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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 삼국통일을 이룩하다

by 꿈부기

고구려 멸망

666년 연개소문이 죽고 장자인 남생이 대신 막리지가 되었다. 처음 국정을 맡고 여러 성에 나아가 순행하면서, 그의 동생 남건과 남산에게 남아서 뒷일을 맡게 하였다. 어떤 사람이 두 동생에게 말하기를, “남생은 두 아우가 핍박하는 것을 싫어하여 제거하려고 하니 먼저 계책을 세우는 것이 낫습니다”라고 하였다. 두 동생이 처음에는 이를 믿지 않았다. 또 어떤 사람이 남생에게 알리기를, “두 동생은 형이 돌아와 그 권력을 빼앗을까 두려워하여 형을 막고 들이지 않으려 합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연남생은 국내성으로 달아나 웅거하였고 당나라에 이적행위를 하게 된다. 이것은 요동이 당나라에게 송두리째 빼앗기는 결과를 낳았고 고구려멸망의 촉매제가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다민족 국가인 고구려에게 평양천도 이후 간간히 터져 나오던 내전이 고구려라는 나라의 면역력이 약화되면서 결국 멸망을 부르는 촉매제로 변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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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해 당나라가 백제가 평정되었으므로 고구려를 멸망시키기 위해 군대를 요청하자 12월에 당나라가 이적을 요동도 행군 대총관으로 삼아 사열소상백(이부시랑 개칭명)인 학처준과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이에 연개소문 동생인 연정토가 신라에 투항하면서 15개의 성을 바쳤다.


667년에 문무왕은 대각간 김유신을 비롯해 30명의 장군을 거느리고 한성정에 나섰다. 거기서 이적을 만나길 기다렸다. 그 때 당시 이적은 고구려 요동 방면을 공격하였는데 그 중 신성을 공략하는데 성공하였고 16개의 성을 더 함락하였다. 설인귀가 남소성,목저성,창암성을 취하여 고구려 정벌에 가속도를 내고 있었다. 그 때 당시 고구려는 망할 날이 얼마 안남은듯 보였다.


그리고 668년 9월에 마침내 굳게 서있던 평양성은 무너져 내렸다. 이로 이해 고구려라는 나라의 폐막식을 알리는 듯 했다. 고구려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순간까지도 끈질김을 보여줬다. 신라는 당나라와 함께 자신을 위협했던 패자를 꺾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안심할 수 없었다. 자신에게 이제 당나라의 창 끝이 옮겨질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나당전쟁의 서막

신라 문무왕은 당나라와의 시간을 벌기 위해 670년 검모잠과 안승에게 금마저(현재 익산)를 주고 정착하게 하면서 보덕국의 왕으로 고구려의 안승을 책봉하여, 고구려 부흥운동 세력을 회유하며 고구려의 남은 세력과 힘을 모으려고 했다. 또한 신라 내정은 예원을 중시(신라말기에는 시중으로 불림)로 삼아 처리해 나갔다. 당나라와 전쟁 중에도 671년에는 수많은 답서를 당나라로 보내 당나라 황제와의 화친을 모색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한편으로는 당나라의 조운선을 70여척을 쳐서 1백여명을 산채로 잡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672년에는 본격적으로 나당전쟁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는 해였다. 먼저 당나라가 이근행에게 3만의 대군을,고간에게 1만명을 주어 평양으로 진군하게 하였다. 한달이 지난 시점에서 나당 전쟁은 본격화되었다. 우선 당나라는 한시성(韓始城) 과 마읍성(馬邑城)을 공격하여 이겼다. 신라는 군사를 전진시켜 백수성(白水城)에서 500보쯤 되는 곳에 군영(軍營)을 만들었다. 신라 군사와 고구려 군사가 힘을 합쳐서 당나라에게 맞서 싸워 수천 명의 목을 베었다. 고간(高侃) 등이 물러나자 추격하여 석문(石門)에 이르러 싸웠는데 신라가 크게 패배하였다. 673년 9월에는 사열산성을 비롯해 국원성,북형산성,소문성등 여러 성을 쌓았는데 미리 당나라의 공격에 대해 방비한 것으로 보인다.

