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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은 한번만 찾아오지 않는다

by 꿈부기

더 큰 도약을 위한 성장통

대야성_위성사진.jpg
대야성터(왼쪽) 죽령 위치(오른쪽)

642년 다시 한번 신라는 백제의 반격을 거세게 당했다. 백제 의자왕이 그해 7월에 신라로부터 40여성을 공취(攻取)하였고 윤충을 앞세워 한 달 뒤에 대야성(경남 합천)을 함락한 일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대야성(경남 합천)에는 김춘추의 사위인 김품석이 도독으로 있었고 딸인 고타소가 있었는데 이들은 백제와의 전투 중 전사하고 만다. 또한 같은 달 백제와 고구려가 당항성(경기도 화성)을 공격하였는데 선덕여왕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신라의 위급함을 알려 다행히 당나라덕에 당항성을 보존할 수 있었다. 선덕여왕의 재임기간동안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 사이에서 끊임없는 침략과 위협을 받았다.


이때 당항성(경기도 화성)은 당나라 도움으로 지켜낸 반면 대야성(경남 합천)은 백제 수중에 들어간 것이 신라입장에서는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대야성은 경주와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어 경주가 함락될 위기도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야성(경남 합천)은 난공불락의 요새로 알려져 있었다. 황강이 자연해자의 역할을 하고 있어 속전속결로 점령할 수 있는 성이 아니었는데 도독인 김품석(김춘추의 사위)의 부주의와 검일이라는 자가 백제와 내통함으로 인해 대야성이 생각 외로 빨리 함락당하였다.


자신의 딸이 죽은 것을 듣고 김춘추는 “아, 대장부가 되어 어찌 백제를 삼키지 못하겠는가”라고 하면서 선덕여왕에게 가서 고구려의 사신으로 원병을 요청하려 가기를 직접 나서서 말했다고 한다. 이것은 신라가 풍전등화 위기에 빠졌었던 것도 있지만 김춘추의 딸이 백제의 손에 죽은 것에 대한 사적 복수를 하고 싶은 감정도 있었을 것이다. 고구려에 이르러 고구려 왕인 보장왕은 김춘추의 명성을 익히 들어 호위를 하고 만났는데 김춘추는 “백제는 지금 무도하여 긴 뱀과 큰 돼지가 되어 저희 영토를 침범하므로 저희 임금이 대국(大國)의 병마(兵馬)를 얻어서 그 치욕을 씻고자 합니다. 이에 저로 하여금 대왕께 명을 전하도록 하였습니다.”라고 말하였으나 “죽령은 본래 우리땅이니 죽령 서북의 땅을 내주면 군대를 보내줄 수 있다.”고 고구려 보장왕이 말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연개소문의 입김이 작용하였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김춘추는 “신은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군사를 구하는데, 대왕께서는 환란을 구원하여 이웃과 친선하는 데에는 뜻이 없으시고 단지 사신을 위협하여 땅을 돌려줄 것만을 요구하십니다. 신은 죽을지언정 다른 것은 알지 못합니다.”라고 소신 것 발언하였으나 이것이 되려 왕의 심기를 건드려서 별관에 갇히게 되었다. 일이 이렇게 어그러지자 김춘추가 몰래 사람을 시켜 선덕여왕에게 알리자 대장군 김유신에게 결사대 10,000명을 거느리고 나아가라고 하명하였다. 김유신이 한강을 넘어 고구려 남쪽 경계에 들어가자 고구려는 김춘추를 풀어주었다고 한다. 고구려의 한강회복과 백제 성왕의 원수를 갑자는 이해가 맞아서 형성된 여제동맹은 신라에게는 매우 위협적인 존재이었다. 고구려로부터 당한 굴욕은 김춘추가 당나라를 동맹으로 삼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으며, 고구려와 합종(合縱)을 꿈꾸던 김춘추는 이제 당나라와의 연횡(連衡)을 꾀하게 되었다.


같은해 김유신은 압량주(경북 경산)의 군주로 임명되었는데, 이는 백제의 침략을 방비하기 위함이었다. 대야성(경남 합천)까지 함락된 것은 신라에게 크나 큰 충격이었기에 백제 방어선을 방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동안 비교우위에 있었다고 생각했던 신라였기에 선덕여왕은 더 철저하게 안보강화를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1년 후 643년,선덕여왕은 당나라에게 사신을 보내 신라의 국면이 위급한 상황임을 알린다. 당태종(이세민)은 요동으로 군사를 일으킬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고당(고구려.당나라)전쟁이 645년에 일어난 것을 감안해 보면 2년 전에 이미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서 이야기가 오간 것이 당나라황제 이세민에게 고구려 정벌에 대한 확신을 준 것이라 생각한다. 당태종 입장에서 눈의 가시였던 고구려를 칠 명분이 별로 없었는데 연개소문의 정변과 동시에 신라의 청병요청은 고구려를 쳐들어갈 좋은 명분이 되었다.


진흥왕 때 한강유역까지 영토확장을 하고 전성기를 맞았던 신라였지만 실상은 빼앗은 한강 유역 지키기도 버거워지고 있던 신라였다. 성공하거나 성장한 후에는 고난이나 시련이 없을것으로 생각되어 지지만 고통을 맛보면서 자라는 것이야 말로 농익어가는 인생의 참된 맛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아니더라도 ‘아프니까 성숙이다.’는 맞는 말이다.


우리는 성숙해질 때까지 수많은 아픔에 부딪히고 깨지면서 또한 수많은 고난에 치이면서 성장과 발전을 이뤄낸다 . 때로는 모든것이 잘될 때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지혜를 신라라는 국가의 흥망성쇠로부터 반면교사 하며 배워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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