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내물 마립간이라고 알고 있는 내물왕은 신라에 김씨 왕위세습을 확립하고 마립간(대군장)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여 왕권강화를 꾀한 군주로서 신라의 중시조격의 왕이었다고 알고 있다. 내물왕의 업적만 보면 신라가 무난하게 성장했다고 느낄 수도 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내물왕 통치기의 신라는 대외적으로 매우 어려운시기를 보냈다. 392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에게 내물왕은 자신의 동생인 대서지의 아들인 실성을 볼모로 보내 신라의 평안을 꾀했다.
영락9년인 399년에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어 “ 왜인이 신라의 국경에 가득하여 성지(城池)를 부수고 노객이 되어 백성으로 삼고자 합니다. 왕께 귀의하니 구해주시길 청합니다.”라고 고구려에게 굴욕적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 결과 고구려는 400년에 5만명의 구원병을 보내줌으로 왜와 금관가야군의 종발성까지 격퇴시켰다. 이로인해 가야의 맹주였던 금관가야가 쇠퇴하는 계기가 되었고 대가야에게 그 지위를 넘기는 계기가 되었다.
신라입장에서는 고구려의 도움으로 주변 적들을 제거할 수 있었으나, 고구려의 군대가 주둔하고 정치를 내정 간섭하는 결과를 낳았다. 광개토대왕이 죽고 뒤이어 제위에 오른 장수왕의 79년의 제위기간 동안 신라는 고구려의 속국적 지위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게된다
실성왕은 10년동안 고구려에서 볼모생활을 끝내고 402년에 서라벌에 돌아와 왕으로 즉위하였다. 아마도 친 고구려왕으로 세우게 만들려는 고구려의 속셈이 있던 것은 아니었는지 추정해 보는 바다.
실성왕 때에도 백제 아신왕의 침공과 왜의 명활성 약탈등 제법 많은 외환(外患)이 있었다. 실성왕은 배다른 동생 눌지의 형제인 복호와 미사흔을 각각 왜와 고구려에 볼모로 보냄으로 평화를 꾀하는 한편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정적인 복호와 미사흔을 제거하고자 하는 속내음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실성왕은 자신의 남은 정적인 눌지를 처단하려 했으나 고구려 군사가 눌지를 보고 "그대의 국왕이 당신을 죽이라고 했으나 지금 그대를 보니 실로 그러지 못하겠소."라고 말한 것이 삼국사기 기록되어 있다.
이로 인해 실성왕은 눌지를 처단하는데 실패하였다. 그 결과 눌지는 제위에 오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