673년에 웅진도독부를 공격한 것과 안승의 무리를 받아준 것으로 당나라 황제가 화가 나 신라 왕을 삭탈하고 김인문을 신라왕으로 세우려 했다. 하지만 자신을 왕좌에서 내리려는 굴욕을 참아내며 당나라 황제에게 사과의 서신을 보냈던 문무왕은 결국 20만명의 이근행의 군대가 있는 매소성을 공격하여 격파하는데 성공하였다. (675년) 기벌포(현재 서천) 앞바다에서는 사찬 시득이 당나라 설인귀의 수군에 맞서 싸웠다. 소부리주와 기벌포에서는 22번의 전투 끝에 마침내 승리하였다. 패배로 기울던 기벌포 해전을 끝내 승리로 이끈 22번의 전투는 생각보다 매우 치열했던 것이다.


신라는 당나라라는 대국의 공격을 보급문제를 야기시키면서 효과적으로 막아냈다. 문무왕은 당나라 황제에게 때로는 전쟁중에도 서신을 통하여 다소 비굴한 면모를 보였지만 이는 문무왕의 대단한 외교적 한 전술이었으며, 이러한 문무왕의 변화무쌍한 전술들은 신라의 삼국통일을 이룩 하는것에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


고구려의 연개소문처럼 유연하지 못한 전두지휘로는 더 빨리 망할 수도 있음을 문무왕은 알았다. 문무왕의 큰 그림은 결국 삼국통일이라는 대업을 완수하는데 있어, 강한 추진력보다는 보다 지혜롭게 유연한 사고를 할 수 있어야 결국엔 승자가 될 수 있음을 문무왕은 전쟁터에서 배웠다.


드디어 마지막 승자는 신라가 되었다. 백제, 고구려가 아닌 최약자였던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뤄냈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있다. 당시 토번(현재 티벳)이 당나라를 공격한 행운도 따랐지만 신라가 매소성을 격파하지 못했다면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고 했다. 행운 또한 내가 준비되었을 때 오는 하늘의 선물이다. 삼국통일이라는 큰 대업을 이루기위한 몇세기에 걸친 철저한 선대왕들의 준비가 있었기에 신라에게 그런 천운도 따라 준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신라는 지정학적으로 사방은 산이고 동, 남쪽은 바다로 둘러쌓인 뻗어나갈 수 없는 형국이었지만, 소백산맥이라는 높은 장벽을 뛰어넘어, 결국에는 한반도 전체를 통일하는데 성공한다. 아마도 신라가 우리에게 말해주려는 것은 이것이 아닐까?


1. 나의 치명적인 아킬레스 건을 넘지 못할 장애물로 생각하지 말아라

2. 크게 보고 크게 움직여라

3. 유연하게 생각하라


소백산맥은 신라에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막는 장벽이자 아킬레스건 같은 존재였다. 나를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장벽을 넘어설때 그 장벽이 때론 나의 아픔, 나의 상처, 나의 열등감등 그 무엇이든 반드시 내가 넘어야 할 소백산맥임을 알고 넘어갈때 더 큰 성장과 도약을 할 수있음을 신라를 통해 배웠다.


두번째는 크게 보고 크게 움직이라는 것이다. 신라는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대비해 고구려 멸망전쟁에서도 소극적으로 움직였다. 고구려 멸망전에 힘을 비축해 두었다가 당나라 군대와 전쟁을 하기 위함이었다. 크게보고 크게 움직일 줄 알아야 한다. 눈앞에 당장 처리해야 할 일들에 쫒겨 큰 그림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인생생에서 가까이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보면 희극이라는 말이있다. 좀 더 크고 멀리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은 유연하게 생각하라는 것이다. 신라의 나제동맹, 그리고 결렬, 고구려와의 연합, 더나아가 나당 연합. 이 모든 외교적 행보는 신라의 국익 앞에서 펼쳐진 신의 한 수들이었다. 신라는 필요할 때마다 자신을 위해 유연하게 행동하였다. 우리의 삶을 더 풍성하게 만들어 준것도 역시 유연한 행동과 유연한 사고이다. 갈대는 거센 바람에도 꺾이지 않는 다고 한다.가장가는 선(善)은 물과 같다고 이야기 한다. 유연한 사고를 해야 더 큰 바다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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