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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를 보지말고 최선을 보라

by 꿈부기

독이든 성배 나당동맹 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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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5년 당 태종이 군대를 움직여 고구려를 침입하였다. 여기에 신라 선덕여왕이 합세하여 무려 3만대군으로 고구려수구성을 함락하였다. 그러나 그 틈에 백제가 신라의 안보공백을 틈타 영리하게 공격해 들어와 신라의 7개 성을 차지하였다.

2년 후 비담의 난이 끝난 후 선덕여왕이 서거하였고 선덕여왕을 이어 진덕여왕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진덕여왕 2년 되는 해 648년 김춘추가 당나라로 떠났다. 당 태종 이세민이 김춘추에게

“경은 마음에 품고 있는게 있는가?”라 물어 김춘추가 이와 같이 말하였다.

“신(臣)의 나라는 바다 모퉁이에 치우쳐 있으면서도 천자(天子)의 조정을 엎드려 섬긴 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백제는 강하고 교활하여 여러 차례 함부로 침범해 왔습니다. 더욱이 지난해에는 군사를 크게 일으켜서 깊숙이 쳐들어와 수십 개의 성을 쳐서 함락시켜 조회할 길을 막아버렸습니다. 만약 폐하께서 천조(天朝)의 군사를 빌려주시어 흉악한 것을 잘라 없애주시지 않으신다면 저희 나라의 인민은 모두 포로가 될 것이니, 그렇다면 산 넘고 바다 건너 행하는 조회도 다시는 바랄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태종이 매우 옳다고 여겨서 군사의 출정을 허락하였다. 이 때에 신라와 당나라는 대동강에서 원산만이라는 통일신라의 국경선을 합의를 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춘추는 여기에 한술 더 떠 당나라식 관복으로 궁궐내전에서 사용하는 복식을 바꾸기를 청하였다. 이러한 신라의 당나라에 대한 ‘굴종외교’로 보이는 모습은 신라의 존망을 헤아리기가 어려워질 것이라는 불안감이자 간절함 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라는 말처럼 신라는 생존을 도모하였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648년에 나당 동맹이 체결됨으로써 십자외교 형국이 성립되었다.

나당 동맹이라는 김춘추의 신라표 연횡책(連衡策)은 한반도 정세에 큰 바람을 불러왔다. 동서세력의 탄생은 여제동맹과 돌궐까지 긴장을 불어넣어줬다. 신라의 독이 든 성배였던 나당 동맹은 당시로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649년 1월에 당나라 의관 복장을 착용하기 시작하던 신라는 당나라에게 본격적으로 성의를 보이는데 최선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것은 법흥왕때 제정되었던 백관의 공복을 개정해서 중국식으로 바꾼 것이었다. 이전의 공복은 신라만의 전통적 의관이었으나 당나라 식으로 바꾼 것은 전혀 자주적이라고 볼 순 없었다.

650년 부터는 당나라 연호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전까지는 건원, 개국,태창등 연호를 신라 스스로 사용하면서 자주적인 나라임을 천명하곤 했다. 그러나 650년부터는 당나라의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중화권 연호를 사용하는 것이 우리나라에서 흔히 있던 일이긴 하였지만 이것은 신라가 자존심을 내려 놓으면서 급한 불을 끄고자 하는 생각이 더 강했기 때문에 내렸던 결론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김춘추, 왕위에 오르다

진덕여왕이 서거하고 김춘추가 왕위에 오른 배경에는 상대등 알천이 제1위 왕위 계승권자였으나 김유신과 상대등 알천이 논의하여 김춘추를 추대하기로 하였기 때문이다. 무열왕 김춘추는 원년에 율령을 다시 재정비하고 2년에 태자를 책봉하는등 여러 일을 일사천리로 해결해 나갔다. 특히 자기 딸인 지조를 김유신과 결혼시켜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였고 상대등 금강이 죽자 김유신을 이찬에서 상대등으로 승진시켜 신권(臣權)과 왕권을 모두 손에 쥐게 되었다.

