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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왕, 신라를 삼국의 주도권을 가져오다

신라를 더 이상 약소국이라 부르지 마라

by 꿈부기

신라는 법흥왕 때 포석을 놓았고 진흥왕 때가 된 후에 본격적인 대야망의 수싸움이 시작되었다. 진흥왕이 왕위에 오른 나이가 과연 몇 살쯤 일까?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은 17세에 왕위에 등극하였다고 한다. 진흥왕은 아직 어린 나이인 15세에 제위에 올라 어머니의 섭정 기를 거쳐 성장하였다. 사실 어머니의 손에 권력이 집중되어 있었던 형국이었다. 진흥왕도 어쩌면 '왕권'에 위협을 당할 수도 있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어머니인 지소태후의 섭정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고 551년(진흥왕 12년), 연호를 건원에서 '개국(開國)'으로 바꾸던 해가 18살이 되던 해이어서 이때부터 비로소 진흥왕의 정치는 본격적으로 어머니 손에서 벗어나서 정치를 자주적으로 했다고 많은 사람들이 추정하고 있다. 개국이 ‘나라를 열다’라는 뜻이니 자신의 뜻을 본격적으로 펼치려는 의지를 담은 연호로 볼 수도 있겠다.

진흥왕의 양득 수

장기에서는 ‘양득’이라는 수가 있다. 초반에 상대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많이 사용하는데 신라 진흥왕이 이 시기에 사용한 수가 이와 비슷하다.

550년 정월에 고구려의 도살성(세종시 전의면)을 백제가 점령하였고 3월에는 백제의 금현성(진천군 진천읍)을 고구려가 점령하였다. 이때 백제, 고구려 두나라가 각 성 점령 후 군사적으로 피로한 시점을 틈 타, 신라 진흥왕이 이사부로 하여금 도살성(세종시 전의면)과 금현성(진천군 진천읍)을 모두 빼앗아 증축하여 1000명의 군사로 지키게 하였다. 이것이야말로 진흥왕의 양득 수라고 볼 수 있다. 백제 성왕과 고구려 양원왕 간의 싸움에서 일거양득을 노린 진흥왕의 명철함이 돋보인 수이다.

이로 인해 적성(지금의 단양)에서 도살성(세종 전의면)까지 영토를 확장하게 되었고 4년 후 일어날 관산성(옥천) 전투의 전주곡이 되었다.

한강유역을 차지한 진흥왕의 야망과 지혜

551년 개국으로 연호를 바꾼 뒤에 백제와 함께 나제동맹군은 고구려땅인 한강유역을 차지하려고 북진했다. 그 결과 거칠부를 앞세워 고구려를 공격한 것이 크게 성공해 고구려 동남부 10군을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백제는 서남부 6군을 차지하게 된다. 하지만 진흥왕의 야심 찬 야망은 한강 상류 지역인 동남부 10군보다는 서해 진출과 대중국 교류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백제가 차지한 서남부 6군을 차지하여, 서해 진출로 가는 교두보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에 진흥왕은 망설임 없이 553년에 백제의 6군을 빼앗고 신주를 설치해 군주로 김무력을 자리에 앉힌다. 이로 인해 신라는 백제로부터 한강 하류까지 확보하게 되었으며 백제를 고구려와 지리적으로 단절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백제와 신라의 오래된 나제동맹도 120년 만에 완전히 결렬되었다.


한강지역을 차지함으로 지리적으로는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끼인 형국 일수도 있었지만 진흥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강확보를 선택한 이유는 김포평야 이천으로 가는 곡창지대인 기름진 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운송에도 유리하고 서해 진출이라는 한강이 주는 이익은 그 불리함을 이겨내고도 남았다. 하지만 이렇게 큰 수를 진흥왕이 둘 수 있었던 것은 은밀한 고구려와의 동맹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대외적으로 돌궐이 득세하면서 돌궐과 북주를 경계해야만 했는데 신라가 득세하기 시작하는 것을 보면서 커지면 골치가 아파질 것이라 예상을 했을 것이다. 남쪽에도 적을 두기에는 너무나도 부담스러웠던 고구려는 극적으로 신라와 타협하였고, 진흥왕은 이러한 고구려의 약점을 이용하여 나제동맹에서 나 여동맹으로 갈아타고, 한강을 취하는데 매우 영리한 기지를 발휘하였다고 볼 수 있다.

