕 시기에 건립된 황룡사와 선덕여왕 시기에 건립된 황룡사지 9층목탑은 신라를 둘러싼 적들을 층마다 새겨 넣었다. '덕업일신 망라사방'에서 나라의 이름을 '신라'로 한 것처럼 이름에 걸맞은 대업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과 '삼국통일'을 완수하고자하는 생각에서 당시로서는 엄청난 크기와 높이의 탑을 세웠다고 볼 수 있다. 신라에 있어서 당시 불교는 국가 철학과 이념을 함께 만들어 가는 중요한 호국불교의 기틀을 다졌다. 불교는 조선이 들어서기 전까지 우리민족의 정신적 기초가 되었던 종교이자 철학이었다. 신라는 누가 뭐래도 우리나라의 유일무이한 천년왕국이 아니던가. 레이트블루머였던 신라에게 '불교를 공인'한 것이 신라의 국민들이 일심으로 뭉칠수 있던 비결이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그런 측면에서 '법흥왕이 법흥왕인 이유는 불교수용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눌지마립간 때 고구려의 승려인 묵호자가 신라에 들어와 불교를 알렸으나 약70여년이 지난 528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널리퍼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신하들은 불만이 많았다. 이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이차돈과 법흥왕이 서로 논의를 한 것이 있는데 가까운 신하(近臣)이라고 표현한 만큼 왕의 총애를 받고 있었던 이차돈은 자신의 순교로 이 상황을 타개하고자 하였다. 그러자 법흥왕은 "도(道)를 일으키고자 하는 것인데 죄없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도에 맞지 않다."고 하였다. 이차돈은 "도를 일으킬 수만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하들은 머리를 깎고 이상한 옷을 입고 말하는 논리가 기이해 승려는 믿을수 없다. 후환이 생길까 두렵다며 말하였으나 이차돈은 특별한 사람이 있은 후에야 특별한 일이 있다며 반박하다가 이차돈만 다른 말을 하니 형장으로 데리고 나갔다. "부처가 계시다면 내가 죽을때 분명히 이상한 일이 생길 것"이라고 말하고 이차돈이 마침내 순교하자 잘린 목에서 피가 우윳빛처럼 흰색으로 뿌려졌다. (삼국사기 참고)
이후 법흥왕은 불교를 국교로 정 함으로써 불교를 이상하게 바라보던 시선들을 일축시키고, 백성에게 사상과 신앙의 자유를 주었고 이미 신라 영내에 뿌리내렸던 각양의 토속종교들보다 불교라는 고등종교로 백성들을 정신적으로 규합하려는 의도가 컸다. 밥흥왕은 이후 흥륜사를 건립해 민심을 모으는데 힘썼다.불교공인은 법흥왕 대에 이룬 신라에게는 매우 의미있고 큰 과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인해 법흥왕의 법(法)은 '율령'뿐만 아니라 '다르마'의 '법(法)'까지 통칭하게 됨에 따라 진정으로 '법'으로 흥(興)한 왕', '법흥왕'이 되었다.
법흥왕은 귀족들로 구셩된 화백회의를 만들어 수장격인 상대등을 통하여 화백회를 주재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하였으며, 상대등이 주재하는 화백회의는 만장일치를 해야만 통과가 될 수 있었다. 이러한 화백회의는 나라의 체계를 보다 효율적으로 운영하고저 하는 법흥왕의 매우 앞선 정치적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신라는 추후 이 상대등의 권한을 견제하는 역사가 계속적으로 이어지는데 이는 막강한 상대등의 권력을 간접적으로 말해준다.
하지만 화백회의와 상대등을 만든 것 또한 법흥왕이었다는 것이 얼마나 법흥왕이 신라라는 나라를 나라답게 만드는데 큰 공을 들였는지를 알 수 있다.
“태산은 한줌의 흙도 버리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큰 것이고 바다와 강은 아주 작은 시냇물이라도 마다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마천 사기의 이사열전 중에서)
이사열전의 내용을 그대로 법흥왕이 실천한 것이 바로 금관가야(김해가야)를 통합하는 모습에서 볼 수 있었다고 본다.
선대왕인 지증왕이 우산국을 정복하고 나서 우산국으로부터 각종의 토산물과 공납을 받고 있었고 대신에 우산국은 자치를 영위하였다. 이어 530년에 들어 그간 신라가 계속적으로 추구하던 낙동강 서안 가야의 여러나라에 대한 공략이 일정한 성과를 보였다. 금관가야를 시작으로하여 안라국의 동북쪽 여섯개의 성을 축성하여 압박을가했다. 그러나 항상 고구려를 의식해 가야지역에서 백제와의 충돌은 되도록이면 피했다.
19년(532)에 금관국(金官國), 곧 금관가야의 왕 김구해(金仇亥)가 왕비 및 세 아들과 함께 나라의 창고에 있던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왕은 예로써 대우하고, 상등(上等)의 관등[位]을 주었으며,본국을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였다.금관가야의 왕 김구해의 아들 무력은 벼슬이 각간(角干)까지 이르렀다고 나온다.
각간(角干)은 이벌찬이라고도하는 1등급의 최고 관등이다. 화백회의(현재의 국무회의)에 가야출신이 처음으로 참석가능해지는 순간이다. 김유신이 김해 김씨, 금관가야 출신이라는 것은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흥무대왕이라고 추증되는 김유신이 신라 사람이 아니었다면 신라의 삼국통일은 아마 어렵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김무력-김서현- 김유신으로 이어지는 이 3대는 신라에게는 보배였다 할 수 있다.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보다..'
서정주 시인의 '국화옆에서' 중에서
국화꽃이 피기위해 수많은 인고의 세월을 이겨내고 소쩍새가 천둥이 그렇게 도왔던 것처럼 신라에게 법흥왕은 소쩍새가 또는 천둥이 되어 다음에 진흥왕이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룰수 있도록 배경을 만들어 줬다는 점에서 법흥왕의 수많은 과제 완수는 매우 특별하다고 볼 수 있다. 법흥왕의 성 축조와 율령반포와 백관의 공복제정등 수많은 업적은 고구려의 소수림왕 다음에 광개토대왕이 나온 것과 같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금관가야를 흡수하는 과정은 훗날 고려 태조 왕건이 신라를 흡수하는 모습과 닮았다. 강제병합이 아닌 그들이 원하는 처세를 해준 지혜는 매우 선진적이라 볼 수있다 .
우린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일에 매일 쫒기듯 살아갈 때가 많다. 그러나 지금 명확히 보이진 않지만 분명 더 나아질 미래를 위해 멀리볼 수 있는 혜안이 매우 필요하다. 법흥왕의 혜안과 과제완수력을 통해 적용해 본다면 언젠가 꽃피울 내일을 위해 준비하고 기다리고 완수해 나간다면 분명 더 멋진 성장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출발은 늦을 수 있다. 다만 추월은 치밀하게 준비해야 한다. 그러면 반드시 역전의 기회를 얻을 수있고 언제가는 추월차선에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