백제, 역사속으로 사라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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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0년 당나라 고종이 소정방(蘇定方)을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으로 삼고 김인문(金仁問)을 부대총관(副大摠管)으로 삼아 백제를 치게 하였다. 이에 무열왕 김춘추는 태자를 병선(兵船)100척과 함께 소정방에게 보냈는데 태자 법민이 소정방에게 “나는 7월 10일에 백제의 남쪽에 이르러 대왕의 군대와 만나서 의자(義慈)의 도성(都城)을 무찔러 깨뜨리고자 한다.”라고 하였다. 소정방의 군대는 무려 13만명이었다. 여기에 호응하여 김춘추는 김유신, 김품일 등에게 명하여 정예군사 5만명을 징발하였다. 그런데 황산벌(논산)에서 계백이 5천결사대를 이끌고 황산벌에서 4전 4승을 거뒀는데 흠순의 반굴과 품일의 아들 관창의 1인돌격 전술에 힘입어 백제를 신라가 대파하였다. 기벌포(서천)에 도착한 소정방은 신라가 약속한 기일보다 늦었다 하여 문책성으로 김문영을 죽이려고 하자 김유신은 “황산벌의 전투도 보지 않았으면서 기일이 늦었다는 것 만으로 죄를 삼으려 하는데 우린 죄가 없다. 반드시 당나라를 깨뜨리고 백제를 깨뜨리겠다.”고 말하자 김문영을 풀어주었다고 한다.

반면, 의자왕이 살려고 9일동안 웅진(현재 공주)으로 도망쳤다가 웅진방령 예식진으로부터 배반을 당해 항복하였다. 이것이 7월 19일이었다.

그러나 당나라는 왕문도를 보내 백제 지역에 웅진 도독을 보내 웅진 도독을 설치하기 시작하였고 백제의 남은 세력들이 사비를 수복하려 하는 낌새가 많아 아직까지 신라는 백제 땅을 완전 정복하였다 할 수는 없는 상태였다. 이후 백제 부흥운동이 663년까지 지속된 것을 감안하면 신라는 아직 고구려도 존속하고 있는 상태여서 긴장을 놓을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거기에 동맹이라지만 한반도에 야욕을 보이고 있는 당나라의 속내를 알아차린 이상 신라는 그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게 된 셈이었다.


한계를 보지말고 최선을 보라

우리는 태종무열왕 김춘추가 대동강에서 원산만까지 통일하는 것으로 당나라와 협상하여 반쪽짜리 통일을 이룬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고구려의 만주 땅보다 중요한 것은 한반도의 온전한 삼국통일이었다. 김춘추의 아들 문무왕 김법민이 신라와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 신라가 완전한 삼국통일을 이뤄낸다. 이를 통해 비록 당나라의 힘을 빌려 삼국통일을 이루는데 도움을 얻었지만, 신라가 얼마나 생존을 넘어 삼국통일을 이뤄내기 위해 발버둥 쳤는지를 알 수 있다. 다소 아쉬워 보이는 짧은 국경보다 중요한 것은 여기까지 오기위해 수많은 전략과 군사들의 피 흘림과 참을 수 없는 굴종을 참아낸 신라의 부단한 노력들일 것이다. 한계를 보지 말고 최선을 보라고 말하고 싶다. 많은 사학자들이 발해가 생김으로 신라의 삼국통일이 완전한 통일이라 할 수 없다 말하지만 당시 신라로서는 최선을 다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신라가 정한 경계는 그들이 ‘통일’이라는 목표를 현실에 기반한 비대칭 국가전력을 산정해서 당나라와의 협상에서 얻을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외교는 총성 없는 전쟁이며 전쟁은 지옥이다. 거기서 신라가 살아남아 통일을 한 것이 우리 민족에 ‘한민족’이라는 생각을 더 깊이 만들어주었으며 군사, 사회적 방면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통일을 이루려는 노력이 옅보이기 때문에 신라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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