신라가 고구려와 동맹하여 한강유역을 빼앗은 사실을 안 백제 성왕은 매우 분노하였고 고구려영토인 한강으로 북진 계획에서 신라영토인 관산성(옥천)으로 서진하려고 마음먹게 된다.


관산성 전투, 백제의 묘수인 줄 알았던 악수

왜 하필 군사적 요충지도 아닌 관산성(옥천)에서 전투가 벌어졌을까? 신라는 백제로부터 점령한 한강하류지역에 신주를 설치하여 만반의 준비를 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백제는 이를 역으로 이용하여 신라변방인 관산성을 정벌해서 금성(경주)까지 들어가 신라를 완전히 점령하는 전략을 수립했을 것이라 추측한다. 이때 성왕은 대외적으로 자신의 딸을 진흥왕에게 시집을 보내어 시간을 확보하며, 백제의 영원한 동맹인 가야의 지원을 받아 3만 명의 군대가 관산성(옥천)으로 집결하여 신라를 공격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신라에겐 한강이 있었지만 백제는 보병과 기병으로만 부여에서 옥천까지 보급, 수송을 함으로 군사적인 피로도가 매우 높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관산성(옥천) 전투 초반에는 백제 성왕의 아들 부여창이 선전해 주었다. 하지만 신라 주력군인 신주의 김무력 군(한강주변), 삼 년 산군(보은)의 도도가 합류하여 수가 불리한 백제에게 청천벽력 같은 일이 생기고 만다. 이는 아들을 응원하러 가던 백제 성왕이 구천변에서 신라 도도의 손에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전장에 50명의 군사만 데리고 가던 성왕은 너무도 어이없게 적장에게 죽임을 당하는데 전투를 깊이 생각하지 않은 성왕의 경솔함이 보이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총 백제군 3만 명 중 29,600명 죽은 관산성(옥천) 전투에서 백제는 괴멸적 피해를 얻어 무왕이전까지 신라를 공격하지 못하였다. 이후 백제는 충남, 호남북일대의 영토만 있는 나라가 되었으며 신라와의 비교 열위가 확정되는 순간이 바로 관산성전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야 신라에 의해 역사 속으로 사라지다

진흥왕 23년 7월에는 신라가 백제의 변방을 침략하는 일이 있었다. 이것은 이전까지의 신라에서 찾아볼 수 없는 기백으로서 신라가 백제보다 우월해졌다는 것을 드러내는 하나의 예라 할 수 있다. 진흥왕 때 마무리 지은 것이 바로 가야 완전정복이다. 대가야가 존속하고 있으므로 인해 백제에 지원군을 보내주는 든든한 동맹이 백제 곁에 있다는 것이 이번 관산성 전투에서도 확인이 된바 신라는 대가야라는 존재를 그냥 좌시할 수 없었다.


신라는 이사부를 필두로 하여 사다함을 부장으로 삼아 대가야의 성에 이르렀는데 사다함의 5,000명의 기병이 전담문 앞에서 흰 깃발을 두르고 있는 것을 보고 가야의 군대가 모두 두려워하였다고 한다. 이에 이사부 군대가 뒤늦게 도착했는데 신라의 군세를 보고 대가야는 순순히 항복했다고 한다. 이로써 신라는 대가야까지 병합하면서 가야의 모든 영토를 확보하게 되었다. 이때에 세운 비석이 창녕 척경비로 알려져 있다.


진흥왕은 이번 출정에서 사다함의 공이 가장 크다 여겨 좋은 땅과 노비를 상으로 진흥왕이 주려고 했는데 3번을 사양했는데 진흥왕이 강권해 마지못해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노비는 양인으로 풀어주고 땅은 부하에게 나눠주니 신라 사람들의 귀감이 되었다.


이 일로 인해 신라의 일부가 된 가야는 철의 집산지로 신라에 큰 도움이 되었다. 신라는 합천에 대야부를 설치하였는데 이것은 가야지역을 중요하게 여겨 지혜롭게 통치하려고 하였던 부분으로 보인다.


신라는 무엇보다 무역로 확보에 크나 큰 이점을 가지게 되었다. 이는 한반도에서 가장 중요하고 큰 강인 한강과 낙동강을 품게 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길게 흐르는 낙동강은 신라를 관통하며 주위를 비옥하게 하였고, 한강은 한반도 중부권을 가로지르며 지정학적으로 뿐 아니라 수상교통로로 무역로 확보에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 이후부터 신라는 중국 북제와 양나라를 본격적으로 직접 외교 하기 시작하였고, 565년 북제에게 한 국가로 인정되는 책봉을 받기에 이르렀다.


