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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딜레마; 백제 부흥운동과 당나라 야심 사이

문무왕 삼국통일의 종지부를 찍다1

by 꿈부기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낱

[출처] 대추 한 알 장석주


문무왕 제위 시기 상황

신라 태종 무열왕과 나당연합(羅唐聯合)군에의해 백제를 무너뜨린 이후에도 백제의 남은 군사들은 여전히 잔존해 있는 상태였다. 고구려 또한 내분이 심해 국력은 예전만 못하지만 부자는 망해도 삼년은 간다는 속담처럼 꺼져가는 불씨처럼 겨우 견디고 있는 상황이었다. 당황제인 고종은 661년에도 고구려를 쉴 새 없이 몰아 부치고 있었다. 1월부터 하남, 하북, 회남의 67주에서 4만4천여명을 징발해 홍연경과 소사업을 부여도 행군총관으로 삼아 평양방면으로 진격했다.

4월에는 계필하력을 요동도 행군총관으로 삼고 소정방을 평양도 행군총관으로 삼아 소사업과 여러 이민족으로 구성된 군대를 여러 방면으로 나누어 고구려를 공격했다.


이런 상황에서 신라에는 문무왕이 제위에 올랐다. 이 해 6월에 당나라에 들어가 숙위(宿衛)를 하던 인문과 유돈 등이 돌아와 왕에게 말하기를, “황제께서 이미 소정방을 보내 수군·육군 35도(道)의 병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정벌하게 하고, 마침내 왕께 명하여 군대를 일으켜 호응하게 하셨습니다. 비록 상복을 입고 계시지만 황제의 칙명은 어기기 어렵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김유신을 대장군으로 삼아 고구려로 보냈다. 아마 고구려를 당나라가 공격하고 있는데 식량을 보급 해주길 소정방이 원했던 것이 아닐까 예상한다.


문무왕은 남은 백제의 병사를 시이곡정에 머물며 회유하려 하였는데 사신에게 보고를 듣기로는 옹산성(대전 계족산성으로 추정)에 백제의 남은 적들이 웅거하여 있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소식이었다. 백제의 남은 군사를 최대한 타일러 보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9월 25일에 옹산성을 포위하여 이틀 뒤인 9월 27일에 옹산성의 큰 목책을 불태우고 수천명을 죽여 옹산성을 항복시켰다. 이에 공을 논하여 각간과 이찬으로서 총관이 된 자에게는 검을 하사하였고 파진찬, 대아찬으로서 총관이 된 자에게는 극(戟)을 하사했다.


661년 10월 유신 등은 병사를 쉬게 하며 다음 명령을 기다렸는데, 당나라의 함자도 총관 유덕민(劉德敏) 이 이르러 칙지(勅旨: 임금이 내린 명령)를 전하여 평양으로 군량을 수송하게 하였다. 이에 662년 문무왕이 김유신을 비롯한 9명의 장수에게 수레 2000여대와 쌀 4000석,조 2만2천여석을 싣고 평양에 진군했다. 그러나 가는 길이 험해 풍수촌에 잠시 머물다가 길이 미끄러워 말과 소에게 군량을 전부 실었다. 662년 김유신이 양오에 이르러 대감 인선, 아찬 양도를 보내 소정방에게 군량을 가져다 주었다.


그 이유는 이른바 사수대첩이라 하는 고구려와 당나라와의 전투에서 당나라의 대패(大敗) 때문이었다. 662년 봄 정월에 고구려가 당나라 장수 방효태(龐孝泰) 의 군대를 사수(蛇水) 가에서 연개소문 군사가 큰 승라를 거두었다. 소정방이 평양을 포위하고 있었는데 마침 큰 눈이 내려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 포위를 풀었다는 것은 군량이 부족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해주는데 고구려와의 큰 전투로 인한 보급 문제 때문에 신라에게 군량을 가져다 달라고 요청한 듯하다.

그만큼 고구려와 당나라의 전쟁은 20여년을 넘도록 길고도 질겼다.


신라의 지분을 주고 싶지 않았던 당나라는 단독으로 고구려를 멸망시켜 한반도까지 전부 집어 삼키려는 야욕이 돋보이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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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고종은 당태종의 유업을 완수한다는 생각으로 고구려에 집착했을지도 모른다.



백제 부흥운동과 계림 도독부 설치

백제 방면에서는 내사지성을 흠순을 비롯한 여러 장군들이 힘을 합쳐 격파하고 1년 후에 흠순과 천존이 거열성을 공격하여 수급만 700개, 목을 벤 것이 1070개가 넘는 대승을 거두었다. 백제가 완전히 멸망하자 신라에 당나라는 계림 대도독부를 설치하였고 왕을 계림주 대도독으로 삼았다. 이것은 한반도를 집어삼키려는 야심을 보인 것이라 할 수 있다. 663년에 부여풍과 복신과 도침 그리고 백제의 검인 흑치상지가 같이 의기투합하여 백제 부흥운동을 펼쳤는데 부여풍을 왕으로 삼았다.


처음에는 웅진성(충남 공주)에서 부흥운동을 하였다. 그러나 나당연합에군이 가는 곳 마다 격파 당하였다. 주류성(전북부안)을 비롯해 여러성이 함락되었으나 임존성(충남예산)의 지수신만은 항쟁을 이어나갔다. 흑치상지(黑齒常之)가 도망하여 흩어진 무리들을 불러 모으니 열흘 사이에 돌아와 붙은 자가 3만여 명이었다.


정방이 군사를 보내 공격하니 상지가 막아 싸워 무너뜨리고 다시 2백여 성을 빼앗으니 정방은 이길 수 없었다. 흑치상지는 사타상여(沙吒相如)와 험한 곳에 의지하며 복신에게 호응하더니, 이때에 이르러 모두 항복하였다. 신라의 인궤는 임존성(충남예산)을 빼앗아 스스로 공적을 드러내라고 하고는 곧 갑옷과 무기, 군량을 주었다. 인사가 말하기를, “그들의 길들여지지 않은 마음은 믿기 어려운데 만일 갑옷과 곡식을 건네준다면 도적의 편의를 도와주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인궤가 말하기를, “내가 상여와 상지를 보니 충성스럽고 계책이 있습니다. 기회를 타서 공을 세운다는데 오히려 무엇을 의심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두 사람이 마침내 그 성을 빼앗으니, 지수신은 처자를 버려두고 고구려로 달아나고 나머지 무리는 모두 평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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