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장소감 : 공간의 정체성을 말하다

문화가 스며든 공간의 차별성

by 혜온
당신의 마음속에 아른거리는 그 공간, 왜 잊히지 않을까요?


어쩌면 마음속에 뚜렷하게 남은 이유는, 단순히 예쁜 인테리어 때문이 아니라 그 장소가 품고 있던 독특한 문화일 수 있습니다. 사실, 공간을 바라볼 때 우리는 대개 눈에 보이는 구조나 디자인만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하지만 한 번 더 생각해보면, 어떤 골목이나 건물에 매혹되는 이유는 그 안에 깃든 이야기가 우리의 감각과 무의식을 흔들어놓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눈으로 본 풍경에 ‘문화적 맥락’이라는 숨은 색채가 더해졌을 때, 그 공간은 단순히 예쁘다거나 편하다를 넘어, 특유의 정체성을 갖게 되는 셈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그 ‘문화적 맥락’이 어떻게 공간을 특별하게 만들고, 결국 우리의 감정까지 움직이는지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파리 거리_문화 공간.jpg
교토 거리_문화 공간.jpg
photo on the left by @hopeweneverseeoctober

어느 도시를 여행할 때 우리는 그곳의 골목이나 광장, 현지인이 즐겨 찾는 카페나 식당 등을 누비며 자연스레 ‘그곳만의 색깔’을 익히게 됩니다. 예를 들면 파리에서 길을 거닐 때, 석조 건물과 테라스가 내뿜는 우아한 낭만이 곧 그 도시의 문화로 다가오고, 일본의 작은 골목길에서는 세밀한 목재 간판이나 정갈한 장식에서 섬세함을 중시하는 정신을 엿볼 수 있지요. 사실 건물을 눈으로 보는 것 같지만, 우리는 그 안에 오랜 세월 쌓인 문화적 기원을 함께 체험하고 있는 셈입니다.


photo on the left from [cheerfultalks.com]

이처럼 공간마다 독특한 개성이 드러나는 건 언어나 종교, 생활양식 같은 복합적인 요소들이 건축 양식과 색채, 재료 선택, 심지어 사람들의 행동 방식까지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문화적 배경이 공간 전체에 깃들어 공간을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장소’로 만들어내는 것이죠. 예컨대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지역에서는 통풍과 채광이 최우선이라 개방형 구조가 흔하고, 추운 지방에서는 단열이 중요해 작은 창문과 두터운 벽이 많습니다. 겉보기엔 비슷해도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탄생한 공간들이 전혀 다른 느낌을 주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고즈넉한 산사(山寺)나 한국 전통 건축물에서는 자연과 어우러지는 디자인이 돋보입니다. 특히 절 마당에 들어서는 순간 느껴지는 차분한 공기와 목탁 소리는, 자연을 존중하면서도 사색을 권장하는 전통사상이 공간 곳곳에 배어 있기 때문이지요.

한국, 운곡서원(雲谷書院)

또 북유럽의 공공장소나 주거지에서는 밝은 우드톤과 미니멀한 디자인이 두드러지는데, 이는 긴 겨울을 보내는 그 지역 특유의 공동체 문화, 실용적이고 편안한 라이프스타일이 반영된 결과입니다. 반면 중동의 전통 시장인 ‘수크(Souk)’에 들어가면, 좁은 골목 사이로 늘어선 향신료 가게와 천들이 시각적·후각적 풍요를 안겨주는데, 이 역시 수백 년간 교역이 활발했던 문화권이라 가능해진 풍경입니다.


문화적 배경은 재료나 구조, 색채 선택뿐 아니라 그 공간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움직이고 교류하느냐에도 영향을 끼칩니다. 서양식 건물에서 복도와 계단을 통해 각 방이 명확히 분리되는 것과 달리, 한옥의 마루는 내부와 외부가 느슨하게 이어지는 공간적 특징을 보여줍니다. 이런 동선과 구성 방식은 곧 사용자들의 생활 패턴, 사생활 유지 방식, 대화나 소통 패턴 등을 바꿔놓게 되죠. 그래서 공간을 디자인할 때 “이곳에서 사람들은 어떤 움직임을 보일까?” “어떤 문화를 바탕으로 이 공간을 사용할까?” 하는 고민이 자연스럽게 따라와야 합니다.


photo by Youngchae Park, from [divisare.com]

그래서 공간은 단지 물리적 객체가 아니라, 그 사회가 형성해온 가치관과 시간의 흔적을 담는 무대 같은 존재입니다. 어떤 도시가 독특한 장소감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그곳에 축적된 삶의 이야기가 공간 구석구석에 아로새겨져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공간을 기획하는 입장에서는 이 ‘문화적 흐름’을 놓치면 안 됩니다. “이 공간을 방문하는 사람이 어떤 문화적 경험을 하게 될까?”라는 질문은, 그저 디자인 차원이 아니라 장소의 본질을 다듬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세심하게 고른 재료와 색채, 사람들의 소통 방식을 배려한 동선 계획—이 모든 것들이 결국엔 공간에 숨결을 불어넣고, 방문객에게 잊지 못할 분위기를 선사하는 셈이니까요.


문화가 녹아든 공간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줍니다. 때론 세련된 구조물보다 훨씬 강렬한 감동을 안겨주며, '도대체 뭐가 이렇게 독특하지?' 하는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하지요. 알고 보면 그것은 건물의 외형만이 아니라, 그 건축물 주변의 역사와 언어, 생활양식이라는 무형의 요소가 함께 엮여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그러니 공간의 분위기를 논하려면, 그곳을 이루는 문화를 결코 떼어놓고 볼 수 없는 거죠.


photo by @Maosung Yao

다음에 새로운 공간을 만들거나, 처음 방문하는 건물을 마주하게 된다면 잠시 멈춰 물어보세요. “이곳은 어떤 문화적 배경에서 태어났을까?” “어떤 스토리를 담고 있을까?” 이런 의문을 가질 때, 공간은 더 이상 단순한 형태나 인테리어로만 보이지 않을 겁니다. 그곳이 왜 그런 색깔을 띠고 있고, 왜 그런 배치가 이루어졌으며, 어떤 가치를 지향하는지 좀 더 명료하게 느낄 수 있지요.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공간이 정체성을 말하는 가장 솔직한 방식일 테니까요.


photo by @lasmaplone

우리 시대에도,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지닌 수많은 공간들이 탄생하고 있습니다. 각 지역의 전통을 새롭게 해석하거나, 여러 문화를 융합해 독특한 장소감을 내세우기도 하지요. 공간기획자의 역할은 바로 이 과정에서 문화를 읽어내고, 그것을 공간에 조화롭게 녹이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건축 재료나 디자인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묵직한 서사를 담아내려는 시도, 바로 그것이 한 공간을 오래도록 빛나게 하고, 사람들에게 깊은 공감을 이끌어내는 힘의 원천이 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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