진흥왕 27년부터는 여러 번 남조의 진나라와 사신을 오갔으며, 당항성을 통해 남조와 북조를 왕래하면서 존재감을 점차 키워 나갔다.


크게 번창하는 태창의 시대를 열다

551년 정월에 개원(改元)했던 연호인 개국(開國)을 568년 태창(太昌)으로 바꾸면서 진흥왕의 시대는 바야흐로 무르익어갔다. 크게 번창해져 감을 의미했던 ‘태창’은 신라의 전성시대임을 말해주는 듯했다.

연호를 바꾸고 나서 6월에 진나라에 사신을 토산물과 함께 보냈다. 이를 유추해 보자면 연호가 바뀌었음을 말해주고자 갔음이 아니었을까 예상해 본다. 이 시기에 신라는 고구려영토인 함경남도에 황초령비와 마운령비도 세웠다고 하니, 고구려 깊숙이 비수를 꽂은 형태로 신라의 강역이 펼쳐져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이후 홍제(鴻濟)로 개원하는데 이는 고구려와의 사이가 벌어진 것을 의식해 대외의 팽창보다 국내 안정에 집중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라 할 수 있다.


한강유역을 신라가 차지한 것의 가장 큰 의미

드넓은 곡창지대가 있는 백제보다 산악지형으로 인해 곡식생산량이 비교 열위 었던 신라를 기름진 한강유역에 기반한 김포평야에서 이천으로 이어지는 드넓은 곡창지대를 획득함과 더불어 중국과 직접 교역을 할 수 있는 서해 진출이 가능해졌다는 점에서 의의가 매우 크다 하겠다. 바닷길을 왜가 가로막고 있어 지리적으로 고립무원이던 신라에게 당항성(현재 화성)은 중국과 직접 교역과 외교를 하는데 매우 중요한 요지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6세기 후반 한강주변 점령은 백제와 고구려를 지리적으로 단절시킴으로써 나제동맹처럼 끈끈한 공수 동맹을 이어가지 못하게 만든 것도 전략적이었다. 백제와 고구려 남북으로 공격을 받을 수도 있지만 이미 백제보단 비교우위를 점했다고 신라는 자신하고 있었을 것이다. 백제는 누구보다 얼리블루머(early bloomer)였지만 풍족한 만큼 지킬 게 많았던 백제는 소백산맥을 뚫고 나온 신라를 막아낼 재간이 없는 듯 보였다. 의자왕이 대야성을 함락했을 때를 제외하곤 백제입장에서는 수많은 공격에 비해 그럴듯한 성과는 없었으니 말이다.

거북이가 토끼를 이기는 지혜

백제는 어느 국가보다 풍족했고 성왕은 백제 어느 왕보다도 명철하고 성군으로 이름난 군주였다. 그에 비해 신라는 고단한 고구려 간섭기를 지나 암울하고 힘든 시간들이 지나고, 진흥왕의 명철함이 빛을 발하면서 법흥왕의 내치가 빛을 발하니, 그 누구보다 늦었던 신라가 백제를 이겼던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 생각한다.

운도 지혜다. 우리 삶에서 현재의 시련을 이겨낼 수 없다고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한 사람보다 현재의 상황을 수용하고 묵묵히 인내의 시간을 최선을 다해 준비한 사람에게 성공할 확률이 올라간다. 신라는 인고의 시간 중에도 용의주도하게 준비하고 최선을 다해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이는 진흥왕의 뛰어난 지략만으로 당대에 업적이 나왔다기보다는 찬란한 역사를 만들어 가는 신라왕들의 대대로 이어진 미래를 위한 큰 혜안 덕분이라 할 수 있다.

진흥왕은 한 수, 한 수를 둘 때마다 몇 수 뒤를 고려해서 움직였고 그 용의주도함은 고구려, 백제, 신라 사이에서 균열을 만들고 신라가 비로소 주도권을 쥐고 삼국의 캐스팅보트(castingvote)로 자리매김해 갔다. 이때까지 대략 150여 년이 지나갔다. 그 인내의 시간 동안 겨우 생존을 도모했던 신라였다. 6세기 들어서야 서서히 힘을 발휘하게 된 신라는 약소국 처지에서 벗어나 한강을 차지할 때까지 150여 년이 걸렸다. 결국은 토끼를 거북이가 이긴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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